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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충만을 원하면 인생 바닥을 쳐라_태승철 (누가복음 14장 7절~1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13|조회수10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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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충만을 원하면 인생 바닥을 쳐라>의 줄거리:

인간 행위는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나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움직이심이 바로 나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내가 지극히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으로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의 가장 낮은 바닥을 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도적으로 바닥을 치면 충만에 이른다는 겁니다.

 

충만을 원하면 인생 바닥을 쳐라

(누가복음 14장 7절~14절)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충만을 원하면 인생 바닥을 쳐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충만을 원하면 인생 바닥을 쳐라’

11절을 보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겸손의 미덕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단락까지 포함해서 말하자면 자기를 높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높은 자리를 겨냥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자기낮춤 자체를 목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높아지기 위한 전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아지되 진짜로 높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진짜 높아지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를 좋아함으로써 자기를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시각이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높아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높아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세상의 시각에서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높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시각에 맞추어 높은 자리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진짜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한 전략입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보좌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인간세상은 높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땅에 있는 인간세상이 통째로 낮음이라면 하늘은 그 자체가 통째로 높음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높음과 낮음 두 가지 외엔 없습니다. 땅은 낮고 하늘은 높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가면 주변을 다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위에서 에펠탑을 내려다본다면 에펠탑의 꼭대기는 평면상의 점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에베레스트의 안나푸르나의 정상은 매우 높은 곳이지만 이 또한 하늘에서 보면 평면상의 점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볼 때 인간세상이라는 땅에는 높음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강릉에서 말씀만 전하는 저 같은 이름 없는 사람보다 문재인 대통령을 더 높게 보시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저는 바닥에 깔려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안나푸르나의 정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보자면 저와 문재인 대통령의 높이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그저 평면상의 두 점이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늘에서 볼 때는 안나푸르나의 정상이나 설악산의 정상이나 소금강이나 모두가 다 똑같이 평면상에 존재하는 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며 살 수 있다면 인생은 편해집니다. 그러나 인류는 사탄에 속아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시각을 잃고 사탄의 시각을 가진 채 살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시각을 갖게 되자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구분이 생겼습니다. 출세한 사람이 있으면 낙오자가 있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살아갑니다. 월세로 사는 사람이 있고 전세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서 살아도 강릉 같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서울 강북에서 사는 사람이고 있고 강남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동산으로 말하자면 강남이나 명동에 빌딩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산에서 높고 낮음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직장에서도 높고 낮음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대리가 있고 과장이 있고 부장이 있고 상무가 있고 사장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삶의 현장에는 높고 낮음의 스펙트럼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시각에서의 높고 낮음입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의 시각에서는 삼성의 이재용 씨나 아르바이트생이나 평면상의 하나의 점일 뿐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대기업 회장이 아르바이트생보다 결코 높은 위치가 아닙니다. 사탄의 시각이 체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원이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각으로 인간세상에서 높아지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시각에서 높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구원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만큼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시각이 체질이 되어버린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상태란 이 세상에서 무조건 가장 낮은 곳으로 의도하여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서 높아짐을 기대하는 한 절대 구원은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구원인데 그 충만함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탄의 시각이 체질화된 시각으로 볼 때는 낮은 곳은 생각하기도 싫은 곳입니다. 이 낮은 곳을 향하여 시각을 하향 조절할 수 없다면 하나님 충만의 길로 들어설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만큼 높아진 사람입니다. 하나님만큼 높아지게 되면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높다고 생각했던 자리들이 평면상의 점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재용 씨나 아르바이트생을 앞에 두고도 이재용 씨를 우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주민센터의 직원은 직급에서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주민센터의 직원보다 대통령이 귀중하게 여겨져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상태에서는 우리도 이와 같은 시각을 갖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본문 앞부분에서는 높은 자리를 직접 겨냥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뒷부분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높고 낮음에 대한 말씀 속에 충만함의 개념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풍습에 잔치자리에서 가장 중시됐던 것은 격식이었습니다. 손님의 중요도를 따라서 좌석을 배치하고 구분함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사탄의 시각이 체질화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잔치자리가 신경이 쓰이기 마련입니다. 높은 자리가 비어있다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후회할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대개 높은 사람은 나중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높은 사람이 오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석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격식을 중시하는 자리에서 쫓겨나듯이 밀려났다는 것은 큰 망신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낮은 자리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둘러보다가 말석에 앉아있는 자를 발견하고 상석으로 끌어올려 주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궁색한 처세술처럼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처세술이 아닌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처세술이 필요한 잔치자리를 비유로 삼아 하신 말씀은 하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별세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별세 즉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의미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하향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탄의 시각이 체질화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란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바닥을 치는 말석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하향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을 취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라갈 수도 없으며 승천으로 이어지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가는 길도 따를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 충만함의 역사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충만함이 앞선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청한 식사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였던 바리새인들이 서로 상석에 앉고자 눈치싸움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높은 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상황과 예수님께서 진짜 높으신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가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일으키고자 하시는 상황을 비교하시면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진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으로 충만하려면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사탄의 시각이 체질화된 상태에서는 마음의 방향을 낮은 자리로 하향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논쟁이 일어났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일의 취지는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날이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충만을 위해 몰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행위이고 활동이고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충만함에 어떻게 이를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 대답이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자리에 초대받은 바리새인들이 상석을 놓고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를 통해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이 상황과 충만함을 연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충만하려면 마음의 상향 조절의 스위치를 끄고 하향 조절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좁은 문은 놓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은 반드시 하향 조절되어 낮은 자리를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이를 수 있게 되고 그 하나님께로 향하는 관문인 십자가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자리 중에 가장 바닥을 치는 말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생의 바닥을 친다.”라는 말을 합니다. 강릉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느끼시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도 있으시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신선한 충격 때문에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서 문제를 안고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를 안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 주로 목사님들입니다. 평신도 분들은 웃고 오시는데 목사님들이 인상을 쓰고 오시니 참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안고 오신 목사님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바로 인생의 바닥을 쳤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입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진짜 바닥 맛을 제대로 보셔야만 지금은 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야 맙니다. 사람들이 괴롭고 힘들 때 인생의 바닥을 친다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최악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항상 높은 곳을 향하고 더 나은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제일 안 좋은 상황이어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여생의 첫째 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지금을 첫째 날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높은 곳을 향해 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지금이 바닥이기를 원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간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지금이 항상 바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에서 나의 의식이 상향 조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짜 바닥은 아닙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 정도라야 정말 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재산이 다 없어져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동시에 다 죽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잘못을 지적하는 동안 명예를 잃고 자존심을 잃었습니다. 몸에는 악창이 생겨서 기왓장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 꼴을 보며 아내는 조롱하며 떠났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인생의 바닥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릉에 오실 정도로 건강하고 어쨌든 먹고 살고 자녀가 살아있고 아내가 떠나지 않았는데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진짜 바닥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라도 지금을 과분하게 여기게 됩니다. 내가 받아 누리기에 황송한 상황이라 여기게 됩니다. 진짜 인생의 바닥은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지가 못 박힙니다. 손가락처럼 굵은 가시가 머리를 뚫고 들어옵니다. 살갗은 채찍을 맞아 다 찢어졌습니다.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만천하에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우리 마음이 향해야 될 바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바닥을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만들어주셨습니다.

 

바닥으로 가야만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소원함이 충만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소원하지도 않은데 하나님으로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로 가고 싶다는 소원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바닥으로 내쳐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소원을 할 수 없는 자리가 바닥입니다. 아직도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소원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면 바닥이 아닙니다. 여전히 적당히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충만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충만은 소원할 수 있는 역량을 하나님 소원에 총집결시킨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7할 정도 소원하고 3할 정도는 세상을 소원하면서 하나님 충만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충만은 100%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100% 돈을 소원한다면 돈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한창 뜨겁게 연애를 하는 중에는 마음이 애인으로 100% 충만해지듯이,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전히 어느 정도 세상을 소원한다는 것은 아직도 인생의 바닥에 내려오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소원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인생의 바닥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소원했던 것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소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욥 같은 상황이 된 것도 아닌데 바닥을 운운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각이 상향 조절되어 있다는 것이고 여전히 어느 정도 세상을 소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길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 소원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인생의 바닥을 쳐야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생에 대해 소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손발이 못 박히시고 허리에 창을 찔리시고 살갗은 찢어져서 꼼짝하실 수 없었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대해 바닥을 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하늘 높이만큼 높아지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고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소원의 역량은 세상에 대해 바닥을 쳐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소원조차 할 수 없는 바닥은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 자리에 설 때 부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을 소원하는 일에 역량을 총집결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리로 우리의 마음은 올라가게 되고 하나님 충만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소원하고 있고 더 나은 상태를 소원하고 있다면 세상에서 높은 사람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나아지기를 바랄 수조차 없었습니다. 부자가 손 씻고 버린 빵부스러기로 배를 채워야 했고 온몸에 헌데가 나서 동네 개들이 와서 핥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소원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 소원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사로와 같은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진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높음에 이른 증거는 세상의 높고 낮음을 평면상의 점으로 느끼게 됩니다. 대통령의 자리를 평면상의 점으로 느낍니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로키산맥이 성냥개비처럼 보이는 것처럼 마음이 높음에 이를 때에 태산 같았던 문제도 성냥개비의 끄트머리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높아지는 것이고 진짜 구원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주님은 안식일 논쟁에서부터 시작하여 충만함의 개념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충만함에 이르는 길에 대한 비유로 높은 자리를 탐내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사용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세상의 말석으로 내려갈 때 진짜 높은 하늘의 자리는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가야 할 자리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바닥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인생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원조차 할 수 없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부활의 자리에 이르고 하늘로 끌려 올라감을 통해 진짜 높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사탄의 시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높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평면상의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충만을 원한다면 인생의 바닥인 십자가로 내려가서 바닥을 치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탄의 시각이 우리의 체질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높아지고자 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하고자 하는 소원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인생의 바닥을 치는 일이 반복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기필코 하나님이 계신 보좌 우편까지 높아지는 경험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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