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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에서 볼 때 유망한 기대주>의 줄거리:
유망한 기대주란 해당 분야에서 앞으로 크게 성공할 기미가 보이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천국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볼 때도 이처럼 기대주가 따로 있습니다. 다름 아닌 천국에 들어올 것인가의 여부를 성공 기준으로 볼 때의 기대주입니다. 천국에 가느니 마느니 우리의 주관적인 확신을 떠나 천국의 입장에서 천국 입성 성공 여부를 살펴봅니다.
천국에서 볼 때 유망한 기대주
(누가복음 15장 1절~7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에서 볼 때 유망한 기대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에서 볼 때 유망한 기대주’
‘기대주’라는 말은 해당분야에 따라 성격이 달라집니다. 스포츠계, 문학계, 정치계, 경제계와 같은 각종분야에서 크게 성공할 기미가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기대주 혹은 유망주라 부릅니다. 영어로는 떠오르는 별(Rising star)입니다. 요새는 기대주나 유망주라는 말을 으레 주식과 연관해 사용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의미는 바로 떠오르는 별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볼 때 기대주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대주란 크게 성공할 기미가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기대주에게서 어떤 성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은 어떤 성공을 염두에 두고 기대주를 구분할까요?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기대주를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가는 것 아닌가? 천국에 가기로 기대되는 사람이 따로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 주로 확신의 문제를 따집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 나의 확신만이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에 입학을 하려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이 입학원서를 냈는데 떨어질까 불안해하면서 “나는 불안해하면 안 돼. 서울대학에 합격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돼!”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으로 서울대에 합격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대 합격에서 중요한 것은 확신이 아닌 서울대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고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자 한다면 입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천국과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끼리 천국을 들어가네 마네하고 확신을 하네 마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이미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싹이 보이는 기대주들을 정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이 천국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준이 천국에 들어오는 일에 성공하느냐 마느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천국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기대주가 됩니다. 천국의 기쁨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시선과 관심은 쏠리게 됩니다.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80억 인구 중에서 천국의 기쁨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기대주들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중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서울대가 제시한 기준에 합당한 싹이 보인 학생들이 입학을 허락받을 수 있듯이, 세상에서 천국의 기준에 합당한 싹을 보이는 사람들은 천국행 기대주로 여기게 됩니다.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은 입학기준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어떻게 볼지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나를 보며 기뻐하는 순간은 내가 천국을 보며 기뻐하는 순간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앞서 천국으로 기뻐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쁨으로 여긴다면 나 또한 천국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면 천국에서 “와!”하는 기쁨의 탄성이 들려오고, 이때 나도 천국으로 인해 “와!”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앞서 천국을 누리는 기쁨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돈보다 건강과 장수보다 자녀의 형통보다 이윤보다 승진보다 더 큰 기쁨이 되는지 확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내가 세상의 일들로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질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세상의 일들로 기뻐하는 만큼 천국에서는 나를 천국입성 기대주 명단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으레 하는 소리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이러한 예수 믿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천국에서 나를 기대주로 보느냐 마느냐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해할만한 함정이 군데군데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앞선 1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소금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비유는 마음에서 소유하고 있던 세상 것을 다 버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의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구원의 길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천국에서는 나를 기대주로 확인하고 “와!”하는 기쁨의 함성이 울릴 것이고, 나 역시도 천국을 느끼며 “와!”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에서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전제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비유에서는 잃음과 찾음의 사건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이 두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때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듯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잃으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인격 안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구조를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이 한 사람을 잃으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가지신 상태란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소유한 상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잃으신 상태는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외의 대상을 소유하느라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미오의 마음에는 줄리엣이 가득 들어있고, 줄리엣의 마음에도 로미오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만약 줄리엣이 홍길동이라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담게 되었다면 로미오는 줄리엣을 잃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거나 잃으시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이 들어올 때 로미오의 입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줄리엣인 나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면 되찾음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줄리엣이 정신 차려서 역시 로미오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에서 홍길동을 버렸다면 로미오는 줄리엣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남아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기에 목자 없이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걱정한다거나, 기껏 잃어버린 양을 찾아와서는 잔치를 벌이기 위해 다른 양을 잡는 것이 합당한가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비유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목자의 마음 즉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목자의 관심이 잃어버린 양에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것은 한 사람이 하늘에서 기쁨의 기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아흔아홉 마리를 기뻐하는 가운데 되찾은 한 마리 양으로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찾은 양 한 마리가 아흔아홉 마리보다 훨씬 큰 기쁨을 목자에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흔아홉 마리의 양으로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기대주의 명단에서 완전히 제거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하였지만 세상에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80억에 육박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인구 중에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으로 여기시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석들을 보면 이 비유를 아흔아홉 마리도 소중하지만 목자는 잃어버린 양의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께는 그러한 상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흔아홉 마리는 실존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몸으로 관계하는 세상의 대상들을 마음에 담고 소유하고자 합니다. 로미오가 아닌 홍길동을 마음에 담게 된 줄리엣처럼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아홉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 명도 없는 상황임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2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잃어버린 양이란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주로 창기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아흔아홉 마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미합니다.
천국입성의 성공과 관련해서 잃어버린 양인 세리나 창기가 기대주로 여겨지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인 교황이나 추기경이라든지 교단의 총회장이나 임원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 같은 분들이 기대주 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세상에서의 직분을 근거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대 합격 기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합격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천국에서는 교단 총회장이나 목사님들이 기대주가 아닙니다. 천국의 확신에 차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리나 창기와 같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천국의 기대주이자 유망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의 기대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는 자국민들의 세금을 착복해서 로마에 바치던 세리도 아니고 몸을 팔아서 근근이 먹고 사는 창기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를 넘어서 사회지도자로 군림하던 이들과 같지도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자칭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을 택하시고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구약의 역사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선민으로 선택하셨듯이 이들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좋아해야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소원할 때에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보시기에 좋게 이끌어 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며 신앙은 종교로 뒤틀려 변질되게 되었습니다. 이방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함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목말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배타적인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교리만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공로사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율법을 지키며 공로를 쌓고자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마음으로 세상을 열망하는 것 자체가 소원의 형태로 세상을 소유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것을 소원하면 마음에서 세상을 믿는 것이고 소원의 형태로 세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또한 그 사람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상황은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를 소원하게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잃고도 입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는 적대적인 상황을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이고자 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 중에서 실제로 기득권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희박해지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문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가치를 갈망하고 있는 상태가 하나님을 잃은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잃은 상태임을 자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행위가 계속됩니다. 하나님께 적대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 있는 상태에서 이방인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오직 배타적 유일신인 하나님을 붙잡은 결과로 기득권을 얻게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마르둑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신을 섬긴다는 자세는 동일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자기부인과 같이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김이 철옹성 같기에 회개의 가능성도 없고, 천국에서 볼 때는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기대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기들은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것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께 잘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선민의 정식일원이 되어야만 했는데 매국노나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선민사회 안에서 식사나 교제를 할 수도 없었고 이 세상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았으나 하나님을 찾음에 있어서 엄청난 제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는데 세리가 돈을 좋아한다는 말은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백성들의 세금을 착복하는 세리들만큼 돈을 좋아할 자들은 달리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리들에게 한이 맺히도록 간절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선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바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대리만족으로 돈을 추구했지만 그렇기에 돈이 근본적인 소원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죄인의 대명사인 창기도 마찬가지로 세상 것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의인으로 자칭하며 스스로를 회개할 것이 없는 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은 선민사회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망령되게 일컫는다며 금지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회당이나 성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공식적인 집회가 없을 때 몰래 성전에 와서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입장에서는 마음에서 자기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세리와 창기들이 잃어버린 양으로 여겨집니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훨씬 더 유리한 기대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에서 도무지 소유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상태로 회복되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이 세상의 가치를 갖기에 원천적으로 제약이 걸려있는 사람들을 기대주로 여깁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이었기에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리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자리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따르기에 훨씬 유리한 천국의 기대주였던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총회장이고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이 볼 때에 기대주일까요? 아니면 의인으로 자칭하는 아흔아홉일까요? 만약 후자라면 천국에 입성할 기대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고, 17장 13절에서는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평안과 기쁨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천국의 기대주가 되지 못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에서 나를 볼 때 도저히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자리로 가기에 어려워 보인다면 문제입니다. 마음에 세상의 가치가 너무나 많아서 그것을 다 버리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워 보인다면 천국의 기대주 명단에서는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가 천국의 기대주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세상의 가치들이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을 가다 멋진 자동차를 보고 혹하는 순간에도 십자가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라는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뉴스를 보면 나라의 일이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얼른 십자가를 떠올리고 걱정을 주는 사안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일단 마음에 들어오면 설령 그것이 원수일지라도 소유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여 들이대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도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자녀도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만 임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라만 임하시옵소서.”라고 유언을 남기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은 세상을 떠나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럴 때 천국은 우리를 기대주로 여길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던 바리새인 아흔아홉 명 중에 한 명이 천신만고 끝에 마음에서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세리나 창기가 부활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와 바리새인이 부활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천국에서는 누구를 더 기쁘게 여길까요?
이때 천국에서는 세상을 더 많이 버려야만 했던 바리새인의 천국행을 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세습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면 천국에서는 단지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적으로 여기며 더 크게 좋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이 그것들을 마음에서 다 버리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하나님만 소원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천국에서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보자면 세상에서 기득권을 갖고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들 중에서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바리새인들 중에 예수님을 따랐던 두 사람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기득권도 없고 마음에 담을 가치들이 적다면 이미 천국에서 기대주로 여겨지고 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같이 세상에서 기득권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철저하게 생활화할 수만 있다면 천국입성에 성공할 기대주로 여겨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이를 악물고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큼 소유하고 있든지 기필코 마음에서 버리게 하셔서 천국 명단에 기대주로 기입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