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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부인하기 피하는 법>의 줄거리: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뱉은 말입니다. 랍비가 한 사람을 유대교에서 축출하기 위해 파문을 선고할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베드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마음과 의식이 따로 분리되어 있을 수 있고, 그 마음은 하늘에 의식은 땅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 부인하기 피하는 법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부인하기 피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부인하기 피하는 법’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베드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회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저주하며 부인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입니다. 공생애 기적의 예수님이 아니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던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결정되어진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시기 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를 부인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오늘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로부터 예수님은 끊임없이 부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울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는 삶의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마음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 두 가지를 깨달을 때에 예수님 부인도 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의 마음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람의 알라, 힌두교의 브라흐마, 불교의 미륵불 같은 종교의 신들이 될 수 없습니다. 무속 신앙인들이 삼신할머니나 산신령을 믿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알라, 여호와 하나님과 브라흐마,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식의 논법은 사실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이유는 돈 대신에 붙잡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형통하고 번영하고 승진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얻으려는 대신에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자녀의 형통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려는 것 대신에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알라 대신에, 브라흐마 대신에, 미륵불 대신에 하나님을 붙잡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지구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채워서 만족하려는 욕구는 삶을 움직여가는 에너지입니다. 이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인 기쁨과 만족을 돈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건강 장수 대신에 하나님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자녀의 형통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하다가 이제는 하나님께 기쁨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있는 지구 위 삶의 현장 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돈 대신에 붙잡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권력이나 승진 대신에, 출세 대신에, 형통 대신에 붙잡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점을 몰랐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재물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하고 성공과 번영과 출세를 좋아하면서 알라를 택하고 브라흐마를 택하고 미륵불을 택하고 바알이나 아세라를 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가짜 신들을 택하게 만드는 다른 신들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바알과 하나님을 같은 선상에 두고 대결을 펼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믿어지는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결을 하고 있었던 것은 바알이 아닌 풍요와 다산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으로써 하나님과 풍요와 다산 중에 선택하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재물과 출세와 승진 같은 것들을 갖게 해주시는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체포되어 그러한 가능성이 깨어지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은 월급을 기뻐하고 승진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부부는 서로에게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인하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배우자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기쁨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부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기쁨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벌듯이 하나님을 벌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돈 대신에 승진 대신에 건강 대신에 월급 대신에 이 세상의 형통과 번영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반드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통하는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들을 여전히 좋아하는 중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부를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이고 가짜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로는 결코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대상으로 선택되셔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은 이슬람교의 알라나 힌두교의 브라흐마처럼 종교의 울타리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의 현장에서만 우리에게 선택되실 수 있는 참 신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의 마음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장소로 비어있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속성을 가지고 육체의 감각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활동 전체가 의식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며 손으로 만져 감각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시킵니다.
이 의식과 별도로 마음은 무엇인가를 채워서 만족하고 기쁨을 얻어야만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마음과 의식은 연결이 되어있고 상관관계를 가지고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마음과 의식은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습니다. 한 공간에 머물러 한 대상에 집중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까지 부인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청년이 이상형의 여인을 발견하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의식을 따라서 이 여인과 결혼을 하면 기쁘고 만족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굳이 의식하고 있는 대상에게 마음까지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기쁨과 만족의 다른 신이 되어버린 것은 마음이 의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의식을 따르는 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여인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여인은 마음 채움을 추구하기 위한 대상이 되지 않고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대상이 됩니다.
예전에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등장인물 중에 똑똑한 손녀를 둔 윤 여사라 불리는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서울대 의대를 나와서 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손녀만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되면 3대를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배출하는 집안이라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 권사님의 생애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이러한 명예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수십억을 아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드라마가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람대로 손녀가 서울대에 입학했다고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윤 여사가 동료 권사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희색이 만면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즐겁고 음식을 주문하면서도 즐겁습니다. 이 기쁨의 이유는 마음이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손녀의 서울대 의대 합격이 마음을 채운 상태에서 동료들을 만나고 식사를 하는 등 전혀 별개의 지정의 활동을 해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과 의식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편 그 자리에 남편의 사업이 부도위기를 맞게 된 권사님이 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분의 마음에서는 남편의 사업이 다른 신이 된 상태입니다. 윤 여사와 똑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전혀 딴판입니다. 숨 쉴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음식의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마음과 의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전혀 별개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과 의식의 구조를 모른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시고 죽음의 자리로 나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까지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내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지정의가 활동되고 있는 중이라도 마음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에 계신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위한 길을 내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윤 여사의 의식은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 있을지라도 그 마음은 손녀의 서울대 입학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석가모니도 다 죽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도 모두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육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기쁨이신 하나님을 갖게 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죽음을 자처하시고 십자가를 향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에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사실을 모른다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규정하고 고발하여 사형을 받게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했다는 것은 이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맹세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님과 한패가 아님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이 살길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기쁨과 만족의 마음 채움이 하나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직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승진이라는 기쁨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승진 대신에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윤 여사의 몸이 식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마음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손녀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었고, 반대로 남편의 사업이 부도위기에 처한 권사님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는 중에도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똑같은 자리에 있으나 한 사람은 기뻐하고 한 사람은 근심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의식과 마음을 함께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해야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 여사가 식당 안에서 손녀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직장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직장의 일들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떠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서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거리 대신에 택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종교의 신 대신에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믿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현장에서 사업하는 현장에서라야 돈 대신에 하나님을 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 대신에 하나님을 기쁨으로 택할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녀 앞에서 자녀 대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택할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의 기쁨거리를 추구하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택함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시는 예수님을 반드시 부인하게 됩니다.
마음과 의식이 분리되지 못한 채 세상에서 기쁨거리를 추구하는 중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은 여러분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이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낸 가짜 예수일 뿐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지금 세상에서 기쁨거리를 찾고 있는 나를 죽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 기쁨거리를 붙잡고 있는 나를 죽이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의 마음을 세상에서 빼내어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시기 위해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윤 여사가 손녀로 인해 기뻐하며 식사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도 얼마든지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 윤 여사 마음에 기쁨의 대상이 된 손녀와 서울대는 이 땅에 속하였기에 온전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온전한 기쁨이 되어주십니다.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있도록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부인하기를 피하는 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알라나 브라흐마나 삼신할머니나 산신령 대신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는 세상 가치들을 대신하십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는 마음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식은 땅에서 지정의의 움직임을 통해 살아가되,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기쁨거리로 선택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기쁨거리를 대체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동안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거리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면 그 기쁨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수 없다면 베드로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기쁨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기쁨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라나 브라흐마 같은 우상의 대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다른 신이 될 수 있는 재물과 건강과 성공 같은 세상의 가치 대신에 택해야 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에게서 기쁨이 된다고 믿었던 재물과 건강과 형통과 번영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쁨으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삶의 현장 어디에서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은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의식은 이 땅에서 웃으며 행복감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