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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없는 것 아니고 필요없는 거다>의 줄거리:
삶이 욕구의 과정인 사람과 표현의 과정인 사람.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삶은 욕구의 과정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채워지면 삶은 표현의 과정입니다. 표현의 과정으로 삶을 사시던 예수님에게 '필요가 없는 것'을 욕구의 과정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없는 것 아니고 필요없는 거다
(마가복음 15:16~32)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없는 것 아니고 필요 없는 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없는 것 아니고 필요 없는 거다’
본문 말씀을 기준으로 볼 때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75억 인구는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욕구하는 삶과 표현하는 삶입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삶은 욕구의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 즉 지정의 활동은 이 욕구에 의해 지배됩니다. 반면에 마음이 채워지면 삶은 표현의 과정이 됩니다. 이때에는 지정의 활동은 표현을 위해 종사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의 내용은 지정의 활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마음이 채워진 상태에서는 표현의 과정으로써의 삶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욕구의 과정으로 삶은 이루어집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의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의 과정으로 살아가는 삶은 죄악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본래 채워진 마음에서 나오는 표현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삶이 시작되기 전에 마음은 이미 채워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채워진 마음에서 생겨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표현하는 과정으로써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표현하는 삶이 아닌 욕구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마음으로 삶의 현장에 뛰어들고 지정의 활동 전체가 욕구하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욕구하는 삶은 죄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을 욕구하는 과정 자체가 죄악입니다. 살면서 때때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채워져있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는 전체가 죄악입니다. 사람들은 평생 무엇인가를 이루었으면 좋겠고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과정은 제대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죄악을 빚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대해 살펴보며 청진기에 비유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명부터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십계명은 단순히 어느 특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십계명에서 언급한 행동들이 나타난다면 욕구하는 삶을 통하여 죄를 빚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일체 되심을 유지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체 되심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이 세상에 표현하시며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처럼 표현의 과정으로 살지 못한 채 욕구의 과정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거나, 하나님의 이름은 알더라도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없는 한 누구나 이 세상을 욕구의 과정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표현의 과정으로써의 삶을 사신 예수님과 욕구의 과정으로써의 삶을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표현하는 삶과 욕구하는 삶의 갈등이 정점에 달한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은 ‘브라이도리온’이라고 불리는 총독 관저에서 일어난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5절에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하였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총독 관저의 뜰에서 로마 군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의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채찍은 말꼬리를 이어서 만들었는데 끝에 쇠갈고리를 달았습니다. 채찍을 치면 긴 채찍이 몸에 감기다가 쇠갈고리가 몸에 박히게 됩니다. 그때 채찍을 당기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십자가형을 언도받더라도 채찍질을 당할 때 이미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이렇게 채찍질을 당하셔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뺨을 때리며 왕관 대신에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또 왕의 홀 대신에 갈대를 오른손에 들려주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주었지 어떠한 피해를 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십자가형의 기준을 넘어서 마치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괴롭힙니다.
본문에 나타난 브라이도리온 총독 관저는 욕구하는 삶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못한 채 세상을 욕구하며 살아가는데 총독 정도 되면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총독 관저에 표현하는 삶을 사신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욕구하는 삶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여겨지는 총독의 부하들이 보기에 예수라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18절을 보면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으나 로마 군사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왕에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어떠한 욕구의 대상도 없었습니다. 남들 위에 설 권력도 없었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재물도 없으며 정복을 위한 군사도 없었습니다. 모든 대중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는 상황이었기에 인기도 없었습니다. 욕구하는 삶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가소롭고 밉게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꼴값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표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욕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차이에서 생겨난 갈등으로부터 모욕과 경멸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권력과 재물과 힘과 인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며 가지고 싶어 하는 대표적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신 예수님은 돈과 권력이 필요 없었고 대중들의 인기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정복하고자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욕구가 예수님의 마음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필요 없었던 것들을 로마 군인들은 그저 없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갈망하고 욕구하는 것들이었기에 필요 없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재벌회장님은 돈을 사랑해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기에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할머니를 보면 돈 벌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돈과 권력이 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그러한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같잖게 여기고 가소롭게 여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는 이 갈등을 일으키는 세 가지 유형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 삶을 욕구의 과정으로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이득 찾기입니다. 24절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조롱하기입니다. 31절에서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였던 것은 로마 군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물론이고 유월절을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디아스포라(외지에 나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구경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빼앗고자 합니다. 삶을 욕구의 과정으로 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이득을 찾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죄 사함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언급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죄 사함의 사건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삶이란 본래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표현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 하나님으로 채우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욕구하는 삶이고 죄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욕구하는 삶을 이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에 대한 가장 큰 모독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죄를 지으면 멸망하고 지옥 간다는 두려움은 있기에 죄 사함을 이득으로 챙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욕구가 여전하기에 욕구하는 삶으로써의 과정은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로마 군인들이 대표하는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두 번째로 조롱하는 유형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욕구하는 삶의 과정에 대해 아무 도움이 안 되며 이해할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밉고 가소롭고 괘씸하게 여겨지기에 십자가에서 죽여서라도 배척하고자 합니다. 미움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합당한 죄목도 없이 미워하였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앞서 살펴본 두 가지와는 다릅니다. 본문에서는 구레네 시몬이라는 인물이 언급됩니다. 21절을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도시 이름입니다. 이곳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시몬 또한 유대인이었기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았으나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됩니다. 이미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실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로마 군인들은 아무나 붙잡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의는 아니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축구시합을 예로 들자면 로마 군인들은 축구시합을 관전하는 관중이었습니다. 시합을 통해 재미를 보려고 합니다. 조롱하던 사람들은 축구가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다른 시합이나 하라고 욕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구레네 시몬은 축구시합에서 뛰는 선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뛰어 들어가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마치 우리 삶에 대한 시뮬레이션 같습니다. 조종사들이 실제와도 같은 시뮬레이션으로 조종연습을 합니다. 골프장에 갈 수 없을 때는 스크린 골프장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즐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구레네 시몬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내가 질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구하는 삶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은 욕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욕구하는 삶을 죽이고 예수님과 같이 표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욕구하는 삶이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내 마음은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욕구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무엇을 욕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죄는 욕구가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욕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땅에서 돈을 욕구하고 건강을 욕구하고 성공을 욕구하는 것은 결코 본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땅에서의 삶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진 뒤에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과정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시뮬레이션이 꺼지면 예외 없이 세상을 욕구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0년 동안 예수를 잘 믿어서 표현하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마음에서 십자가 시뮬레이션이 꺼지는 순간 마음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삶의 현장을 향하게 됩니다. 그 상황으로 빠져들어가면 반드시 욕구하는 삶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시뮬레이션이 켜지고 구레네 시몬의 자리로 들어감으로써만 표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욕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 청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서 결혼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욕구를 따라가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연애를 해도 죄를 짓는 것이고 결혼을 해도 죄를 짓는 것이고 아이를 낳아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욕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이유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욕구하는 것입니다. 결혼이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이 될 때까지 하나님을 욕구합니다. 결혼을 해야만 기쁘고 만족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 변해서 결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을 욕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혼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필요 없는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켜고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 참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채워주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에 묶여있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갖기 위해 무엇도 강요하거나 강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시뮬레이션 안에서 욕구하는 삶의 죽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채움이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반드시 베풀어주십니다.
그럴 때에 결혼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결혼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결혼은 청년의 욕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하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재물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라면 돈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지정의가 돈에 대한 욕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 나를 참여시킴으로써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욕구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할 때에 이윽고 돈은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필요 없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지금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기도이고 주기도의 의미와도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건강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암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건강과 장수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솟구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욕구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건강에 대한 욕구를 따라가면 병 걸린 것도 억울한데 그로부터 계속하여 죄를 짓게 됩니다.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내 마음에 그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의 경멸과 모욕을 받으십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 나를 투입시킵니다. 건강에 대해 욕구하는 나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욕구하고 갈망함으로써 건강함과 장수함이 내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욕구를 죽인다면 삶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게 될까요?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욕구해서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필요 없는 삶이 될 때에 경제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시게 됩니다.
여러분이 없는 것이 많다면 오히려 잘 됐습니다. 없는 만큼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세상 욕구에 대해 죽음으로써 없는 것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전혀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을 욕구하고 바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게 없는 것들을 필요 없는 것들로 여기게 되는 십자가 생활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들을 필요 없게 여기는 마음이 될 때 삶은 하나님으로 주어진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삶이 됩니다. 그럴 때 삶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하에서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동원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끝까지 없는 채로 유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내 마음에서 필요 없다고 여기는 상태가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인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져서 쓰게 되더라도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세상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향한 욕구의 삶은 십자가 시뮬레이션을 통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표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시뮬레이션의 전원이 항상 켜져 있는 상태에서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욕구함의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으로 채워져 표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에 사람들이 볼 때는 내게 없는 것들이 있을지라도 내 마음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로 여길 수 있도록 하나님 부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