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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개인이 살아야 모임도 산다>의 줄거리:
성회로 모이는 것을 하나님이 역겨워하셔서 견디실 수가 없다는 이사야서의 말씀. 반대로 모이기에 힘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 모여야 합니까 모이지 말아야 합니까? 어쩌다 우리는 모일 수도 없고 안 모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버리게 되었을까요? 모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개인을 참 성도로 살리면 모임도 자연히 살아납니다.
개인이 살아야 모임도 산다
(마가복음 3:1~19)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개인이 살아야 모임도 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개인이 살아야 모임도 산다’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져있습니다. 첫 단락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손 마른 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두 번째 단락 7~12절에서는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유대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경이 나타나는 중에 귀신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예수님은 이를 꾸짖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세 번째 단락 13~19절에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이사야서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2~14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느니라 /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집회와 모임을 역겹게 여기시는 모습이 드러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되도록 모이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부활절을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모임을 강행하는 예배당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사야서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관습이 되어버린 유대인들의 집회에 대해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강행하고 있는 부활절 모임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 지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또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억하면서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는 내용으로써 앞서 살펴보았던 이사야서 말씀과는 상반되는 내용처럼 보이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서 말씀을 따라 모이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히브리서 말씀을 따라 모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왜 이러한 진퇴양난의 갈등에 빠지게 되었는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모임처럼 아름다운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임이 아닌 먼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바벨탑의 모임은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모임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바벨탑의 모임은 인류역사상 가장 적대적인 모임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임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임은 참가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도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복음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통째로 투자된 사건입니다. 이 복음은 어느 특별한 단체나 나라에게 허락된 사건은 아닙니다. 선민의 공동체에 허락된 사건도 아니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허락된 사건은 더더욱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과 일체되심 가운데 당신 자신을 통째로 투자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달을 바라보는 비유를 여러 차례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전 세계의 75억 인구는 누구나 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달을 바라볼 때에 75억 분의 1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온전한 달을 바라보고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복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투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각 사람에게 온전하게 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한 사람들을 통해 온전한 모임 또한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임에 앞서 각자가 온전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일 때에만 비로소 모임 또한 온전해집니다. 이 모임이야말로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나라별로 지역별로 동기나 이유별로 작은 모임들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오직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를 대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모임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각자가 이 일을 완수할 때에 모임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래 선민의 모임은 인간으로써 최고의 상황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최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피부에 닿는 비유를 들어봅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은 매일 캠퍼스로 모입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다시 나누어집니다. 학부와 학과로 나누어지고 학년별로 나누어지며 또 활동하는 동아리별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모임을 가질지라도 서울대 학생이라는 신분은 동일합니다.
하나의 교회로써의 모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지구 전체에서 교회는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선민들은 나라에 따라 지역에 따라 동기와 이유에 따라 나누어져 모임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선민이라는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분이 온전할 때에 모임은 저절로 성립됩니다. 서울대에 입학하여 학생부에 이름을 올렸다면 서울대라는 거대한 모임에 저절로 참가하게 됩니다. 서울대 학생이라면 누구나 죽도록 공부하여 치열한 시험에 통과한 것입니다. 이들이 학부와 학과와 학년별로 나누어져 작은 모임을 이루고 이 작은 모임들이 모여서 서울대라는 거대한 모임을 이룹니다.
선민들의 모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실력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은혜의 선민입니다. 교회의 모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도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모인 크고 작은 모든 모임이 교회가 됩니다. 모이기를 목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란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룬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이 충족되면 모임은 저절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계에서는 모임의 기준이 숫자가 되었습니다. 예배당마다 관심은 몇 명이 모이느냐에 집중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었느냐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임에 대해 이사야서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를 정해서 행사를 벌이지만 애초에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임을 역겨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에서는 지역사회와의 교류를 위해 시설을 개방합니다. 주민들이 운동장에 와서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주민들이 찾아와서 학생들의 활동이 방해를 받는다면 개방은 중단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이 이와 닮았습니다. 성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모임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코로나19 사태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단락 별로 세 가지 형태의 모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 단락에서는 회당의 모임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마가는 안식일과 손 마른 사람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인 자들의 모임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변방에서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신 소문을 듣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몰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과 이들의 모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모임의 형태가 우리에게 온전한 모임의 모습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본문 7~12절의 두 번째 모임의 내용을 읽었습니다. 9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목회성장에 정점을 치닫고 있는 상황으로 폭발적인 수적 성장이 일어난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임을 옳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11~12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꾸짖으십니다. 이 모임에 대해서는 구세주이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임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기를 거부하시는 모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앞서 나타난 회당의 모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이 회당에서의 모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2000년간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시오니즘 운동에 의해 현재의 이스라엘이 세워진 뒤 세계에 퍼져 사는 유대인들은 각지에 회당을 짓고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당에서의 모임은 적어도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임입니다. 그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여호와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임을 지금도 회당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회당에서의 모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은 버려진 모임입니다. 두 모임의 특징은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룬 자들의 모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와 마음을 밀착시키고 있습니다. 이때에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근심과 걱정이 생깁니다. 근심가운데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작동하며 말과 행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세상에 밀착된 마음을 위해 예수님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낚아서 하늘로 올려 보내시고자 했던 예수님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낚아서 땅으로 끌어내리고자 했습니다.
반면 세 번째 단락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에서 올바른 모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열두 제자의 모임이 성립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고 하는데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세상과 마음을 밀착시킨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내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최초로 불리어진 자들이 열두 제자였습니다.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이 입학의 기준이라면 제자의 기준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열두 명이 제자라는 모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먼저 모임을 이루고 예수님을 모셔서 리더로 삼았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라는 모임은 온전히 예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마음을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상태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날마다 되풀이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등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그룹이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열두 제자는 열두 지파 즉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함께 할 성도 전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시고 불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전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본문 14~15절에서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낚아서 하나님과 밀착된 세계로 끌어올리는 자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진 사람들이 또한 어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낚아 올려서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말씀도 이와 상통합니다. 귀신을 내쫓는 것은 해괴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 얌전하게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이러한 해괴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귀신의 작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따라서 귀신을 내쫓는 방법 또한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귀신의 속임수가 거짓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깨우침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만이 온전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실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모습에서 전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도록 부르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한 사람에게 집중할 때에 또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온전한 모임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삼천 명이 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삼천 명이라는 무리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집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삼천 명 각자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각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부르시듯 백 사람을 한 번에 부르시지 않습니다. 백 사람에게는 백 사람 각자의 부르심이 임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복음과 관계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임에 속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과 밀착한 성도의 특성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그 내용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써 스스로의 선하심을 주장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주장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밀착상태에 계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때에만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있음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있다면 세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선한 행동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손 마른 사람이 나옵니다. 말랐다는 표현에서 연상되는 것은 결핍의 상태입니다. 시편 1편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손 마른 사람을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사람의 결핍된 마음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흘러나오는 은혜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을 받아서 말과 행동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손을 통해 모든 일을 해나갑니다. 이렇게 일을 하는 손은 마치 열매를 맺는 나무의 가지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손이 말랐다는 것은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연상시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은혜로 맺어지는 삶의 결과는 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세상과 밀착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한 열매 또한 맺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시기에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돈과 관련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생겨납니다. 그로부터 비롯된 언행은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뿐만이 아닙니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시기에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떤 대상과 밀착하든 그 열매는 악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성도의 판단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었다면 지정의와 그로부터 비롯한 언행은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구분된 성도라면 이 세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을 보면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랑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고, 기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세상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들어와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할 때에 서울대 학생의 자격이 생기는 것처럼, 성도의 자격은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들어가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보좌 우편에 이르심에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하심을 통해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살아나게 될 때에 온전한 모임 또한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예배당 모임이 어렵다고 해서 미련을 갖거나 아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나 자신이 성도인지를 확인하고, 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성도로써 일깨워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증거는 선한 일로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만 선한 일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은 간단합니다.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어라 공부를 해야 하듯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힌 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밀착 되려야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위일체에 참여하게 되고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만족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한 열매들을 맺어가는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내가 온전한 성도가 될 때에 다른 성도와 이루는 모임은 온전해집니다. 두세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임입니다. 한 사람을 살려 낼 때에 모임 또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내가 성도가 되고 내 이웃이 성도가 되도록 돕는 중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임이 전 세계에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대가 하루빨리 올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