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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서 요렇게 죽는 거다>의 줄거리:
날마다 내가 죽고 그래서 날마다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사시게 되는 상황이 십자가 생활화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실질적인 과제와 일과 사건들 그리고 상대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강력한 관심거리들의 정글에서 십자가 바라보기의 원조격인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십자가에서 요렇게 죽는 거다
(마가복음 16:1~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서 요렇게 죽는 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서 요렇게 죽는 거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바로 이렇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요렇게 죽는 거다’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대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친구와 직장 상사와 동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에 찌든 인격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잊은 채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살다 죽는다고 여긴다면 성경에 담긴 모든 진리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말하려고 할 때는 모든 인류가 저주받은 세상 속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할 때에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삶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으며, 예수님의 복음도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부터 세상과 인류가 저주에 속하게 되었음을 강력하게 고지하고 있습니다. 선민의 역사 또한 저주받은 세상에 있음을 망각함에 대해서 끊임없이 깨우쳐 주시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부관계가 평안하지 못한 이유는 저주받은 세상에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이고 남편과 아내의 인격이 모두 저주에 찌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거나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부모자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조차도 저주받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가 가르치지 않더라도 저주에 찌든 인격으로 성장하며 어른이 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제 설교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저주는 곧 상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저주의 상태입니다. 상실이 없으면 저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상태의 특징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서 생겨난 상실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세상에서 사는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서 생긴 상실감을 세상의 가치들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쫓겨난 에덴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에덴이 낙원인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낙원에서도 대단하게 여겨질 수는 없습니다. 이미 내가 저주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설령 대통령이 될지라도 저주에 포함된 사건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멋진 이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것조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목사님들이 대형목회를 하게 되어도 결코 대단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봐야 저주받은 대단함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를 저주의 극대화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저주가 성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에 빠진 것이 대단한 사건이라면 저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또한 가장 대단한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모래알같이 많은 보배로운 하나님의 계획들이 다 이루어져 가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같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저주받은 삶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삶에서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십자가 생활화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식은 죽 먹듯이 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어렵게 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받은 세상이 예수님을 저주 바깥으로 던져버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마음을 묶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계신 저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있다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람들입니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나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나라 안팎의 소식들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육체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이 나의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다보면 어느덧 십자가는 잊히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상실감을 채우려는 시도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저주받은 세상에서는 잘되어도 저주의 극대화이며, 못 되어도 저주의 극대화를 노력 했을 뿐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일에 대한 모범적이고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원조 격인 세 여인들의 이야기가 참으로 놀랍고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정오에 어둠이 임하는 사건을 지나 오후 3시에 운명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와 장사를 치르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는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는 장사를 지낼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곧 내려져 3시간 안에 장사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오게 됩니다. 첫 번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두 번째 여인은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고, 세 번째 여인은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 세 여인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사건은 십자가 생활화의 원조 격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곧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가짐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 여인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후에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아시는 대로 안식일은 모든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이는 단순히 노동을 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하여 세상과 관련된 일들을 멈추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업이 잘되든 안 되든, 급한 볼일이 생겨도, 건강에 문제가 있어도 다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하는 안식일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모든 일을 다 멈추고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날로써 안식일을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도 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집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입니다.
2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이 매우 일찍 찾아온 것을 강조한 이유는 이들이 그만큼 열렬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무덤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라고 하였습니다. 향품은 예수님의 시신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대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여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을 드리면 부활에도 저절로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할 때에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갈 때에 걱정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매장 방식은 바위굴에 시신을 넣고 큰 돌로 봉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들은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고자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들의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집중하였다면 새벽 일찍 일어나서 무덤에 가는 것을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돌을 옮겨야 한다는 실질적인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식보다도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너무나 강했습니다. 문제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극단적으로 비교하자면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 같습니다. 마약에 빠진 사람이 절도를 합니다. 절도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약을 사기 위해 절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몰입하게 될 때에 세상의 문제는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눈앞에는 항상 과제와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알면서도 넘어갈 정도로 예수님의 죽음에 몰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5장 46~47절을 보면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수도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들은 바보라도 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갑니다. 현실적으로 주어진 문제가 예수님의 죽음을 사모하는 마음의 끌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돌을 옮겨야만 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은 우리의 삶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마음이 문제에 얽매이면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가는 발걸음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기대하더라도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할 수 없다면 부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외치고 시도하기를 반복함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가졌던 예수님의 죽음을 향하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가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사로잡는 삶의 문제들을 말 그대로 뭉개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이 일은 결코 세련되거나 합리적이거나 논리정연한 말로는 어렵습니다.
이 여인들의 행동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여인들의 행동은 허무맹랑했습니다. 꼭두새벽에 돌을 굴릴 방법도 없으면서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사모함으로 엄연히 존재하던 문제들을 무시한 채 무덤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돈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회사에서 당장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급해도 결국 이 일들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정말로 급한 문제는 예수님을 따라 저주받지 않은 영역 바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와 관련된 문제들도 저주의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저주받은 곳에서 아무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잘 돼봐야 저주의 극대화이기에 안 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마음이 저주의 영역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 여인들처럼 마음에서 문제를 뭉개버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에 걸리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돈 문제에 대해 논리적이고 납득이 가고 믿을 만한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서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다면 돈 문제에 묶여 끙끙거리지 말고 오히려 그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있는 한 잘되면 잘될수록 깊은 저주와 멸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돈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의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 해당됩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여인들처럼 문제를 깔아뭉개고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마음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신 것과 같이 나도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청년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심부름꾼입니다. 천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게 없습니다. 천사들은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좋으심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천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그곳이 천국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여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될 때에 부활의 현장은 재현됩니다. 우리의 삶은 천사가 내려오는 천국의 앞마당이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를 합니다. 천사가 내려온 상황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상황입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저주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으로 끌려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의 주님의 죽음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지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마음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머무른다면 성공이 저주의 극대화이며 실패가 최선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들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무작정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가는 마음은 몰상식해 보일 수도 있고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의 문제를 깔아뭉개며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나아갈 때에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어서 무덤을 찾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을 보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전부라 여기며 마음을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얼마든지 급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취직 문제를 비롯하여 다급한 문제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그러한 다급한 문제들을 깔아뭉개버릴 정도로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건사고로 시끄럽지만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어떠한 사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식하고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저주받은 세상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던져진 곳은 저주가 사라진 부활의 현장이며 천국의 앞마당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관심거리로 여겨서 몰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볼 때에는 몰상식하고 비논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믿음임을 알고 현실에서 주어진 모든 문제들을 깔아뭉개고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쇄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삶의 현장을 부활의 현장이자 천국의 앞마당으로 만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