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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언제 어디든 십자가만 찬스다>의 줄거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절규하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한순간도 그래 본 적이 없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격리되어 인간의 저주받은 처지로 떨어지신 거지요. 예수님께는 너무나 죄송한데 날마다 우리에게는 놓치면 정말 바보 되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언제 어디든 십자가만 찬스다
(마가복음 15:33~41)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언제 어디든 십자가만 찬스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언제 어디든 십자가만 찬스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유일한 찬스는 십자가뿐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 찬스를 활용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본문을 염두에 두고 한 일화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집안에 미혼모가 발생하게 되면 웬만한 집안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혼모에 대해서 당사자도 밝히기 어렵고 집안에서도 가능하면 숨기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제가 카투사로 복무할 때에 작전훈련처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미군들이 1,2년씩 한국에 복무하기 위해 입국하면 저는 신병들에게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중에 백인 여군이 있었는데 자기를 미혼모라 밝히면서 미혼모로써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미혼모를 별나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홀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두고 한국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왔다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또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분위기가 다릅니다. 직접적으로 독일인 미혼모를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이나마 느꼈던 바로는 독일은 미혼모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혼모를 위한 관련 법률이 존재하고 미혼모를 우선시하고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들이 존재합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미혼모가 되는 편이 팔자를 고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제도적 혜택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미혼모에 대한 관점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미혼모이지만 한국에서는 정신적으로 제도적으로 힘이 듭니다. 미국에서는 정신적으로는 힘들지 않지만 제도적으로는 뒷받침이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정신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미혼모라는 취약계층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는 큽니다. 만약 미혼모에게 국적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당연히 독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러한 독일의 취약계층에 대한 제도적 배려는 미혼모뿐만 아니라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연금제도를 보자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의 가사 시간도 연금으로 환산해줍니다. 전업주부로써 유리한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독일을 선택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국적을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삶을 복지로 바꾸어 살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도적 지원이 없는 미혼모로 살고, 연금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전업주부로 살더라도 독일의 미혼모나 전업주부가 누릴 수 없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찬스를 이용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 찬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의 삶이란 한국의 미혼모로 비유될 수 있는 정신적 제도적 도움이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는 상황은 국적을 독일로 바꾼 미혼모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혼모라는 특정한 상황을 비유로 삼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혼모나 전업주부가 한국과 독일의 제도 중에 선택하라면 독일의 제도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하나님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판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한국이라는 판을 독일이라는 판으로 바꾸면 미혼모나 전업주부라는 상황은 똑같으나 대우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나라를 바꾸듯이 저주의 삶에서 축복의 삶으로 바꾸는 찬스를 제시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스로 붙잡을 때에 삶의 판은 바뀌게 됩니다. 그동안 문제였던 일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미혼모일지라도 한국의 미혼모와 독일의 미혼모의 대우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스로 붙잡으면 독일에서 전업주부의 시간을 연금으로 환산해서 주듯이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복지로 바꾸어주는 찬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 찬스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아파트 투기나 주식 투자 같은 것들은 삶의 판을 바꾸어버리는 십자가 찬스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찬스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돈 한푼 들일 필요가 없고 대단한 수고와 노력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매달리셔서 정오를 지나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적도에 가까운 중동 땅에서 가장 해가 뜨거울 정오에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구시가 되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후에 운명하십니다. 이 말은 당시에 사용되던 아람어로써 34절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찬스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셨다고 소리치셨습니다. 대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왜 버리신 것이고 어디에 버리신 것일까요? 버리셨다는 것의 의미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되심은 중단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버리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의 연결을 일방적으로 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버려지신 곳은 바로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자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울면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세상이 저주의 자리임을 느끼고 울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 세상에 버려지신 것을 너무나도 괴로워하시며 절규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깊이가 10m 함정에 빠져서 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함정이 너무 깊다보니 나가길 포기하고 있는데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이 던져집니다. 그 사람은 이미 포기한 나와는 다르게 함정에 들어온 것을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수님을 저주의 함정으로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셨고 공생애 기간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지만 영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저주받은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 되심을 유지하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이 땅에 계셨음에도 저주의 바깥에 계셨습니다. 이로부터 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주란 바로 하나님께서 마음에 안 계신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고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이 마음에 안 계신 저주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저주의 자리에 떨어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저주받은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찬스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자리에 떨어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버림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마가는 예수님께서 단지 버림받으신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자리에 계셨음을 떠올리며 백부장으로부터 나온 고백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의 함정에 떨어진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죽어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하실 것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의 마음을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동선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주의 자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빠져나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은 무척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를 때에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한 찬스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 저주의 자리를 빠져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혼모에게 독일국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었는데도 바꾸지 않고 한국에서 느끼는 어려움만을 호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세상의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이보다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찬스를 활용하지 못하고 저주의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미혼모가 한국에서 정신적 제도적 고충을 겪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혼모임을 밝히지도 못하고 부모님도 딸이 미혼모임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로부터 생기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살지언정 독일국적을 갖는 찬스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를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는 대신에 세상이 들어와 있는 저주받은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족이 들어와 있고 사업이 들어와 있고 건강 문제 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마음에 이렇게 세상이 들어와 있는 상태가 저주의 자리임을 모릅니다. 이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몸의 건강을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생각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 몸의 건강은 하나님이 생각하십니다. 건강 문제를 미혼모의 상황에 대입하자면 한국을 독일로 바꾸면 되듯이, 하나님을 가질 때에 저주의 자리는 하늘로 바뀌게 됩니다. 처한 상황은 동일하나 다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갖게 되면 삶의 판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저주의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찬스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저주의 자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질적으로 저주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르기에 저주의 자리를 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33절을 다시 보면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둠은 단순히 눈에 보이도록 어두워진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어둠은 마음에 하나님 대신에 세상이 들어와 있는 저주의 상태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객관적으로 아는 것과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저주의 상태에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앞서 하나님이 마음에 안 계신 것이 저주의 상태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저주의 상태에는 3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이중 흑암은 눈에 보이는 상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정오에 흑암이 임했다는 것은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왔던 저주의 자리에 예수님이 떨어지셨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의 자리에 살고 있었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저주의 자리에 떨어지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하신 예수님을 꼭 붙잡을 때에만 예수님과 함께 저주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정오에 임한 어둠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가 육체로 볼 수 있게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특징들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먼저 첫 번째 특징인 혼돈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반대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참 아름다운 말씀이 나옵니다. 13절을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16~18절을 보면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책에 기록하시듯 다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이루어져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배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달이 뜨고 별들이 운행합니다. 생태계의 동식물들도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기록해두신 계획들에 의해 움직여 갈 때에 가장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이에 반대되는 행위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혼돈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인쇄된 책 위에 다른 내용을 인쇄하면 먼저 있었던 내용도 나중에 덧칠해진 내용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대한 보배로운 하나님의 생각들 위에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소원하는 일들을 덧칠한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가려지고 내 생각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혼돈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혼돈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마지막까지 일어나야 될 모든 하나님의 보배로운 계획은 책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내 삶을 살겠다고 덧칠하고 있으니 혼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혼돈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스스로 혼돈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저주의 힘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을 스스로 계획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혼돈이라는 저주의 힘에 붙잡혀서 스스로의 생을 망쳐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저주의 특징은 공허입니다. 저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통해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이를 굶주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기에 이 굶주림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 전까지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공허함을 직면할 때에 공통적인 소원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는 공허함과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았는데도 공허함을 직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채움 거리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픈 사람은 건강하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형통이 기쁘고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거짓 채움 거리입니다. 거짓 채움 거리로 희망을 삼고 있는 동안 공허를 도피하고 외면할 수 있으므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기존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던 모든 대상을 상실하고 더 이상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없다고 여겨질 때에 지금까지 외면하던 공허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은 딱 한 가지의 소원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합니다.
공허는 이처럼 무섭습니다.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체가 있어야만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돈도 육체를 통해서 접합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접하는 대상들로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에는 공허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공허와 직면하게 될 때에 더 이상 살아갈 의욕 자체를 잃게 됩니다. 빨리 죽이는 것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 채움거리들을 희망으로 삼아 그 공허를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자리에 있기에 공허와 앞서 말씀드린 혼돈에 삼켜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저주의 특징은 흑암입니다. 흑암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 즉 지정의가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전기가 나간 수술실에서 외과의사가 수술을 집도한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외과의사가 수술을 통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수술부위를 크고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메스를 움직인다면 수술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정의가 이렇게 흑암의 상황에 처하는 것이 저주의 상태입니다.
흑암의 상태에서는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시키지만 다 거짓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은 보게 하시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볼 수 없는 한 삶에서 나타나는 지정의는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내 삶을 찢고 이웃의 삶을 찢습니다. 감정이 나를 속입니다. 의지가 갈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지금도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모든 사람의 생애를 강력하게 저주 속에 묶어두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혼돈 대신 질서가 생기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생각이 실현되며, 공허함 없이 마음이 채워지고, 하는 일마다 결실을 맺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적재적소에 나타날 수 있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 찬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찬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부부관계도 부모자식관계도 직장에서의 일들도 저주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에서 미혼모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대로 끌어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국적을 독일로 바꾸듯이 저주의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찬스로 사용해야만 합니다.
저주는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 어느 곳에나 임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은 저주 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저주의 자리로 떨어지신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저주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때에 직장도 가정도 판이 바뀌게 됩니다.
비유적으로 우리는 미혼모의 삶에 처해있습니다. 한국에서 미혼모는 저주받은 삶을 강요받습니다. 그런데 미혼모라는 상황은 똑같으나 독일이라는 판으로 바꾸면 삶 또한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십자가 찬스를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지의 삶으로 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찬스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에 있든 삶의 현장을 복지로 바꾸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저희의 심령을 강권적으로 붙잡아주셔서 십자가에 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만을 찬스로 활용하여 언제 어디든 나를 뒤덮고 있는 저주의 기운을 극복하고 기필코 복지를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