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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S) 예수님은 감옥일까 요새일까_태승철 (마가복음 15:6~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7.13|조회수1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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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은 감옥일까 요새일까>의 줄거리:

민란을 꾸미고 주동하다 살인까지 하여 감옥생활 중이던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에 바라바를 선택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바의 자리에 대신 서시게 됩니다. 마음으로 언제나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문해봅니다. 내 마음이 그 안에 있어야 하는 예수님 십자가는 내 마음에 대해서 감옥인가? 요새인가?


예수님은 감옥일까 요새일까

(마가복음 15:6~15)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은 감옥일까 요새일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감옥일까 요새일까

본문에서는 유월절 사면 사건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리는 경축일로써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복절이 되면 특별사면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유월절에도 죄인을 사면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조금 특이한 광경이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사면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으나 대제사장에게 선동당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사형과 바라바의 사면을 요구합니다. 많은 죄수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바라바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감옥과 요새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외부와의 차단과 격리입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가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앨커트래즈 감옥에 수감되었던 때였습니다. 감옥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밤마다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알 카포네의 마음에 큰 고통을 주었다고 합니다.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알 카포네에게 화려한 도시의 야경은 자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당태종 때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의 일입니다. 안시성에서 3개월간 전투가 이어졌고 백성들은 성벽 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알 카포네와 같은 심정으로 자유를 그리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갇혀있다는 사실은 동일했으나 밖에 있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알 카포네에게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안시성 백성들에게 당태종의 군사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옥과 요새의 차이점입니다. 감옥은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의 격리이고, 요새는 싫어하는 대상으로부터의 격리입니다. 격리와 차단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격리되고 차단되었느냐가 문제입니다. 바깥에 좋아하는 대상이 있느냐 싫어하는 대상이 있느냐에 따라 처한 상황은 감옥이 될 수도 있고 요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유월절 특별사면을 놓고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 사이에 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놀랐을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사면을 요청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사면은커녕 십자가형을 내리라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14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의아해하며 묻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군사를 풀어 체포당한 예수님의 죄에 대한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십자가형을 내릴만한 죄목을 찾을 수 없었기에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다른 잘못이 있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으로부터 선동을 당한 무리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십자가형을 주장합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은 미움을 받고 계셨습니다.

이 선동을 당한 무리들 중에는 본래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고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치유되는 광경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십자가형을 외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추구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면 충분히 메시아 자격을 인정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이 볼 때에도 메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은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성전 뜰에 장사꾼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고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하시고자 했다면 이들은 얻을 이득을 생각하며 전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셨던 모습은 이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재물과 권력과 인기는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바랐던 함포고복할 수 있는 태평성대도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가는 오히려 이러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실망한 만큼 십자가형을 강하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대비되는 인물로 바라바가 등장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 풀어줄 사람을 선택하라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대제사장들에게 선동당한 무리들이 바라바에 대한 사면을 강하게 요청해온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바라바에 대해 언급하기를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묘사이긴 하지만 이로부터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로마 식민지하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당연히 조국의 독립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민란을 꾸민 바라바는 주도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방해가 될 경우에는 율법이 금지하는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악독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손 놓고 막연하게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능력과 지혜는 있으셨으나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인기와 부흥과 번영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가룟 유다는 제일 먼저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되고,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이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순간에 바라바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유대인 무리는 빌라도에게 바라바를 놓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곧 세상을 등지신 예수님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악당일지라도 세상친화적인 사람을 곁에 두겠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독립, 민족의 번영, 재물과 권력과 인기, 함포고복할 수 있는 태평성대를 위하여 열정적으로 뛰었으니 사람을 죽인 것 정도는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의 바라바 사면에 대한 요청은 곧 예수님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능력과 지혜가 탁월하셨지만 세상을 등진 예수님보다는 능력과 지혜는 없지만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바라바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형은 유대라는 인간사회로부터의 격리와 차단과 멸절의 장소였습니다. 실제로 무리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무리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했다는 것은 곧 바라바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십자가라는 감옥에 내 마음을 감금시키는 것입니다.

감금은 곧 격리이자 차단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으로부터 격리되고 차단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드림으로써 재물과 권력과 인기와 안정적인 삶의 환경으로부터 마음은 격리되고 차단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른 채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로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복음을 전혀 모르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차단되고 격리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라바가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마음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알 카포네는 앨커트래즈 감옥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며 고통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에 마음은 재물과 권력과 인기와 안정된 삶의 조건들로부터 격리되고 차단되게 됩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을 소원한다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잘 믿어서 세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문제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올바른 전도를 받을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돌이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부터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들과는 완전히 차단된 십자가의 자리에 서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마음을 세상과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감옥으로 스스로를 감금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금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앞서 감옥과 요새의 차이는 바깥에 있는 대상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달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에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감 중에 동료를 폭행하여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바닥이 들린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뜯어보았더니 틈 사이에 숨겨진 다이아몬드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 감옥의 독방은 더 이상 독방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닌 요새요 안식처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격리하고 차단시킨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마음을 드려서 연합하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과 격리되고 차단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감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갇혀있게 된 우리의 마음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음은 세상의 가치와 차단되어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과 인기와 안정된 삶으로부터 차단되었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더는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되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듯이 예수님 안에 감금되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고 빛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좋아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잊고 황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경험하고 나면 사도 바울의 말대로 세상에서 좋아하던 모든 일들을 불편하고 불쾌한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옥에서 요새로의 반전입니다.

 

예수님은 감옥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나로부터 철저히 차단하고 격리시킵니다. 도시의 야경을 그리워하던 알 카포네에게 앨커트래즈 감옥은 최대의 방해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감옥이신 예수님은 최대의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고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감옥이 아니라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안시성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둘러싼 성벽이 안식과 평강의 근거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마음을 감금시켜서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감옥이 아닌 요새이자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십니다. 비유컨대 남태평양 섬에 세워진 아름다운 별장이나 빌라와 같이 느껴지게 되실 것입니다.

세상과 나를 격리시키는 예수님이라는 벽이 감옥이 될지 요새가 될지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면 예수님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감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알 카포네처럼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있기를 싫어하기에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바는 알 카포네와 같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재물과 권력과 인기를 위해 마음 놓고 달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끝내 이러한 지도자를 원했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선민들이 세상에서 부흥하고 함포고복할 수 있는 태평성대의 안정된 삶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지도자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을 등지신 예수님은 메시아로써의 능력을 보이셨음에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십자가에서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며 세상에 대해 차단되고 격리되고 감금될 때에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감옥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할 때에 분명히 이 사실을 밝힐 수 있어야만 합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밝히면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밝히지 않는다면 바라바를 택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갈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에도 형통할 수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러한 전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고 복음을 짓밟고 무효화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그동안 이 세상에서 좋게 여겼던 가치들에 대해 격리되고 차단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감옥에서 세상을 꿈꾸는 일은 괴로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때에 이 감옥은 나를 지키는 요새가 됩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별장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제시하고 믿겠는가 물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때에 예수님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감금시키는 감옥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요새이자 안식처이며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자들을 위한 남태평양의 별장이며 빌라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려운 이유는 아직도 마음에서 세상으로부터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기대하는 동안에는 감옥에 갇힌 알 카포네처럼 예수님을 감옥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배우자로부터는 어떠한 기쁨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고자 할 때에 예수님은 요새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날 때에 삶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배우자에게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은 단지 감옥일 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예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별장이고 빌라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를 대하는 사람들마다 요새이자 별장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의 기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의 빌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의 시선을 오직 십자가에 고정시킴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주저하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써 세상의 감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늘 별장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을 매 순간 체험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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