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가복음-2

녹취문: 복음의 마지막 퍼즐 조각_태승철 (마가복음 16:19~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8.20|조회수82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의 마지막 퍼즐조각>의 줄거리:

500이나 1000 피스 퍼즐을 맞춰보신 경험이 있다면 마지막 퍼즐 조각에 담긴 의미를 다 깊이 아실 것입니다. 다 맞추었는데 마지막 퍼즐 조각이 없다면 이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이 없지요. 이처럼 복음도 십자가 생활화로 시작하여 부활의 생활화로 이어져서 마지막 퍼즐 조각인 승천의 생활화가 채워짐으로써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퍼즐 조각

(마가복음 16:19~20)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퍼즐 조각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에 벼룩시장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독일은 벼룩시장이 생활화되고 문화화 되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자기가 쓰던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팔며 경제관념을 배운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사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마음은 사주고 싶더라도 아이가 쓰던 물건이 저에게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벼룩시장에서 퍼즐 파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10조각 퍼즐이 있는가 하면 500조각 1,000조각의 퍼즐도 있고 많게는 5,000조각이나 10,000조각이나 되는 퍼즐도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퍼즐을 재밌어해서 2,000조각이나 3,000조각짜리를 사서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오고가며 재미삼아 한두 개씩 끼워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중고품이기 때문에 2,000조각이 온전히 들어있는지를 세어보고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파는 아이들도 한 두 조각이 빠져있는 것을 모르고 팔 때가 많습니다. 2,000조각 퍼즐을 사서 1,999조각을 맞추었는데 2,000번째 마지막 조각이 없을 때에 얼마나 허무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조각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이 걸립니다. 주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미완성된 퍼즐에는 1,999조각만큼의 기쁨과 만족이 생길 수 없습니다. 부족한 한 조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속상함만을 남길 뿐입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완성에 대한 확신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스위치를 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이 바로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시기적으로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였습니다. 이러한 마가복음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바로 이 두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갖는 의미는 마치 사랑하는 애인이 공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에 나의 몸은 여전히 한국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사십일이 지난 후 승천하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승천을 보며 주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게 됩니다. 마음을 하늘로 보내자 땅에 남은 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싶으시다면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승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 생활화를 넘어서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승천을 생활화할 수 없다면 복음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백화점에 가있다고 해서 그 순간에 하나님 믿기가 포기되거나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써의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라면 십자가 생활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생활화는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백화점에 있다고 해서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부활 생활화를 하지 못하고 승천 생활화의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질 수 없다면 그 순간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대면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든 사람으로서 가족을 대하고 직장동료를 대하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잠시라도 복음을 뒤로 미룬 채 복음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대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와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나타나게 됩니다.

 

이 마지막 퍼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부활과 승천의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서는 강조해왔지만 부활 생활화나 승천 생활화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예배당 안에서만 언급되다가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 같은 삶의 현장에서는 잊어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이러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하였고, 십자가 생활화는 결과적으로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종말에 나타날 죽은 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복음을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 중에 예수님의 부활은 생활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과정에 마음을 연합하는 것입니다. 승천 생활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는 십자가 생활화의 마지막 퍼즐로써 같이 묶여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라는 마지막 퍼즐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와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늘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 사랑의 방식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시고 인간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 크기의 맞춤형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백으로부터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하게 되고 인간은 평생을 이 욕구가 작동함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채움에 대한 욕구는 구체적으로 채워져서 기뻐하고자 하는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의식을 통해 이 욕구를 계획하고 추진함으로써 이루고자 합니다. 의식은 감각과 지정의가 깨어서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무엇을 느끼고 대상을 포착하고 반응하는 과정이 의식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과 의식이라는 두 가지 관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 상태를 영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의식을 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채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지 십자가를 붙잡음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는 주기도문의 첫 부분처럼 삶의 현장에서 내가 죽는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뜻이 임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언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유언을 남길 수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의해 진행되게 됩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의해 진행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뜻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이번 휴가기간에 집안을 싹 정리하였습니다. 방송하는 방을 새로 꾸미고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는 도중에도 십자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방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게 하시며 뜻이 임하게 하시옵소서. 나의 마음은 이 현장에서 죽고 아버지께로 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의식의 작용을 통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면 마음은 부활 생활화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부활 생활화는 십자가 생활화와 동떨어진 과정이 아닌 십자가 생활화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채움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을 좋아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은 그 대표적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워서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중독된 것이고 바로 저주에 찌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마음의 만족을 위해 돈을 좋아하고 먹는 것을 즐기고 성공과 권력을 좋아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일이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삶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저주에 찌들었기에 세상을 통해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저주에 찌든 인격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을 좋아하여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는 이러한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반복하여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나는 백화점에서 죽었고 가정에서 죽었고 시장에서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부활한 자의 특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난 말씀에서 휴무기간에 만났던 한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마치 누군가가 바깥에 있는 물건을 안으로 집어넣듯이 마음에 하늘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늘 소망이 생기게 된 이유는 부활 생활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분께서 시청 공무원인데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직장에서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동안에 하늘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직장의 모든 동료들은 승진을 원하고 월급 인상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받음의 특징이고 세상에 중독된 모습입니다.

이 집사님께서는 부활을 생활화하게 되었고 하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인격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였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그리워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고 하나님 부자가 되고 싶고 하나님으로 만족해서 세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마음상태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생활화입니다.

 

이러한 부활 생활화의 과정에 이어 승천 생활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부활 생활화가 예수님의 부활에 마음을 드리듯이 승천 생활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과 마음은 구분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의식적으로 붙잡고 있으면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백화점에서도 욕구대로 쇼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있는 동안에도 십자가를 의식함으로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많이 갖기를 소망하는 부활 생활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부활 생활화가 이루어질 때 승천 생활화도 이루어지고 백화점에서의 쇼핑조차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승천의 증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도 예수님의 승천은 반복되어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승천은 언급되며,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며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임을 계속해서 언급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62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같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같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같이 승천하는 것입니다. 이 승천의 증거는 마음으로 보는 물건이나 일이나 사물이나 사람의 크기가 바뀜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를 갈 때에 하늘에서 로키산맥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로키산맥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자 그 거대한 로키산맥이 손톱 깎기로 손톱을 자른 모양처럼 보였습니다. 창문에 손끝을 대자 로키산맥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로키산맥을 보았을 때의 어마어마함과 웅장함을 하늘에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로키산맥의 웅장함을 눈앞에서 보는 것이 진짜 크기일까요?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볼 때 손톱만 하게 보는 것이 진짜 크기일까요? 이것은 관점의 문제입니다. 로키산맥을 눈앞에서 보고 웅장하게 느끼는 것은 마음이 승천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보낸다면 로키산맥은 웅장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에서 로키산맥을 내려다볼 때 손톱만 하게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에서의 관점이 합당한 이유는 로키산맥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세상을 로키산맥처럼 웅장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마음이 땅에 붙어있는 저주받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돈 문제를 너무나 크게 느끼기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의식하며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부활 생활화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가운데 돈은 점점 손톱만 하게 여겨져서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이 승천 생활화가 되고 있는 상태이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증거입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이 걸렸다면 누구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아직 승천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암이라는 상황 앞에서 얼른 십자가를 의식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의식의 전면으로 꺼내어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 그러므로 나는 건강을 원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채워지기를 원한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암은 하나님은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암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마음의 평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로 내 마음을 채워주시옵소서. 성령님!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부활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순간 암이라는 문제는 작게 여겨지고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로키산맥 같이 느껴지던 암이 손톱만 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암이 손톱만 한 크기의 문제라면 실제로 그런 것입니다. 돈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커 보이고 대단하게 느껴진다면 그만큼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은 비어있는 마음을 문제의 해결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나의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마음을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항상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향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게 되고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을 자처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목사나 장로 권사라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안 되니 부활 생활화도 안 되고 승천 생활화도 되지 않습니다.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안 믿는 사람보다도 마음을 세상에 더 빼앗깁니다. 돈을 더 좋아하고 건강 등을 더 좋아합니다. 오히려 죄 사함을 핑계 삼아 마음 놓고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이유로부터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 사태가 계속되면서 개신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엉터리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교회와 복음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 자신이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한 사람입니다만 그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 예수님이라는 이름, 성령님, 교회, 복음, 십자가라는 단어가 오르내리는 것을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입니다.

백화점에서도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욕심에 눈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나의 삶의 계획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기를 기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어떤 물건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부활 생활화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백화점의 모든 물건들이 하찮게 여겨지는 가운데 단지 하나님의 뜻으로 사라고 하시는 것이 있다면 구입하는 승천의 생활화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이 세상 것이 작게 보이는 것은 승천이 생활화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휴무기간이 끝나고 드리는 첫 번째 주일설교에서 온라인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9월부터 시작해볼까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기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번제 말씀은 계속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한 주에 한 번 정도 온라인 화상 채팅을 통해서 저와 대화할 수 있고 다른 분들도 보실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온라인 나눔의 목적은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 부활 생활화, 승천 생활화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것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퍼즐의 완성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일을 하는 중에 사장님에게 꾸중을 들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럴 때 잠깐 들어와서 대화하고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하고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부활을 생활화하고 승천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런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 가져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십자가, 거룩함, 은혜, 복음, 교회 등의 개념들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개념을 바꿔야 신앙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릉에 찾아오셔서 저와 대화하시는 것같이 온라인상에서 그러한 대화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과 하는 대화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화상채팅으로 연결해서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의 좋은 생각이 있다면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설교에 댓글을 달아 주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 참고하여 시간과 요일을 정해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현재 이를 위해 팀 링크라는 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퍼즐과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까지 이어짐으로써 이 땅에서 주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모임을 구상중이기 때문에 기도하시면서 함께 참여하시고 준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퍼즐인 승천을 위하여 오늘도 의식을 가지고 마음의 공백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살면서 여생동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십자가 생활화와 부활 생활화와 승천 생활화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십자가를 의식하게 하셔서 복음의 완성 단계인 승천 생활화까지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