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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존재감을 제로로 놓자>의 줄거리:
인간세상 안에서 사회적인 나의 존재감을 제로 수치로 고정시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느끼는 존재감은 크든 작든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문제는 내 마음 안에서 나에 대하여 스스로 가지는 존재감의 크기입니다. 존재감을 제로 수치에 고정함의 의미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한 번 살펴봅니다.
내 존재감을 제로로 놓자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존재감을 제로로 놓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존재감을 제로로 놓자’
우리는 존재감을 제로로 놓을 수 있어야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존재감을 제로로 놓을 때에 경이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음을 본문에 의거하여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존재감은 말 그대로 존재가 느껴지는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한 일이 있어서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서 무기수로 살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사회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물론 형무소라는 제한된 사회에서의 존재감은 여전히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써의 존재감은 없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존재감을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삶을 사는 동안에 자기 존재감을 제로로 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상관없이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느끼는지가 중요합니다. 신앙적으로 올바른 삶의 모습은 자기 존재감이 제로인 상태에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에도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겠습니다만 본문 17절에서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제목과 관련지어 해석하자면 인간세상에서 자기 존재감이 제로인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감을 제로로 놓을 수 없다면 예수님과 마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자기 존재감이 제로인 사람에게만 그리스도가 되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사회에서 자기 존재감이 제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스스로를 이러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로써 오신 예수님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주님과 마주하는 자들만이 주님이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감을 제로로 놓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등장한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를 가리킵니다. 아시다시피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가버나움은 교통의 요충지로써 로마정부에 속한 세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정부로부터 세금의 징수를 위임받은 자였습니다. 식민지의 세금을 직접 징수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고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존재했기에 로마정부는 현지인 세리를 뽑았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 될 여지가 생겨납니다. 일정 지역의 세리로 계약을 맺게 되면 우선 자기 돈으로 세금을 납부합니다. 그리고 세리의 재량권을 이용하여 로마정부에 바치는 세금보다 많은 돈을 챙깁니다. 세금을 많이 걷을수록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에 세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들은 강도처럼 여겨졌습니다. 범죄자나 창녀 혹은 이방인처럼 기피해야 하는 존재였고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죄인이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혀야만 하는 사람들을 일컬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리나 창기 혹은 이방인들은 로마의 법률상으로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세 율법에 의거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천민취급하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죄인이란 사회적 차원의 차별을 가리키던 전문용어였던 셈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차별을 당하고 있었기에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존재감이 제로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도 가입할 수가 없었고, 유대사회의 최고판결기관이자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공회에 참여할 수도 없었으며 증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부르시며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세리나 창기나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보자면 유대사회는 별세계였습니다. 세리로써 아무리 돈을 벌어도 사회로 편입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돈만 많이 벌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인정해주는 분위기입니다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벌레 취급을 당했기에 이들의 사회적 존재감은 제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는 다른 행동을 하셨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었고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예수님은 선민사회를 요동치게 하는 랍비계의 다크호스처럼 여겨지고 계셨습니다.
16절을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랍비로 여겨지는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이질적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지 밥을 먹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깊은 관계를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의문스럽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을 향해 17절에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사회에서 기피되는 사람들을 의미했듯이 의인 또한 사회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죄인은 선민의 사회에서 존재감이 제로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의인은 선민의 사회에서 크고 작은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제정일치의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의 가르침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사회생활은 종교생활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죄인과 의인에 대한 언급 또한 이러한 시대상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이 죄인이란 원죄의 상태에 놓여있는 신앙적 의미에서의 죄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존재감을 발휘할 수 없는 기피되는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의인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감을 발휘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이렇게 사회적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되어주실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의인은 사회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가 요구하는 적정기준을 충족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기준으로 보자면 합격자는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에서 의인이고 불합격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죄인입니다. 또 대기업에 취직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합격자는 기업에 들어오기에 옳은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불합격자는 기업에 들어오기에 조건이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적 의미의 의인과 죄인의 기준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게 여겨지고 받아들이실 수 있는 사람들이 의인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취업을 할 때에 대기업의 입장에서 합격자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반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탈락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은 제법 큰 존재감을 갖습니다. 매력적인 배우자감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반면 연봉이 2000만 원도 안 되는 사람은 사회적 존재감이 약합니다. 배우자로써의 매력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요즘에는 이런 존재감의 비교를 당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결혼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의인과 죄인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의인들의 특징은 선민의식입니다. 선민의식은 비단 옛날 유대사회에만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인정받고 스스로도 자기 존재감을 인식할 때에 선민의식은 나타납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공무원의 업무를 감당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도 그만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인식합니다. 서울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다른 대학의 입학자보다 우수함을 자타가 증명한 것입니다. 또 대졸자는 상대적으로 고졸 학력자에 비해 우수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연봉이 1억인 사람은 연봉을 2000만원을 받는 사람보다 그만큼 우수하다고 인정받고 또한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감이 선민의식으로 발현될 때에 사회 내에서도 의인과 죄인이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일까요? 사회적 의인들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회적 의인들을 구원에서 제쳐버리십니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사회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공무원을 시킬 수 없고, 대기업에서 필요한 업무를 할 수 없는 사람을 입사시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사회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제로로 놓으셨던 것입니다. 30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적인 기준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자기 존재감을 부인하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떨어져 계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창조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자기 존재감을 제로로 놓으신 이유는 인간사회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전면적으로 나타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밀착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은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사회와 동떨어진 기도원에서 예배당에서 골방에서만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도원이나 예배당이나 골방에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유지되고 드러나야 할 곳은 인간사회입니다.
오늘날 예배당 모임이 중심된 신앙생활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당 모임을 강조하는 중에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져야할 하나님과의 밀착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통해 모든 종교적 영적 의무를 다 했다고 착각하기에 예배당 바깥의 사회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자기 존재감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적 존재감을 얻고자 합니다. 공무원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뿐 자기 존재감을 예수님처럼 제로로 놓는 것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과의 밀착은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나실 조건이 준비될 수 없다면 하나님과 하나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나타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감은 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일은 나의 지식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과 밀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는 길을 만드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때에 인간사회에서 우리의 존재감은 제로가 됩니다. 마가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들어가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모두 경험한 뒤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마가복음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영적인 관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사회적 죄인이란 스스로는 인간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함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존재감은 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존재감이 제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장님의 야단을 듣는 상황이더라도 마음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혔다고 생각한다면 억울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존재감을 제로로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야단을 칠 때에 내 능력과 지식과 경험을 발동하고 생각하고 논리를 따지고 잘잘못에 대한 계산과 분석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노력하면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고, 더 나은 결과를 보여야겠다는 의지를 갖습니다. 사장을 주인으로 섬기는 기업이라는 사회에서 기여하고 존재감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나의 존재감을 주장하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수고와 노력을 통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어 주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려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밀착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제로로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만 나의 존재감은 제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인간사회의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가족들 앞에서, 직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살림을 하는 모든 순간에 나의 존재는 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30년 살림을 한 주부에게 된장찌개 만들기는 우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나는 된장찌개도 끓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존재감을 제로로 놓을 때에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준비됩니다.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36년간 설교를 해왔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설교에 대해서는 척척박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설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뿐입니다. 36년의 경험이 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나는 설교를 위해 조금도 준비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신학과 설교에 대해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설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질수록 나의 존재감은 제로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교육전도사 시절의 존재감이 100이었다면 이제는 점점 줄어서 0~5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때로는 “설교를 위한 노력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곧 깨닫는 것은 “설교를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설교를 대하는 마음은 편해집니다.
여러분에게도 지속적으로 해온 여러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일에는 베테랑이 되었다고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일이 작을지라도 사회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의인이 되어있는 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살림살이를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겠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제로로 놓으셨습니다.
솔로몬은 20세에 왕이 되었을 때에 스스로 재판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간구를 기뻐하시며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며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로로 놓았던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님은 가장 인상적으로 기뻐하시며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솔로몬보다도 더 유리한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주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존재감을 제로로 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며 또한 인간세상에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구원의 상황을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주님과 나를 끊임없이 동일시함으로써 세상에서의 존재감을 제로로 놓게 하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과 밀착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기가 막히는 삶의 현장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