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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소유 소금 참소유 완전소유>의 줄거리: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무소유를 강요하십니다. 이 세상 것은 남김없이 다 버리지 않으면 하늘의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무소유는 하늘 참소유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그런데 하늘 참소유는 결국 다시금 세상까지 갖는 완전소유로 나갑니다.
무소유 소금 참소유 완전소유
(누가복음 14장 33절~35절)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무소유 소금 참소유 완전소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무소유 소금 참소유 완전소유’
제목을 풀어서 말씀드리면 무소유의 상태가 되어야 소금의 본분을 할 수 있고, 소금의 본분을 하게 되면 참 소유가 이루어지고, 참소유가 이루어질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완전소유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25절 이하로부터 진행되어온 말씀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를 향해 예수 따름의 의미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잘 따져보아야만 합니다. 준비 없이 무턱대고 예수님을 따르다가는 망대의 공사가 비용이 부족해서 중단되고, 전쟁에서 역량이 부족하여 패배하는 것과 같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사건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문제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해야 할 대상으로 예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현실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란 즉 몸이 있기 때문에 관계할 수 있는 대상들 중에서 내 마음 안에 들여놓고 애착을 느끼며 아까워하는 것들입니다. 내게서 없어지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지고 상실감을 갖게 하는 것들이 바로 자기 소유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타세타이(ἀποτάσσεται)는 사람에게 쓰일 때에는 결별이나 절교의 뜻으로 사용되고, 물건에 쓰일 때에는 포기하고 버린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예수를 믿을 때 잘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버림은 기존의 모든 인관관계에 대한 결별입니다. 결별할 때에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고 느껴지는 대표적인 예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입니다. 이러한 천륜관계에 대해서조차 마음에서 결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몸이 죽기 전까지는 끊어질 수 없습니다. 객관적인 혈연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에서는 결별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말씀에서 이것들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워하라는 것은 마음에서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고, 마음 안에 들여놓았다면 마음 바깥으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접촉하지 않게 되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떠한 사실도 나의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의 현실로 여겨지던 기존의 모든 인간관계는 비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닿지 않음으로 나의 현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사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대상으로 프랑스 파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프랑스 파리만 해도 연고가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예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을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이나 노르웨이의 오슬로나 핀란드의 헬싱키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나와 아무 연고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현실이 되지는 못합니다. 헬싱키의 자리에 부모를 놓고 처자를 놓고 형제와 자매를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지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같이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사실로 존재하나 비현실로 여길 수 없다면 진짜 예수 믿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버림은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실제 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대상은 몸부터 시작해서 집과 전토와 재산과 재물과 저축과 연금과 보험 등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나 자존심 체면 위신에 이르기까지 아깝고 없어질 때 상실감이 들고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서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따져보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지 안 믿을지는 나중 문제이고 먼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과정을 제대로 거쳐 오지 못했습니다.
셋째로 버림은 나의 명의가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간절히 바라는 소원들입니다. 사람은 소원의 형태로 원하는 것들을 마음 안에 들여놓습니다. 소원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에 무엇인가를 들여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해서 마음 안에 들여놓은 모든 것들이 소유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바람과 희망과 소원도 다 버려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떠한 바람과 희망과 소원도 없는 상태가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버림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훨씬 뛰어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무소유는 사람과 물건들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들까지 포함해서 이 세상과 연관된 모든 것을 마음에서 긁어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별세는 세상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곧 세상 탈출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때에 세상에 속한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마음에 담겨있다면 세상 탈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작든 크든 세상을 담고 있다면 여전히 세상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차분히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탈출시키지 못해 이처럼 야단이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소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자니 세상은 티끌만큼이라도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예 세상을 탈출할 필요가 생깁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별세를 향해 가시며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유의 대혁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관계는 결별되어야 합니다. 소유의식을 갖게 하는 사물들도 마음에서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에 속한 희망이나 소원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에 대해서조차 버림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는 것들 대신에 가질 때에 만족을 주는 진짜 좋은 것의 소유자가 되게 하십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면 진짜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짜 가진 자가 될 수 있고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을 탈출하시며 당신을 따라오라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모조리 버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세상에 닿은 상태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소금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면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상상이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던 소금은 주로 암염이었습니다. 이 암염은 바위나 산에서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돌이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이러한 암염을 목초지 군데군데에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풀을 뜯다가 암염을 핥아 먹습니다. 나중에는 암염에서 소금기는 다 없어지고 돌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맛을 잃은 소금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금 비유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비유를 하나 생각해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상에서 소금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가정에서 소금 역할을 하고, 시장에서 소금 역할을 합니다. 소금 역할을 하는 이유는 가정이나 시장이라는 삶의 현장을 창조주 되시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먹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설렁탕에 비유해보겠습니다. 가정은 하나님 앞에 놓인 설렁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이라는 설렁탕을 드시는 것은 창조주와 주권자로써 창조적인 역사를 해나가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기쁘게 해나가시기 위해서는 설렁탕이 하나님의 입맛에 맞아야 합니다. 이때 설렁탕의 간을 맞추는 소금이 바로 제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설렁탕을 맛있게 드시듯이 가정이라는 삶의 현장을 끌어안으시고 창조주로서 보시기에 좋은 상황들을 창조해나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제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없는 현장 즉 소금이 없는 설렁탕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창조주와 주권자로서 대하십니다. 그러나 대하시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간이 잘 맞는 설렁탕을 드시는 것처럼 신나고 즐거움으로 활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상황에서 악의 기운을 통제하시고 관리하시는 일에만 주권자로 관여하실 뿐입니다. 기쁨으로 그 삶의 현장을 드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담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현장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있으면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설렁탕에 간이 맞추어지듯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 비유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어떤 모습이 삶의 상황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직장을 생각해봅니다. 직장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이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월급인상과 승진은 모든 직원들의 마음에서 두드러지는 소원입니다. 이때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마음에서 월급인상과 승진을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을 현실로 삼습니다. 그러면 이 한 사람 때문에 직장은 하나님 앞에 소금간이 잘 된 설렁탕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참소유를 이루실 것이고, 창조주 되시고 주권자 되셔서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갖는 참소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완전소유입니다.
완전소유에 대한 설명을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정리하자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내가 모든 소유를 다 버릴 수 있는가를 따져보아야만 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는 이유는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에 올라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소유로 삼는 것이 참소유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에 담긴 세상은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고 다 버리는 무소유의 상태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 것을 소유하고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독 하나님만을 소유하고 소원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이러한 사람들이 설렁탕에 간을 맞추는 소금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신바람 나게 일하시기 위한 전초기지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드시고 싶어 하시는 간이 잘 맞는 설렁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한 참소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활동의 장소가 되고 주권의 현장이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는 완전소유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완전소유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당나라에는 태종 때와 현종 때에 전성기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말년에 며느리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 유명한 양귀비입니다.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등한히 하게 되고 당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게 됩니다. 이 상황을 양귀비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당나라는 현종의 나라입니다. 양귀비는 현종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양귀비는 당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등식이 믿음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 세상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로 가정에 가면 가정을 하나님 입맛에 맞는 설렁탕으로 만들고, 직장에 가면 직장을 하나님 입맛에 맞는 설렁탕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만 소원하고 하나님만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역사를 주권자로서 행하시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양귀비와 같은 입장이 됩니다. 세상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소유했을 뿐인데 내가 버린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주장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삶의 현장 전부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소유의 의미입니다.
요셉이 바로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인 요셉에게는 무엇 하나 소유가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완전히 무소유의 상태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이 자신을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으면서 자기 몸조차도 소유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하나님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보디발은 요셉으로 하여금 집 전체를 관리하도록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만을 소유했을 뿐인데 보디발의 집 전체를 완전소유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간 요셉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몸에 대한 주권조차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 무소유 상태가 되어서 또 다시 하나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자 다시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요셉은 옥을 관리하는 감독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유했더니 감옥이라는 현장을 소유하는 완전소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러던 중에 바로가 꿈을 꾸게 되었고 요셉을 불러서 해석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소원하고 있었고 하나님만 현실로 삼았던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꿈을 해석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당시의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소유했을 뿐인데 애굽을 소유하는 완전소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무소유였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참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처한 상황을 맛있는 설렁탕으로 드시며 보시기에 좋은 대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소유한 하나님이 세상을 가지심으로써 마치 요셉이 삶의 현장을 소유한 것과 같은 역사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소유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으시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음에서 배우자와의 절교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 할당하고 있던 마음으로 하나님만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우자와의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맛있는 설렁탕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만을 소유하는 나에게 하나님을 가지는 참소유가 일어나게 하시고, 나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는 창조적으로 주권을 행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지시는 완전소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가정뿐만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말단 사원이 회사를 완전히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장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직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흑자와 월급인상과 승진을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말단 직원 한 사람이 참소유를 찾고자 합니다. 직장이라는 사실을 연고가 없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처럼 비현실로 만들어서 마음에서 끊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소유의 상태에서 하늘의 하나님만을 소원합니다. 이러한 말단 직원은 직장이라는 설렁탕의 소금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직장이라는 설렁탕을 맛있게 드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초강대국 애굽 전체에 주권을 발휘하셨듯이, 직장이라는 현장에서 말단 사원을 통해서 주권을 발휘해나가실 것입니다. 이 말단 사원이 회사를 완전소유한 상태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소유와 완전소유를 위하여 기존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합니다. 못 버리고 안 버립니다. 부모든 처자든 형제와 자매든 재물이든 재산 등을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에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떠남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지는 참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소유를 통하여 가는 곳마다 삶의 현장을 완전소유 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떠나보내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내 소유가 되고자 합니다. 이때에 세상을 담고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미워하면서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하여 세상과 결별하고 절교하고 떠날 때에 하나님만이 현실인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갑니다. 삶의 현장마다 소금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드실 간이 잘 맞는 뜨끈뜨끈한 설렁탕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참소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삶의 현장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적으로 주관해나가실 때에 완전소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완전소유의 상태가 이루어진 삶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에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오늘도 에덴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마음으로 붙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모든 관계를 끊게 하시고 마음에 세상을 담은 상태를 십자가에서 통째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만이 유일한 현실이 되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보물이 되심으로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소금이 되어 가는 곳마다 참소유와 완전소유의 현장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