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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현장의 기쁨 시스템을 바꾸자_태승철 (마가복음 15: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7.11|조회수6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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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장의 기쁨 시스템을 바꾸자>의 줄거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신 외에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체포되어 사형이 결정된 유대인의 왕 예수님과 식민지 유대인의 나라에서 황제를 대표하는 총독 빌라도의 만남. 이 만남에서 예수님은 침묵을 통해 선민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기쁨 시스템을 바꾸라고.


현장의 기쁨 시스템을 바꾸자

(마가복음 15:1~5)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현장의 기쁨 시스템을 바꾸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현장의 기쁨 시스템을 바꾸자

현장이란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가정 직장 학교를 비롯한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나 각각의 기쁨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자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기쁨 시스템을 바꾸어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기에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사형을 언도할 수는 있었지만 집행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오직 로마 당국만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고 예수님이 받게 되실 십자가형도 로마식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 땅에서 황제의 권력을 대신하던 사람은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 죽이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다만 당시 로마는 식민지국가들의 종교에 비교적 관대하였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사형을 언도했지만 유대교 신도가 아니었던 빌라도에게 있어서 신성모독 죄는 설득력이 있는 죄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빌라도 앞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예수님을 모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을 자칭하여 로마당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갖고있다는 식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신 예수님께서는 이후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이 광경이 좀 더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긴 하였으나 반역과 연결 지을 왕다움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기준에서 왕을 자청하고자 했다면 정치적 세력과 추종자들이 있어야 했고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력도 필요했으며 반란을 위한 군사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을 풀어서 조사해보아도 예수님께는 세력도 재력도 없었고 군사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신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예수님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들이 예수님의 인기를 질투하여 모함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냥 풀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이 참 특이합니다. 유대인들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에 잡히셔서 사형언도를 받고 유대인들에 의해서 끌려오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온갖 빌미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지만 빌라도가 느끼기에도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마가는 본문에 나타난 빌라도와 예수님의 차이를 통해 두 나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와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인정하심과 이어진 침묵은 두 나라가 서로 섞이거나 전혀 타협할 수 없으며 교류할 수도 없는 분리된 나라임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한복음 1836절에서 더욱 자세히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인정하신 유대인이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참 선민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서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세상 나라에 속할 것인지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 속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강한 요청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와 빌라도가 대표한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표하는 나라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대표하는 나라는 세상에 속해있는 나라입니다.

 

나라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임금에게 기대했던 것이란 먹고 마시는 양식의 안정적인 보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임금의 역할을 양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하십니다. 다만 예수님이 제공하시고자 했던 양식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같은 장 27절을 보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고,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양식을 먹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들어가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육체가 아닌 마음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공하시기에 임금이심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의 배부름은 곧 기쁨과 만족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11절을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또 13절을 보면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앞선 말씀들로부터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이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과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임금의 역할이란 백성의 양식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누리고 계셨던 기쁨과 만족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 기쁨과 만족은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 임금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삶의 현장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느 곳에서나 예수님 믿기가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더라도 식당에서 외식을 할 때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받아서 마음을 배불리고 갈증을 해소하며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삶의 현장에서는 각각의 기쁨 시스템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성과 월급인상 승진과 같은 이름의 기쁨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회사라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성과를 내서 월급을 올리고 승진을 하면 기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이를 목표로 일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가 바로 기쁨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에 속한 나라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믿기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는 사람으로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존재하는 기쁨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회사에서 입사동기들이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승진하여 월급을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서는 회사를 지배하고 있는 기쁨 시스템이 작동하는 중입니다. 예수를 믿는 내가 회사의 기쁨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과를 많이 내야 기쁠 수 있고 승진해서 월급이 올라야 만족할 수 있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았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으로 마음이 배부르고 갈증은 해소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쁨 시스템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승진으로 기뻐할 때에 똑같이 기뻐한다면 빌라도가 대표하는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속했다면 회사에서 승진이 기뻐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며 승진을 못했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임금 되신 나라의 기쁨 시스템은 무엇일까요? 앞서 살펴보았던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이 무엇인지는 앞선 11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인격의 복사본이신 성령님께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시고, 하나님의 인격의 복사본이신 성령님께서 또한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써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삼위일체 되심이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 시스템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회사에서 기쁨 시스템을 바꾸면 승진을 하든 못하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기쁨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더 이상 승진은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승진을 못했다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면 예수님의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되었음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기쁨 시스템에 지배되고 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을 받아들이시며 기쁨을 누리시듯,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 나는 삶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씀대로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써 주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고유의 기쁨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가장의 수입이 안정되어야 하고, 가족구성원들이 건강하고 하는 일들이 형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기쁨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세상 나라의 기쁨 시스템을 유지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믿음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의 기쁨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예수님이 임금이신 나라 바깥에 나가 있는 것입니다.

임금은 백성의 기쁨과 만족을 보장해줍니다. 예수님이 임금으로써 보장하신 기쁨과 만족은 육체의 양식이 아닌 마음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참 양식으로 누리심으로써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우리에게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세상의 기쁨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기쁨과 만족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의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을 지배하는 세상의 기쁨 시스템을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리시는 기쁨과 만족으로 내 마음을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기쁨 시스템을 바꿀 생각이 없다면 예수님의 나라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에도 예수 믿기는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예수님 나라의 백성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회사나 가정이나 마찬가지로 기쁨 시스템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백화점이라는 현장을 지배하는 기쁨의 시스템은 소비입니다. 가능한 싼 가격으로 가능한 좋은 물건을 살 때에 기쁨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백화점에서 세일을 한다고 하면 좋은 물건을 선점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몰려드는 광경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쁨의 시스템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똑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로 하여 주시는 물건을 살 뿐입니다. 싸게 좋은 물건을 사겠다는 기쁨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화점 안에서도 나는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을 받아들여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백화점이라는 삶의 현장을 지배하려는 세상의 기쁨 시스템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합당한 가격으로 뛰어난 맛을 느낌으로써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식당을 지배하는 기쁨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식당에서도 예수 믿기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식당의 기쁨 시스템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며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삶의 모든 현장은 고유의 기쁨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기쁨 시스템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기쁨 시스템이 허락하는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조차 세상적인 기쁨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숫자적 부흥, 풍부한 예산,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 대중적인 인기가 바로 기쁨의 시스템이었습니다. 요새는 온라인 예배가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시청자를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자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 시스템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회자가 대중적인 인기가 있든지 없든지 기쁨이나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기뻐하거나 슬퍼한다면 예수님 나라에 속한 자가 아니라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 나라에 속한 목회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기가 있든 없든 예산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나라의 기쁨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기쁨과 만족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경시한다면 믿음은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쪽배처럼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으로 기뻐할 것이냐 무엇으로 만족할 것이냐의 문제를 분명히 할 때에 믿음의 방향은 결정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기쁨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원죄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삶의 현장에서 형성된 세상적인 기쁨 시스템에 의해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기쁨 시스템에 지배되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은 자로 여길 수 없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쁨과 만족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기쁨 시스템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의 현장에는 강력하게 세상의 기쁨 시스템이 가동 중입니다. 약하고 악한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 없이는 세상의 기쁨 시스템에 지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받아 누리는 진정한 선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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