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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면회할 사람, 동행할 사람>의 줄거리:
내가 만나는 사람 관계가 실질적인 내 삶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힘입어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왔을 경우, 사람 관계는 두 가지로 단순 명확해지고 질서가 서게 됩니다. 면회할 사람과 동핼할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지요. 면회는 보람차고 동행은 즐겁습니다. 보람과 즐거움으로 삶을 채워보세요.
면회할 사람, 동행할 사람
(마가복음 16:5~13)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면회할 사람, 동행할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면회할 사람, 동행할 사람’
사전에서 면회를 찾아보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어떤 기관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곳에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 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면회는 바로 군대에 입대한 자녀나 애인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입니다. 또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지인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병원의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 찾아가는 것도 면회입니다. 이러한 면회에는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면회의 당사자들과 함께 거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면회는 동거나 동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회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마음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면회나 동행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면회해야 될 사람과 동행하려고 할 때에 만남의 어려움이 있고 오류는 발생합니다.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만남 즉 관계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동행할 대상과 면회할 대상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삶을 즐겁고 보람차게 살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됩니다. 동행할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고, 면회할 사람과 면회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람찬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가는 세 여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으며 예수님의 이모이자 요한과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부활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을 자리에는 예수님 대신 흰 옷을 입은 천사가 앉아있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천사는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반복합니다. 7절을 보면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반복되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다시 만나기를 굉장히 기대하셨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해외에 나가있던 약혼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연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다시 만나실 기대에 부풀어 계신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지내셨던 공생애 3년은 이 만남을 위해 존재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셨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반할 것에 대해서도 아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첫 만남의 장소였던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순간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을 포함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홀로 저주받지 않은 인간이셨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로 가득 차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며 저주에 찌들어 살던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어느 것 하나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올 필요도 없었고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몸으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가 가득 차 계셨던 것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될 세상에서의 꿈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없는 저주의 상태에 찌들어 있었고 저주받은 세상 안에 갇혀있던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황이 이처럼 달랐기 때문에 몸으로는 동고동락했어도 진정한 동행은 불가능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모두 배반하고 도망쳤던 사건은 이들이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잘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잘 알고 계셨기에 부활하신 뒤 제자들을 만날 때에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동고동락한 3년간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를 면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면회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 가득 채워지셔서 저주 바깥에 계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몸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 마음은 세상의 꿈과 비전으로 가득 채우고 저주에 갇혀있던 상태였습니다. 교도소 안에 갇혀있는 사람을 면회하듯이 제자들이 저주 안에 갇혀있었기에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제자들을 면회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은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닐 수 없고, 또 교도소 바깥에 있는 사람이 교도소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놓여있는 상황이 달랐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자발적으로 버리고 저주의 세계로 들어가실 수도 없었으며, 저주의 세계 안에 살던 제자들이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면회만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뒤집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저주의 세계 안으로 던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그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원하는 고지에 올려놓고 그로부터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스스로의 높으심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도 버려지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예수님을 저주받은 사람들이 버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저주 바깥에 놓이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 바깥으로 나오신 그 예수님을 끌어안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동행의 방법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마음으로 붙잡을 때에 세상으로부터 버려지신 예수님과 함께 버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버려질 때에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비로소 예수님과 동행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동행에 대한 기대를 안으시고 갈릴리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절친한 친구가 순간의 실수로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계속 면회를 다니다 결국 수감 생활을 끝내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자유로워지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지셨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드디어 저주받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면회만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비로소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의 세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느끼고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들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할 때에 마음은 저주의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날마다 저주의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인간관계는 면회할 사람과 동행할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고 부활에 참여하여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이라면 동행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에 제자들을 대하셨듯이 면회할 대상으로 대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채 저주받은 세상에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서도 동행할 사람과 면회할 사람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동행할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이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과의 동행은 오히려 나를 다시 세상에 묶이게 할 여지가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으로 가득 차 있거나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붙잡고자 한다면 면회할 수는 있어도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몸이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강릉에 있고 여러분은 미국에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도 동행은 가능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것이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가족일지라도 동행이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함으로써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 있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라면 동행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살아가는 것을 동행으로 오해할 때가 많기 때문에 부부관계나 가족관계에서 갈등과 다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물론 저주받은 사람끼리의 동행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열과 반목과 갈등의 죄악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전하고자 일치단결하여 탑을 쌓아올렸으나 결국 분열되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면회하는 삶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면회에는 기본적인 지침이 있습니다. 욕구하지 않고 표현하기입니다. 저주받은 세상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의 마음은 새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로마서 6장 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던 바와 같습니다. 새 생명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거나 혹은 아직 하나님으로 가득 차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자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굳건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소망도 생겨납니다. 비록 하나님으로 가득 차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표현하기는 면회의 철칙이기도 합니다. 면회를 간 사람은 면회 당사자로부터 기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면회 온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면회를 간 사람이 수감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주 바깥에 있는 사람이 저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 바라거나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한 가정에서조차 면회의 관계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족구성원 중 누구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기적같이 한 사람만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여인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삶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은 저주받은 세계로부터 빠져나가게 됩니다. 세상을 졸업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보면 배우자는 여전히 세상의 형통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제 배우자와의 관계는 면회의 관계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임을 아셨기에 배반했을 때에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아셨고 기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배우자가 저주의 세상 안에 갇혀있음을 알기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밉지도 않습니다.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있는 배우자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주려 해도 저주에 찌든 것을 줄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내게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배우자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배우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배우자도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함으로써 저주받은 세상 밖으로 탈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녀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여전히 저주 안에 갇혀있으니 동행이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자녀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저주 바깥으로 나가 있다면 자녀에게 기쁨과 만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자녀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함으로써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부활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면회하는 입장에서 다른 바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주에 갇힌 자녀와 면회하는 삶이 아닌 동행을 선택한다면 오히려 부모자녀 관계는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마음에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녀를 원망하게 됩니다. 자녀는 기쁨을 달라고 볶아대는 부모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 가정이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서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와서 면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하고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진 마음을 가지고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라는 기적 같은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면회하는 입장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세 여인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직장에 가서도 면회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직장의 모든 사람들은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있습니다. 승진과 성과에 대한 바람과 열망을 가지고 월급 인상을 소원합니다.
그러한 현장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사건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예수님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버려지신 것처럼 나 또한 버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현장에 참여하여 새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저주받은 세상 바깥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회사 동료들은 회사라는 현장에서 승진을 소망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그럴 때에 회사에서의 모든 관계는 면회가 됩니다. 설령 사장님과 마주할 때에도 면회의 관계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사장님의 마음은 회사의 매출이 올라야 기쁠 수 있다는 저주받은 세상에 갇혀있습니다. 면회하는 마음가짐에서는 사장님에게 잘 보여서 무엇인가 얻어 보겠다는 생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면 저주받은 세상 안에서 동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 가운데 있는 사장님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승진이나 월급과 같은 회사에서 통용되는 가치에서 자유로워진 마음일 때에 사장님은 단지 면회할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이 다니도록 허락하신 회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주신 의지대로 움직여 갈 뿐입니다. 그것이 회사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장님 눈 밖에 나서 해고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해고를 당하더라도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잘리도록 결정하셨는데 내가 안 잘리겠다고 애쓰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이 사장님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자른다면 기쁘게 잘리면 됩니다. 잘려서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갈 때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계속해서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새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면회하는 관계가 됩니다. 면회하는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또한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새 생명을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동행하는 삶은 시작되게 됩니다. 이러한 바람을 갖고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을 표현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는 면회할 사람과 동행할 사람을 가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저주받은 세상 바깥에 있는 동행할 사람을 만나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면회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하나님으로 가득 찬 나를 표현하는 가장 보람된 일을 하면서 생애의 시간들을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동행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과 면회할 사람 앞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진 나를 표현하는 보람 이 여러분의 하루를 가득가득 채우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어떤 장소에서든지 세 여인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해주셔서 동행할 사람과 면회할 사람을 구분하게 하시고 동행의 즐거움과 면회의 보람으로 생애의 시간들을 채워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