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준비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줄거리:
하나님은 준비시키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속에 준비시키지 않으셨다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일은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예수님을 전할 뿐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준비시킨 사람만이 예수님을 옳게 받아들입니다.
준비시키는 하나님 은혜
(누가복음 1장 1절~25절)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준비시키는 하나님 은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준비시키는 하나님 은혜’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제사장 사가랴와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가 많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게 될 때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고지를 받습니다. 사가랴는 천사에게 어떻게 그 일이 사실인지 알 수 있는 표징을 구하였고 이때 천사는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가 특별히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는 헬라인으로써 이방인이었으며 의사였습니다. 이러한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을 자세하게 써야만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사도행전의 시작을 살펴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사건으로부터 기록을 해나갑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는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11절을 보면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사도행전은 시작됩니다.
한편 누가복음도 그 시작이 독특합니다. 마가복음과 비교해보자면 마가는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복음의 내용을 완성시키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승천하실 기약이 찼다는 기술이 특이합니다.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심을 승천을 위한 여정으로 이해하여 19장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절반이 넘는 내용이 예수님의 승천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뒤에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누가가 볼 때에 복음이란 승천을 목적으로 한 과정이었습니다. 십자가도 무덤에 묻히심도 부활도 오직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을 위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나 말라기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써 예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누가는 포착하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승천하시는 길을 내신 것이었습니다. 승천이란 곧 땅에 살고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승천이 복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바라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이 대체 왜 좋은 곳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돈이 좋기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하늘로 가면 안 됩니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고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하늘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하늘로 갈 생각을 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승천 또한 복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동계올림픽을 이유로 강릉에 KTX가 개설되었고,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KTX를 이용하여 강릉을 찾습니다. 제가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다보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립니다. 답답한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강릉에 와서 탁 트인 푸른 바다를 보면서 감탄을 합니다. 또 강릉에는 유명한 카페거리가 생겨서 커피문화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길을 걷다보면 안목 카페거리로 가는 길을 묻곤 합니다. 강릉의 특산물 먹거리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강릉이 특색 있는 곳이기에 강릉시청에서는 서울 경기지방에 광고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광고를 보며 강릉에 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되고 KTX를 타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도 요한의 출생의 비밀이 소개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늘에 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 가는 길이 생겼다고 외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도 하늘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과 교리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먼저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면 예수님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갈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숲에 난 오솔길은 걷는 사람이 없어지면 곧 숲에 덮여버리고 맙니다. 다니는 사람이 없는 길은 폐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승천하심으로써 땅으로부터 하늘로 이어지는 길을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승천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자세히 언급하며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길이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길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길의 종착점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 길을 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그것을 제시하고자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치 강릉시청에서 서울과 경기지방에 파견되어 홍보 역할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에는 “당신들이 선민이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능히 알 것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을지라도 어떻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망각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대신 돈이나 건강과 장수나 형통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를 두고 외부에서는 절제나 금욕의 미덕을 언급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살지라도 하나님만 가지면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음을 반증하는 태도였습니다. 이로부터 세례 요한의 존재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그 길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위일체로써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셨습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그 아들을 받아들여서 따라오게 하시려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마음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지 ‘회개하라’고 외친 사람이 아닙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은 특이한 사람도 아닙니다. 침례자 또한 아닙니다. 이제부터 세례 요한은 내 속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마음을 연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본문 17절에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어떤 상황이 연상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은 이 둘 사이에 길을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준비를 시키는 것이 세례 요한이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의인의 슬기’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슬기는 곧 지혜로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가치보다도 하늘의 하나님이 더 좋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사탄에게 속아 이 세상의 돈이나 건강 혹은 출세 같은 가치들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땅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늘을 찾을 수 있는 슬기를 주셨습니다. 마음에서는 여전히 돈을 좋아함에도 한편으로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러한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목사님들로부터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강의 견고함이 무엇인지를 맛보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회에서 만난 목사님들께 이러한 말씀을 드려보면 아무 반응이 없고,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전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슬기’를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는 동안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좋다는 ‘의인의 슬기’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하늘로 올라가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땅에서 떠나 하늘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누가의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에 온갖 좋은 가치들이 있다고 믿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하늘로 가는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중에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좋게 여겨 하늘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누가 자신도 헬라인이었기에 그 동료나 가족들 중에서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의인의 슬기’를 준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좋게 느끼고 확신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 승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의 어떤 가치보다도 좋으심을 계시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의인의 슬기’를 넣어주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없다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누가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세례 요한의 존재의미는 회개하라는 외침이나 낙타 털 옷을 입고 석청을 먹었던 금욕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이 내 속에서 준비시키는 마음을 연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스스로 이방인이었기에 이 문제에 대해 절실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승천할 수 있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좋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의인의 슬기’를 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준비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내 속에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신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마음이 육신이 된 사람입니다.
이번 휴무기간에 서울에서 특수학교 선생님 세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의 영적 이력이 각각 다릅니다. 한 분은 개인파산을 통해서 회생절차를 겪는 중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한창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던 중에 교생 한분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이 말씀을 받아들여서 정직원이 되신 후에도 같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선생님께서 8년 간 동료 선생님께 말씀을 전하신 끝에 금년 초에 드디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분이 계셨습니다. 8년이라는 기간에 칠전팔기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그중에서 8년 만에 복음을 받아들이신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 8개월 동안 많은 설교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 유다를 침실로 끌어들여 동침하여 세라와 베레스라는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됩니다. 다말이 그렇게 한 이유에는 유다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유다의 장자이자 다말의 남편이었던 엘이 죽게 되었고 계대결혼법에 의해서 둘째인 오난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낳게 되는 아이는 죽은 형의 이름으로 등록하여 가문과 기업을 잇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난은 태어날 아이가 형의 계보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체외사정을 하여 형에게 자손을 남기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동을 악하게 보셨고 오난을 죽이십니다. 그러자 다시 계대결혼법에 의해 유다의 막내아들인 셀라가 다말을 아내로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유다는 셀라가 어렸기에 장성한 후에 다말에게 남편으로 삼게 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를 아깝게 여겨서 장성한 후에 다말과 결혼을 시키지 않고 약속을 어깁니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 동침을 했고 쌍둥이 아들을 낳아 유다의 계보를 잇게 됩니다.
굉장하고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내용에 대해 설교를 하며 해석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건 자체는 역겨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각오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속에 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방인 다말이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가문에 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선민의 자손을 남기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선민의 가문에 남기 위한 다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선생님께서 이 설교를 들으시며 그렇게 우셨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의 영적인 위치가 다말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8년 만에 하나님의 권속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선생님 옆에는 목사도 없었고 구역장도 없었고 성경공부 시간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에서 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다말이 아브라함의 가문에 속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던 것처럼 자신도 몸부림 속에 드디어 선민의 가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선민의 가문 안에 들어오게 된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인의 슬기’가 증거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선민의 피가 내 안에도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선생님의 마음에 누가 ‘의인의 슬기’를 가르쳐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땅의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의해 이루어져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강릉을 찾는 이유는 강릉에 가면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가 있고 카페거리가 있고 소나무 숲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좋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강릉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지 못해서 하늘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선생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의인의 슬기’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만드신 길을 따라 마음이 이 땅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누가는 이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출생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마음을 하늘로 보내야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의인의 슬기’를 넣어주신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이 땅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좋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질 때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 이 땅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나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의 의미는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각 사람의 마음속에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마음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준비시키는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하늘의 좋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스로 하늘의 좋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상징하는 대로 오직 하나님께서 ‘의인의 슬기’를 주셔서 준비시키신 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킬 사람이 반드시 있음을 세례 요한의 등장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8년 동안 받아들이지 않다가 8개월 전에 받아들인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8년 동안 전한 분도 대단하고 8년 만에 받아들여 8개월 만에 완전히 선민의식으로 무장된 분도 대단합니다. 이분들과의 대화가 예수를 평생 믿으신 목사님들과의 대화보다도 더 복음적이었습니다. 8개월 만에 복음을 받아들인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문화와 접해본 적이 없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언어가 예수를 평생 믿은 사람처럼 무척이나 신앙적이고 선민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켜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시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준비시킨 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준비시키지 않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함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승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준비시키신 은혜임을 알고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준비시켜서 기다리고 있사오니 십자가 생활화의 길을 가게 하시고 또한 기회가 있는 대로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