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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이 되게하라_태승철 (누가복음 13장 33절~35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09|조회수6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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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이 되게하라>의 줄거리:

8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중세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이 탄식하시면서 의도적으로 버리신 그 예루살렘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인명 손실을 감수하면서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되찾으려 했을까요? 선민 각자의 몸이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뜻에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이 되게하라

(누가복음 13장 33절~35절)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이 되게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이 되게하라’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안에 등장하는 나라만 보아도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가 있었고 성경을 떠나면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 등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수도들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수도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주이시고 역사와 삼라만상의 주권자이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의 중심은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중심점이었고 기준이었습니다.

강대국의 수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인간의 체질이 되어버린 두 가지 형태의 죄로 덮여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아하는 빗나감의 체질입니다. 두 번째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 안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사는 빚지는 체질입니다. 지구상에 이 두 가지 죄에 덮여있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가지 죄에 덮여있는 세상에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통해서 두 가지 죄악이 억제되고 두 가지 체질의 활성화가 중단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약소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지만 주권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중심점이었습니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집’이란 바로 예루살렘을 의미하는데 이 예루살렘을 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니라 2000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앞부분의 34절을 보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버리심에 예루살렘의 자녀가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의 자녀란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때를 기억해봅니다. 다니엘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있는 창문을 열고 기도를 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언제나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자녀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과 그 자녀를 버리신다는 것은 이처럼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살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을 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예루살렘의 버려짐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에 있던 예루살렘을 버리시면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공간적 의미의 예루살렘을 버리심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선민들이 이제는 자기 몸을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성지 예루살렘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로서 이끌어 가시기 위한 기준과 중심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내 몸을 중심으로 주권자로서의 섭리를 펼쳐나가신다는 뜻입니다. 또 직장에 나갈 때는 하나님께서 내 몸을 중심으로 주권자로서의 섭리를 펼쳐나가신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대로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예루살렘이 된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그 현장을 내려다보시는 중심이고 기준이 되며 동시에 복의 근원이 됩니다. 저는 태승철이지만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 앞에서는 태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김 예루살렘, 이 예루살렘, 최 예루살렘, 박 예루살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 가려 하지 말고 내 몸을 성지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으로서의 예루살렘을 버리시고, 공간의 예루살렘을 마음에 기억하며 살기를 기대했던 혈통상의 선민을 버리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본래의 취지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방 세계로부터 영적인 선민을 골라내셔서 이들의 몸이 예루살렘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받으시고 본문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그 자녀들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 몸이 예루살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예루살렘으로 산다는 것은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뜻과 섭리와 기운의 옹달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나가면 상사와 동료들을 대하게 됩니다. 이때 누구를 대하든 물을 나누어주는 옹달샘처럼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변이 평화롭든지 전쟁이 일어나든지 옹달샘은 끊임없이 물을 솟아냅니다. 어제 말씀에서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 같은 외부 환경과 무관하게 내 일정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옹달샘에서 샘이 솟듯이 회사라는 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기운과 하늘의 향기가 뻗어 나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변수에 당황하지 말고 자극에 흥분하지 말고 도발에 휘말리지 않는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내 일정에 예수님의 일정표를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왕의 살해협박 변수가 발생한 상태에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심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을 유일한 과제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기운이 모든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질 수 있는 기회가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예루살렘이 될 때 예수님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로 강도를 만났다면 몸이 예루살렘이 아닌 상태에서는 맞서 싸우든지 목숨을 구걸하든지 도망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나도 옹달샘이 하는 일은 샘물을 솟아내는 것처럼 몸이 예루살렘인 사람은 강도에게 하늘 기운을 전하는 옹달샘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강도를 사장님이나 애인이나 원수로도 바꿀 수 있고 배우자나 자녀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흔들림 없는 삶을 내가 나로 살아갈 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고, 이웃들에게 하늘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느 나라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다만 여느 수도들과 다른 점은 성전과 왕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수도에도 신전과 왕궁은 존재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전은 다른 나라들의 신전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왕궁 또한 다른 나라들의 왕궁과는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 제사는 다른 나라의 신전 제사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신전 제사란 쉽게 말해 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용도였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들을 위해 신의 힘을 빌리고자 거래를 하는 것이 신전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던 상번제는 이와는 의미가 반대였습니다. 하나님 외의 이 세상의 대상들을 좋아하여 마음을 채우려고 했던 인격을 어린양과 동일시하여 죽이는 것이 성전 제사의 의미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신전 제사가 세상의 대상들을 좋아함을 인정하고 잘 얻기 위하여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예루살렘의 성전 제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인격을 어린양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기는 것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궁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궁이 다른 나라의 왕궁과 달랐던 점은 솔로몬의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솔로몬은 20세에 왕좌에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된 솔로몬이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일천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지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해야 할 왕으로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한 것입니다. 온 나라 백성이 왕의 행보를 지켜보는 가운데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공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 이스라엘 나라의 왕궁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였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나서서 했던 일은 나라를 통치하는 주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일만을 하는 것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삶의 주체가 되심을 인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왕궁이라는 장치가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설령 다니엘처럼 포로로 잡혀간 경우에도 예루살렘을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기억하며 눈에 보이는 좋은 대상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이 보물이심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끌리는 인격이 어린양과 함께 번제단에서 각이 떠지고 불살라 없어져야 함을 기억할 수 있었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왕궁을 떠올리며 삶에 대해서는 오감이 포착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스스로 주권자가 되고자 하던 마음이 죽고 다시 태어나서 솔로몬처럼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선민의 숫자가 300만 명이었다면 하루에 300만 개의 예루살렘이 가동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선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선민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34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선민들을 돌이키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통하여 십자가 생활화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말씀드리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모으시기 위한 날갯짓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성전과 왕궁의 의미를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될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게 하는 모든 설교자들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날갯짓의 일환인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실제로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예루살렘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만 남았고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인 장소는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는 우리 각자를 통해 실현되게 됩니다. 우리 각자의 몸이 예루살렘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나의 지구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고 기도하였듯이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의 공백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름으로써 성전의 의미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왕궁의 의미는 실현되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오게 되고, 부활의 자리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성전의 의미가 충족됩니다. 그리고 육체의 오감이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동안에 왕궁의 의미는 충족됩니다. 이러한 두 가지 과정을 통하여 몸은 예루살렘이 됩니다.

 

몸은 단순히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 한 사람의 몸은 의식작용과 인격성을 대표합니다. 육체가 고깃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대할 때에는 고깃덩어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 대하고 마음의 공백을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지정의활동을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몸으로 대표되는 ‘나’라는 현상 속에서 성전과 왕궁의 의미가 충족되게 됩니다. 몸이 세상에 대해서 예루살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과 왕궁이 있었던 것처럼 몸이라는 자아의 현상 속에서 성전과 왕궁의 의미가 충족될 때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루살렘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샘솟는 옹달샘처럼 외부의 변수에 당황하지 않고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창조적 계획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를 마음에 받아들여서 반응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가 성전과 왕궁의 의미가 실현되는 예루살렘으로써 옹달샘이 샘물을 분출하듯이 현장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출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200여년에 걸쳐서 여덟 번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황이 나서서 십자군 전쟁을 독려하였는데 겉으로 드러난 명분은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나 영주들의 새 영토에 대한 야망이 섞인 잡탕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명명백백하게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여덟 번에 걸쳐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실질적으로 기독교는 없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십자군에 속해 공간적 예루살렘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몸을 예루살렘으로 확립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내 몸이 성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지탈환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수도로 존재하는 예루살렘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35절을 보면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선민들에게 진정한 예루살렘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간적으로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면서도 몸을 예루살렘이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일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 기독교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공간적 성지에 집착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버리신 성지를 기독교가 탈환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참으로 무식하고 무지하게 믿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진짜 십자군에 속한 군인은 오늘도 내 몸을 예루살렘으로 회복하고 확립하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어디를 가든지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운만을 뿜어내는 복의 근원이자 옹달샘이자 하나님 역사의 중심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면 세상 밖으로 나온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보물로 여기는 성전의 의미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또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채워짐으로써 왕궁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진정한 예루살렘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어디를 가시든지 김 예루살렘, 최 예루살렘, 박 예루살렘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찌하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으므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온 마음에는 성전의 의미가 충족되게 하여 주시고, 세상에 남아있는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심으로 왕궁의 의미가 충족되게 하셔서 예루살렘이 가는 곳마다 복의 옹달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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