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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저주를 보면 삶이 거꾸로 된다_태승철 (마가복음 15:42~4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7.17|조회수84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를 보면 삶이 거꾸로 된다>의 줄거리:

온 세상과 그리고 나 한 사람의 인격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여 있는 저주를 보면, 75억명 각자의 삶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그동안 임하여 있던 저주를 비로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공과 실패가, 승리와 패배가, 일등과 꼴등이 완전히 거꾸로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삶이 이렇게 거꾸로 보여야 저주받은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주를 보면 삶이 거꾸로 된다

(마가복음 15:42~47)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저주를 보면 삶이 거꾸로 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저주를 보면 삶이 거꾸로 된다

저주를 볼 수 없는 삶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저주를 볼 때 삶은 거꾸로 됩니다. 그리고 거꾸로 보는 삶은 옳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자 합니다. 빌라도 앞에 서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시체로 번역된 헬라어는 신체라는 뜻의 소마(σμα)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시체는 프토마(πτμα)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비해 소마는 살아있는 사람의 신체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마가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해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죽음이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지 심장이 멈추고 숨을 쉬지 않게 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유대인과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었지만 이들은 전 인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저주받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특별히 저주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빚어지는 오류는 나의 인생을 완전히 망칠 정도로 중차대합니다. 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주받아 저주에 찌든 상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로부터 저주를 받은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주를 받은 상태란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도 유대인들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기에 저주받은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강렬하게 욕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체되심을 이루시던 하나님께서 관계를 끊으심으로써 저주의 상태에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번에는 인간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십니다. 저주받은 인간들이 저주받으신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저주가 없는 영역으로 던져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시고 또한 사람으로부터 버려지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저주의 영역으로 던져지셨고, 저주받은 사람들에 의해 저주의 영역 바깥으로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말 것인가도 결정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 마음을 묶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계 바깥으로 예수님이 던져지셨다면, 우리의 마음 또한 예수님과 함께 저주받은 세계 바깥으로 던져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 마음을 별개로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 바깥으로 던져지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주받은 세상 안쪽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마음을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에 묶겠다는 것으로써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던져지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구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으나 저주받지 않은 상태이셨습니다. 저주받은 인간세상 바깥쪽에서 이 세상을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지구의 75억 인류는 저주받은 세계 속에서 저주에 찌든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오류에 빠져 살아갑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주받음이란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 설교에서 하나님 없음의 저주가 가지는 세 가지 특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특징으로써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특징이 합쳐질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얼핏 당연하거나 시시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보면 이것은 대단한 문제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천사들의 시각을 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뉴스를 보면 인륜을 져버린 끔찍한 범죄에 대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인면수심이라 욕하며 분개합니다.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인간세상을 볼 때에 그렇게 느낄만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좋아합니다. 천사들은 이 상황을 인면수심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돈을 좋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파괴범을 보고 사람도 아니라 여기는 것처럼, 천사들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좋아하는 우리를 보고 사람도 아니라 여길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을 통해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늘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런 천사들이 세상을 볼 때에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할 만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갖도록 지음 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좋아하고, 하나님 대신 건강하여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인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사람이 아니라고 볼 것입니다.

보다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장로님은 돈을 좋아합니다. 저주에 찌든 마음에서 돈을 좋아하는 소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소원을 따라서 돈을 벌 계획을 세웁니다. 저주에 찌든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생각 또한 저주에 찌들어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고 만족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기대에 차오르게 됩니다. 이 감정 또한 저주에 찌든 감정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해 실행하는 의지 또한 저주에 찌들어있습니다. 저주에 찌든 마음에서 저주에 찌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성공도 승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의 기운이 융성해지고 확장되어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뿐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에 찌든 마음이 발원한 소원을 저주에 찌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목표를 이루었다는 것은 저주의 극대화인 것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해 승리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 대한 승리이자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받은 마음을 가지고 저주에 찌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는 예수님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저주받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저주의 자리로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일체되심은 끊어졌지만 저주에 찌든 사람들과 같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더라면 오히려 실패로 여기셨을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인기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저주받은 곳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저주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결코 좋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에 입각해서 말씀드리자면 돈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임금 삼고자 몰려든 무리를 피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축복으로 여기신 일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갖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을 축복을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합작품입니다. 돈이나 인기나 권력뿐만이 아닙니다. 부부로써 배우자를 좋아하고 부모로써 자녀를 좋아하는 것 또한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경멸과 모욕과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 대한 승리인 이유는 저주에게 미움받아 저주가 없는 곳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공을 오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병환자들이 누가 더 심한 나병을 앓는가를 두고 경쟁한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나병이 빠르고 깊게 몸에 퍼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주에 찌들어서 소원을 발동하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실제로는 저주를 더 크게 키우고 있을 뿐인데 소원을 이루었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이고 저주의 전성기를 이루고자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기대했던 결과로부터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해왔는지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될 것이라 믿었고 저렇게 하면 성공하리라 믿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해왔는지 모릅니다. 수십 번 희망했으나 수십 번 실패하면서 희망은 고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직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하고 기대하고 소망하면서도 정작 세상이 저주받은 곳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저주받았기에 그로부터 비롯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 또한 저주에 찌들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소원해서 추진했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패했기에 잘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대로 성공했다면 저주의 전성기가 도래하여 저주의 기운이 여러분을 완전히 장악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승리이기에 주님을 믿는 우리의 실패와 망함과 좌절은 은혜입니다. 우리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저주의 기운을 하나님이 억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부자와 거지를 비유로 삼으신 것일까요? 부자를 비판하고 싶으셨다면 부자와 철학자를 비교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고,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고 싶으셨다면 방랑시인 김삿갓 같은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으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람들이 기피하는 거지 나사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나사로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는 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고 온몸에는 피부병이 들어 개가 핥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손을 닦고 버린 빵이나 주워 먹고 살아가던 처지였습니다. 대체 왜 나사로는 천당에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저주받은 곳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저주의 장아찌가 되어서 살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에 이 비유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상태는 저주받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주의 기운이 가장 미약한 상태로 억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저주받은 마음에서 발동한 소원대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1등 하여 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저주에 찌든 마음으로 소원을 발동하고 저주받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동원해서 소원을 성취했다면 저주의 영주권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국에서 말씀을 듣고 계신 분들 중에 아직 영주권을 받지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께는 영주권을 받는 것이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큰 문제는 미국의 영주권을 언제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저주에 찌든 마음이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안정된 조건을 갖추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저주의 영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고 해서 바랐던 안정이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영주권을 받은 분들 역시 예수님께 마음을 묶어서 저주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비단 미국에 사시는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저주에 먹혀버린 마음에서 비롯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별볼일없는 삶을 살고 계시다면 오히려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긴다면 저주 영주권자가 되기 쉬운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이느냐를 두고 고민들을 하십니다. 참 지독하게도 교인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들 대형교회로 가고 상가에 있는 예배당에 찾아오는 교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이러한 소원을 가진 상태에서 교인이 많아봐야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자 하는 소원이 아닌 한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소원은 모두 저주에 찌든 소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들은 교인 숫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예배당을 새로 지었으면 좋겠다, 예산이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 저주의 찌든 마음에서 나오는 소원입니다. 그 소원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저주의 기운을 억누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내 마음에 묶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싫어하여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버렸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 또한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버려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버려지신 예수님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을 묶은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하셔서 공생애를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한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셉이 죽으신 예수님의 신체를 받고자 했듯이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묶음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날마다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날마다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던져지는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품에 안으시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의 삶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처럼 변해갑니다. 세상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이 없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재료로 느껴지게 됩니다. 목사님들이라면 교인들이 몰려와도 그로 인해 기쁘지 않고 교인들이 오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만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마음을 보낸 자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돈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기쁘지 않고 없다고 슬프지 않습니다. 돈은 바랄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보면 삶은 거꾸로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봄으로 십자가 생활화가 시작될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 생각하던 상황이 거꾸로 됨을 확인하게 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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