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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구실하면 지옥, 못해야 천국>의 줄거리:
제구실하기란 주어진 것을 내 것으로 잘 지키기, 새로운 내 것을 잘 만들어 내기, 그렇게 만들어진 내 것을 잘 관리하기, 계속해서 새로운 내 것을 잘 늘려나가기 입니다. 아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제구실하면 천국과 무관하게 됩니다. 제구실하는 사람이 천국 입성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제구실 자체가 천국 거부라는 겁니다.
제구실하면 지옥, 못해야 천국
(누가복음 14장 15절~24절)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제구실하면 지옥, 못해야 천국>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제구실하면 지옥, 못해야 천국’
이 제목은 오늘 본문 내용에 한정되어서 유효한 제목입니다. 다시 언급해보면 “제구실을 하면 지옥에 가고, 제구실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제목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잔치의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밭을 사고 돌아보느라 초청을 거부한 사람,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느라 초청을 거부한 사람, 장가들어서 신부와 즐거운 신혼을 보내느라 초청을 거부한 사람이 언급되었습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만난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입니다. 요즘은 가난이나 장애를 이유로 인권을 판별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자기역할을 감당할 수 없고 자기 존재감을 사회에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인권은 매우 낮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는 이 땅에 확장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잔치는 인간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제구실 못 하는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구실이란 “내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밭을 산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밭을 관리하기 위해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소 열 마리를 산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소들을 시험해보고자 합니다. 장가를 든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기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제구실을 잘하고 있는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의도를 따라 제구실의 정의를 내려 보면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 새로운 것을 잘 만들어 내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잘 관리하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잘 늘려나가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제구실을 잘하는 것이 이 땅에 임하는 천국입성을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표현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고 수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구실을 잘하는 것 자체가 천국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 시각장애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또 23절을 보면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성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불러 모은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는 생활권 내에 속하지 않아서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잔치에 오라고 하니 이들 중에서도 제구실을 하는 사람들은 잔치의 참여를 거부하였을 터이니 마찬가지로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들만이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이유가 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의 시작인 15절을 살펴봅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돌출된 발언이 나오게 된 이유는 앞선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의 마음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선민의식으로 충만한 유대나라 사람들은 실제로는 안식일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자리를 탐내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이들의 교훈을 따르는 유대나라의 선민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재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나라 안에 들어가서 떡을 먹으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배당에서 전도폭발을 할 때 “당신이 오늘 죽으면 천국 가실 것을 확신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반사적으로 “예, 저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사람들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다윗 왕국을 재현할 때에는 자신들이 당연히 그 나라에 포함되리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15절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자신들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은 기정사실이니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식의 도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잔치집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생각이 가당치 않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될 것임에 대해서는 인정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러 이 땅에 오신 장본인으로서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다윗 왕국의 재현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바랐던 것은 다윗처럼 전쟁에서 승리하여 다른 민족을 짓밟게 되는 정복자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천국의 기쁨은 정복자의 기쁨이 아니라 잔치의 기쁨이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의 삶에는 기쁨의 이유가 없습니다. 잔치를 베푸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쁨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기쁨의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사이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천국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천국이 임할 때 정작 천국을 확신하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선민들은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천국과는 무관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죽은 뒤에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이 확장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 결코 사후의 세계가 먼저 언급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이 내게 임하게 됩니다.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천국을 산 사람만이 죽어서도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신앙 안에서 보자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죽은 뒤에 천국에 간다는 발상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소리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담겨있는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보자면 “내 것으로 살면서 제구실하면 이 땅으로 확장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제구실을 잘하면 이 땅에 온 천국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무척 낯설게 다가옵니다.
이 세상의 삶을 내 것을 만들고 관리하고 늘리려는 모습은 잘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 것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며 살 수도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것이 은혜인 곳이 천국입니다.
제구실을 못 해서 내 것을 만들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하고 늘리지 못하고 은혜로만 살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천국이 이러한 곳이기에 단 하나라도 내 것이 있다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로만 살 수 있다면 지상에서의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정작 그 은혜가 무엇인지 명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보자면 내 것 아닌 것을 누리며 쓰는 것입니다. 이 상태는 유지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은혜로 누리고 쓰는 것들을 내 것으로 여기게 되는 순간 천국의 삶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것으로 여기게 되는 순간 감사 대신 불만이 생기고 기쁨 대신 두려움과 걱정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요즘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계신 자매님이 계십니다. 이 자매님께서 서울 사당동 쪽에 있는 단독주택 2층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이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오빠가 집을 무상으로 제공해주어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이 집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여전히 집의 명의는 동네 오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주어져 있으나 끝까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쓰고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반면 “내 것”이란 마음에 담고 소유감과 애착을 느끼게 된 대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집이 내 명의로 되어 있어서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만으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집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동안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 명의로 되어있는 집이라고 해서 내 것으로 느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배우자가 내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배우자를 담고 있고, 배우자도 나를 마음에 담고 있기에 애착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이든 과제든 내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곧 그동안 내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사소한 일들부터 커다란 일들까지 동시에 싹 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나와 관련된 모든 일과 대상들이 내 것이 아닌 은혜로 느껴지게 됩니다. 아직도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들이 있다면 온전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삶에서 주어진 것들을 내 것으로 여기며 지키고 관리하고 늘려가는 제구실을 하는 사람은 본문에 나타난 잔치의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밭을 새로 사고 관리하고, 소를 열 마리나 새로 사서 돌보고, 장가를 가서 신부와 알콩달콩 신혼을 보내려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내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잘 관리하며 제구실을 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가락처럼 굵은 가시들이 뇌까지 뚫고 들어왔습니다. 배에는 창이 박혀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온몸은 채찍을 맞아서 살갗이 다 찢어졌습니다.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의 상황이 나의 본전인 상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하나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이고 거부할 수 없는 나의 현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은혜로 변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상태가 본전이기에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만이 내 것입니다. 이 상태보다 넘치는 것들은 모두 은혜입니다. 내 몸이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것이 은혜이고, 살이 찢어지지 않은 것이 은혜이고, 월세든 전세든 살아갈 집이 있는 것이 은혜이고, 때로는 부족하게 느껴질지라도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본전인 십자가를 현실로 굳게 믿는다면 다 남아도는 잉여의 부분들입니다. 이 모든 잉여의 부분들은 나의 본전을 기억할 때에 은혜로 뒤바뀌게 됩니다.
십자가가 내 본전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바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은혜의 재고정리가 이루어집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기에 앞서 5시 50분쯤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합니다. 십자가가 본전이라는 의식을 유지한다면 머리를 감는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를 누리고 있으니 머리를 감으면서 천국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손도 내 것이 아니고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상태가 나의 본전이기 때문에 입에 들어가는 밥알 하나까지도 모두 은혜가 됩니다.
“내 것”은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져 있는 것, 관리하는 것, 소유감과 애착을 느끼는 것들이 생길 때에 사람은 이상하게 변합니다. 내 것이 있는 한 불만과 원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가장 좋았을 때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중팔구는 아직 연애 중이라 온전히 내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전이었을 때가 가장 멋있고 좋았을 것입니다. 이제 결혼을 하고 부부로서 생활을 하게 되자 1~2년도 지나지 않아서 불만과 원망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비단 배우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에게서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나의 본전이라고 굳건히 믿는 동안에는 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은 십 원이 있어도 넘치는 것이고 백 원이 있어도 넘치는 것이고 만 원이 있어도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내 것으로 붙잡기 시작하면 일억이 있어도 부족하고 십억이 있어도 부족하고 백억이 있어도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제일 부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재벌 총수들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은 상태는 내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모든 것이 넘쳐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시는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월세에 살고 있을지라도 십자가 본전을 기억하며 인생의 바닥을 치고 나면 월세는 풍족한 은혜입니다. 자기 집이 있다면 로또 맞은 사람이 일주일간 누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될 은혜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은 곧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 것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원망과 불평이 생겨납니다.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 제구실을 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노력합니다, 모색합니다, 추진합니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납니다, 멋진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천국을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나의 현실임을 믿는 사람에게는 재산과 재물과 몸은 물론이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내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없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은혜로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제구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끝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말하게 하셔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움직이게 하셔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잘 수 있는 잠자리를 은혜로 허락하시고, 타고 다닐 자동차를 주시고 자전거를 은혜로 허락하십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가정에서 십자가로 바닥을 칠 때 가정에서 천국이 열립니다. 직장에서 십자가로 바닥을 칠 때 직장에서 천국이 열립니다. 반면에 내 것을 잘 관리하는 제구실을 하려고 할 때에는 천국은 닫힐 것입니다. 가정에서 제구실하려고 할 때 천국이 닫히고, 직장에서 제구실하려고 할 때 천국이 닫힐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눈 떠서 보는 것도 은혜이고, 코로 냄새 맡는 것도 은혜이며, 귀로 듣는 것도 은혜이며,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은혜입니다. 단 한 가지도 은혜 아닌 것이 없는 천국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을 믿는다고 결정을 하였사오니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 가는 곳마다 십자가로 인생의 바닥치기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가는 곳마다 내 것으로 사는 제구실을 제대로 못 해 은혜로만 사는 천국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