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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S) 복음 전파의 현장성 문제_태승철 (마가복음 16:14~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8.17|조회수90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전파의 현장성 문제>의 줄거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말씀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절대로 알아야 할 것이 현장의 속성입니다. 이 현장은 굳이 이역만리 외국이나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지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현장의 속성은 복음 전파뿐 아니라 복음 생활화를 위해서도 꼭 알아야만 합니다.


복음 전파의 현장성 문제


(마가복음 16:14~18)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 전파의 현장성 문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 전파의 현장성 문제

휴무기간에 여기저기 흩어져 십자가복음 한솥밥을 먹는 분들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동행의 즐거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미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분들께서 함께 동행을 바라는 분들을 모시고 오시기도 하셔서 면회하는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휴무기간 후반부에는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강릉에 이사를 와서 산지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1년 동안 그대로 살았는데 이번에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휴무기간을 지냈습니다만 방송은 휴무해도 십자가 생활화는 휴무할 수 없음을 깨닫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관심 덕분에 뜻깊은 휴무기간을 보내고 다시 영상을 통하여 만날 수 있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제 우리는 15절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말씀에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휴무기간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여러분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저 자신이 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대화가 있습니다.

기독교 소집단에 20년 가까이 가족들과 함께 속해있다가 혼자 나오신 집사님이 계십니다. 어려운 결단의 과정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셨고 생활화하시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이분의 소식을 듣고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의 가족들은 여전히 기존의 소집단에 속해있다고 합니다. 그 기독교 소집단이 어떠한 곳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단지 이분께서 그곳에서 나오기까지 많은 괴로움을 겪으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난 일 년 동안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홀로 해오시면서 지속적으로 시즌 1로부터 시즌 2까지의 말씀도 다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 년 만에 뵈었고 듣게 된 말씀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제가 비로소 하늘 소망이 생겼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사님은 이끌어주실 목사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씀을 나눌 다른 성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영상으로 전해지는 말씀을 들으셨을 뿐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가운데 생각하기도 하시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 년 만에 찾아온 변화는 바로 하늘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마음에 하늘 소망이 생겼다는 말은 다소 식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나요? 정말 잘 됐습니다.”라고 넘어가 버릴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 사람 참 별나게 믿는다. 혼자 유난을 떤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분의 말씀을 빌리자면 “50년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은 자신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속에 드디어 하늘 소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타납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해보면 이 집사님의 말씀과 통하는 바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하늘 소망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소망을 어떤 의미에서 복음 전파와 연결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전 말씀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전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실제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십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바라신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곧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하심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달받게 됩니다. 이 말씀으로 전달받은 사건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나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첫 번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직장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고 있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의 사건에 마음을 첫 번째로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효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심을 통해 본의 아니게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으신 세상은 결코 합당하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고 훌륭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기에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삶의 현장에서 첫 번째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는 곧 나의 마음이 저주받은 세상을 예수님과 함께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의 빠져나감이야말로 바로 믿음의 효과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당신이 어떤 삶의 현장에 있든지 당신의 마음은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라는 권유가 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15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유앙겔리온(εαγγέλιον)은 승전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라톤의 어원이 된 전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반도로 쳐들어온 페르시아와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곳이 아테네로부터 42.195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때에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 내보낸 가족들이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은 승전보이며 생존 소식입니다. 그리고 한 병사가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려서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이겼다는 승전보를 전하게 됩니다. 이 승전보가 바로 유앙겔리온입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원래 기독교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복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도 모든 인류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승전보입니다. 모든 인류에게는 이 승전보에 대한 기대의 속성이 존재합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학교에 있든 시장에 있든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福音)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기쁨의 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해 희소식입니다. 온 천하에 사는 만민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간절히 희소식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희소식은 월급인상이나 승진일 것입니다. 사장님에게 희소식은 수백억대의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보고일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는 가족구성원들의 진로가 막힘없이 뚫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희소식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완치를 위한 신약의 개발이 희소식일 수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모든 광고들은 희소식을 가장합니다. “우리 회사의 제품은 이러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희소식입니다!”라는 것이 모든 광고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희소식 즉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천하 만민들이 갈망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은 진짜 복음 전파에 방해 요인이 됩니다. 사람들마다 제각각의 희소식을 열망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희소식으로써의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희소식이 되기 어렵습니다. 이 어머니에게 희소식은 전쟁의 승전보이자 아들의 생존확인 뿐입니다. 또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해있는 사장님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소식은 희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장님이 기다리는 희소식은 은행으로부터 대출승인이 떨어졌다는 보고입니다. 또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은 희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환자들은 병이 낫고 건강이 회복되기를 희소식으로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각각의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희소식으로 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다 보니 우리는 그동안 복음을 제멋대로 바꿔 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사건을 희소식으로 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기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예수님을 연관 짓게 되었습니다. 환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사업이 형통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아들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복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진짜 희소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환자들은 병으로부터의 쾌유를 희소식으로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희소식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이러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좋아함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통해 세상을 빠져나오는 출구가 되셨고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마음을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의 생존소식과 승전보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는 예수님과의 연합은 희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때에만 십자가 사건은 희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해보셨습니까?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리고자 계약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사장님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해보셨습니까? 3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해보셨습니까? 이러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소원할 때에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빠져나가 하늘까지 도달하여 하나님을 가지고자 하는 소망이 없다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임도 불가능합니다.

서두에서 홀로 말씀을 들으시던 집사님께서 하늘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집사님의 표현에 따르자면 기존에 생각하던 하늘 소망이란 소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종교적 구색 갖추기의 일환으로만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늘을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동안 어느덧 하늘 소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 소망은 내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마치 꽃병 안에 물을 채워 넣듯이 마음 안에 누군가가 하늘 소망을 부어준 것처럼 채워진 것입니다.

집사님께서는 기존의 목사님들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도 콧방귀만 뀌었다고 하십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의심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 년 동안 십자가 복음 말씀을 듣는 중에 그 생각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님께서는 상담할 목사님도 없고 구역장도 없고 말씀을 나눌 성도도 없고 가정에서도 외톨이인 상황에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말씀을 듣기 위해 자동차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듣다 보니까 어느덧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하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가졌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충만해 봤으면, 하나님 부자가 되었으면이라는 소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직장에서 모든 사람들은 승진과 월급인상을 희소식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만은 직장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입니다. 복음은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갑니다.”라는 말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 년 동안 말씀을 전했고 그 집사님은 일 년 동안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승전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계약을 기다리는 사장님의 심정으로, 암 치유를 갈망하는 환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좋아하고 갈망하고 소망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으로 생활화될 이유는 발견됩니다.

목사로써 성도님들에게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면 목사님! 제 마음속에 하늘 소망이 생겼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늘 소망이 생겼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소망 대신,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대신, 자녀가 형통하면 좋겠다는 소망 대신, 승진하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소망 대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잘못된 말씀이 전파되기에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해 예수 믿자는 말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아서 세상에 대해서 죽자는 말씀을 듣다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실제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지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물론 바른 말씀이 전파된다고 해서 듣는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하늘 소망을 갖게 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소식으로 깨닫게 되는 과정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형식적인 세례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마음을 밀착시켜서 마음이 저주받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이란 하나님을 좋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두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하심의 통로를 통하여 이 저주받은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는 인격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결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인격적 결단은 이 세상 안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모든 희소식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례의 의미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 안에서 희소식을 기다리지 않고 복음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기쁨은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만나게 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마음에서 결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직장에서도 믿음과 세례는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희소식은 승진이고 월급인상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직장에서 승진과 월급인상을 희소식으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직장에 대해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쁨을 얻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갈망하던 모든 희소식에 대해서 죽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바로 이 세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루터는 세례의 정신을 반복되는 삶으로써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식은 몸을 물에 잠기게 합니다. 이는 곧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서 희소식을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일한 희소식으로 붙잡고자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모든 환자들은 병이 낫는 희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환자이기에 앞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희소식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자로써 예수님을 믿는 방법입니다.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00억대 계약이 체결되어서 회사가 살아나는 것이 희소식이 아닙니다. 계약은 어떻게 되든지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와 무덤을 거쳐 부활과 승천까지 이르러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 부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희소식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상태이며 또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자면 병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환자로써 완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병이 나음보다 더 기쁘고 더 큰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의 승전보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도 복음은 바르게 전달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전쟁의 승전보를 희소식으로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제가 전해 드릴 수 있는 희소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길로써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전의 소식보다 더 기쁜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복음 전파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못했고 복음대로 살아오지도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희소식을 찾는 동안에는 복음 전파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갖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마음 가득 모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과 부활은 희소식입니다. 이 희소식을 받아들여서 기쁨의 하나님을 갖게 되고 소망하게 될 때에 복음 전파는 가능합니다.

 

17~18절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희소식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희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17~18절에서 일들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표현들이 뜻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의 출처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늘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늘과 이어져 있으므로 상식과 논리로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과 이어진 사람은 세상의 상식과 논리와 관습과 풍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세례가 뜻하는 대로 세상의 모든 희소식에 대해 죽으면 하나님께서 삶의 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을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는 일들은 내게서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며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계획 중에는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병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면 낫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은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기에 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운이고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여러분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권유를 받기도 하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예로 들었던 집사님과 같은 예를 다른 분들과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상태로 발전되어 가는 신앙상태에 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시행착오를 할 수 있습니다. 급물살처럼 흘러가는 삶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놓칠 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 십자가 생활화로부터 바뀌게 된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집사님께서는 승진이나 월급인상 같은 것들을 기쁨으로 삼는 대신에 하늘을 소망하는 동안 말과 행동이 달라짐으로써 직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온라인으로 서로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곳곳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계시는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의 말씀을 나누기 위한 기회를 점차 확대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또한 복음 전파의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한 마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십자가 생활화에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나 성공적으로 해나가시는 분들 혹은 새 신자로써 복음을 받아들여 생활화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개개인에게 나타난 일들을 해석해드릴 필요도 느꼈습니다. 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앞으로 함께 생각하고 참여하면서 복음을 갖는 일들을 확실히 해나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 하늘 소망을 가짐으로 십자가가 희소식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미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성령님을 통해 준비시킴으로 하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게 하여야 복음은 전파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십자가 복음을 희소식으로 들을 수 있도록 접할 기회를 늘려주시고, 모두가 십자가 한솥밥 식구로써 서로 나눔을 갖는 삶의 형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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