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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적인 현행범>의 줄거리: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마치시고 곧바로 예수님은 체포되십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 전체의 모든 사건에서 예수님은 그런 일들을 당하셔야 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은 다 내게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체포되심은 내게 있는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영적인 현행범
(마가복음 14:43~52)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적인 현행범>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적인 현행범’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신 후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로부터 체포당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는 이들의 앞잡이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고 암호로 체포해야 될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이 본문의 장면을 영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성경 해석이란 성경에 기록된 문자들이 현재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로부터 시작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갖가지 어려움과 사건을 겪으시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겪으셔야 할 죄가 없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장면들을 단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써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장면마다 내게 체포당할 이유가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합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는 장면이나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장면에서도 또한 그 자리가 나의 자리이며 내가 고통을 받아야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심은 영적인 의미에서 내가 현행범임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창조주로써 피조물인 사람에게 체포를 당하신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십니다. 바로 내가 영적 현행범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여러분께 문제 하나를 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우연히 소매치기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의감이 발동하여 소매치기와 격투 끝에 붙잡게 되었습니다. 경찰이 아니지만 범인을 체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체포는 정당한 체포일까요?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범죄의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누구든지 현행범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르는 살인죄를 지었을지라도 현행범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체포와 구속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만 구속은 피고인이 도망과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범죄사실이 명확한 현행범에 대해서는 영장청구 없이 즉시 체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체포되신 이유는 내가 영적인 현행범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요지를 담아 예수님의 체포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48~49절 말씀을 통해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할 이유가 있었다면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실 때에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고 백성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밤을 틈타 현행범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검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께 몰려왔던 것입니다. 오히려 죄는 예수님께 뒤집어씌우고자 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죄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악행은 곧 나의 악행에 대한 반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하는 만큼 내가 체포당해야 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의 과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었다면 내가 뺨맞고 침 뱉음을 당해야 하는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예수님을 채찍질해서 살점을 떨어지게 하였다면 그 또한 죄인으로써 내가 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함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것은 내가 영적인 현행범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본문 51~52절을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인물이 누구냐를 두고 여러 추측을 내놓습니다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내용이 예수님의 체포에 연결되어 기록된 이유입니다. 현행범들의 마음상태를 그대로 드러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행범은 범죄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이 청년은 베 홑이불로 몸을 가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잡히니까 홑이불을 던져버리고 도망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나체로 도망칠 바에야 차라리 붙잡혀서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다고 변명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행범의 심리에서는 붙잡힌다는 발상 자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근심하여 어떻게든지 잡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과 같은 상태가 지구에 살아가는 75억 인류 누구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현행범의 상태는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드러납니다. 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이것이 범죄 현장을 떠나지 못하면서도 붙잡힐까 노심초사하는 영적인 현행범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현행범의 마음가짐을 벗을 수 있다면 삶에 평강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것은 현행범인 나를 대신해서 체포되신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것일까요? 물론 내가 어긴 것은 대한민국의 형사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내가 현행범임은 분명합니다. 현장에서 붙잡히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현행범의 특징이 삶을 통해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현행범이라고 해서 그 죄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범죄이기에 영적인 현행범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큰 범죄에 대한 현행범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에서 현행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셔야만 했던 이유를 제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늘을 향하여 현행범이고, 두 번째는 땅을 향하여 현행범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채워질 때에 만족과 기쁨을 느끼고 채워진 상태가 지속될 때에 평강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땅이 아닌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사람이라면 마음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을 채워주실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마음이 땅에서 어슬렁거려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로 하늘에 대한 현행범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재벌2세 아가씨가 패러글라이딩을 만드는 회사의 시제품을 시험하다가 폭풍에 휩쓸려서 북한으로 넘어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북한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재벌 아가씨가 북한 땅에 불시착했다는 점이 여러 가지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불시착의 결과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구의 75억 인류가 이 땅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류에게서 나타난 마음의 불시착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땅에 있는 것들로는 채워질 수가 없기에 땅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밀입국이기에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땅에서 돈으로 마음을 채워보고자 하는 시도는 대한민국에서 마약밀매나 마약투약과 다를 바가 없는 죄입니다. 마약투약이 현행범으로 잡힐 수 있듯이 돈으로 마음 채우는 것은 영적인 현행범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뻐하는 것도 현행범이고 돈이 없다고 슬퍼하는 것도 현행범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다가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기뻐하는 마음이 영적으로 현행범입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없으면 못 산다고 여기는 마음이 영적으로 현행범입니다.
현행범이 아닌 경우 즉 죄를 안 지은 경우는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즐겁기 때문에 장사가 잘돼도 감사하고 안돼도 감사합니다. 기쁨의 원인이 돈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장사가 잘돼야 기쁘고 안되면 슬퍼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짓는 현행범이 된 것입니다. 현행범이기에 체포되어야 마땅하고 십자가의 처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현행범으로 잡히지도 않고 처벌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신 잡히시고 처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통해 기뻐하고자 한다면 현행범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아내 때문에 기뻐하고 남편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한 죄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부모가 되고 자녀 때문에 기뻐하게 되었다면 그 또한 현행범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녀를 통해서 기뻐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고 기쁨과 만족을 얻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배우자나 자녀로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창조의 규칙을 어긴 현행범이 된 것입니다. 그 죗값은 살점이 다 떨어지도록 채찍에 맞아야 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써 원죄를 가진 인류 중에는 현행범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죄가 없는 인간으로 오셔서 본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족과 기쁨으로 삼으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것이 나의 악함에 대한 반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모욕과 처벌이 본래 나에게 임해야 마땅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일까요? 애인 때문에 기뻐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애인을 만나면 애인에게서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다만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행범이 아닌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땅에 대한 현행범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비가 온다고 여깁니다. 또 아무 생각 없이 바람이 분다고 여깁니다.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생각은 실은 현행범의 사고방식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피조의 세계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바람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매사에 인정하는 것이 법을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것은 지구의 자전이라는 자연현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땅에 대한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하는 마땅한 현행범입니다.
우리의 삶을 예로 들어봅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된 이유를 나의 장사수완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현행범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게 하셨음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반대로 돈이 벌리지 않았습니다. 이때에도 단지 장사가 안돼서 돈을 못 벌었다고 생각한다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할 현행범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돈을 못 벌게 하신 것임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침에 청와대에 출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현행범의 생각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문재인 대통령을 청와대에 출근하도록 허락하셨기에 이루어진 일임을 아는 것이 인간 본연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단 한순간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저 뉴스에서 소개될 뿐 나와 무관하게 여겨지는 일일지라도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며 판단하고 생각한다면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현행범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서 현행범으로 살아왔습니다. 지하철에서 소매치기가 현행범으로 잡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죄를 짓고 땅을 향하여 죄를 짓는 현행범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현행범으로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대관령 태백산맥만큼을 쌓아도 쌓을 수가 없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비를 내리게 하시고 해를 뜨게 하시고 바람 불게 하십니다. 참새가 공중을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중을 날게 하고 계십니다. 들에 백합화가 스스로 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합화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보면서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의식 안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죽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것은 목적 없이 존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못 벌거나 병이 나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현행범이고 그 죗값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내 의식 안에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인으로써의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오늘도 살아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신 체포되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뺨을 맞으시고 채찍질 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죽으셨음에도 우리는 체질상 현행범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보고자 구걸이라도 하듯이 땅을 배회합니다. 직장을 얻어서 돈 벌고 출세해서 기뻐하려 하고 건강하고 장수해서 만족해보고자 합니다. 영적인 거지근성으로 이 땅을 어슬렁거립니다. 그러는 가운데 엄연히 살아계시며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습니다. 의식 안에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같이 죽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경찰이 현행범을 체포할 때에 수갑을 채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체포하는 수갑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현행범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장갑으로 삼으실 때에 비로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수갑삼아 나 자신을 체포하는 일을 날마다 할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십자가의 형벌을 내리는 현행범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을 나의 형벌로 받아들여 십자가로 체포하시기를 바랍니다. 체포는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하늘을 향한 범죄는 마음이 땅을 어슬렁거리면서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을 향한 범죄는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말살하며 말과 행동과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행범의 모습을 십자가로 체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을 누리고,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복지를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체포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모든 것을 버리심으로써 이루신 십자가에서 하늘을 향한 현행범, 땅을 향한 현행범의 모습에 대해 스스로를 체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