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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나를 보는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_태승철 (누가복음 15장 8절~10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20|조회수10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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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를 보는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의 줄거리: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를 잃어서 등불을 켜 들고는 온 집안을 쓸어 기어코 찾아낸 여인이,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상황은 이런 데 실은 잃지 않고 잘 가지고 있는 아홉 드라크마가 너무 아깝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 점에 이 비유 말씀의 깊이와 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천국에서 날 보며 느끼는 사무치는 아쉬움이 주제입니다.

 

나를 보는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

(누가복음 15장 8절~10절)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를 보는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를 보는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오늘 살펴볼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는 모두 천국이 나를 향해 갖고계시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천국이라 함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군천사를 함께 지칭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은 우리를 향해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 마음이 사무치는 아쉬움입니다. 이 아쉬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비유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나를 보고 아쉬워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부터 인생이 풀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국이 나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무엇인가를 아쉬워한다면 인생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헛된 시간만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 나를 볼 때 어떤 점을 아쉬워하는가를 바로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드라크마는 고대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 로마의 화폐 단위였던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의 화폐가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현재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고려한다면 대략 십오만 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드라크마는 화폐의 단위이지만 ‘열 드라크마’라고 지칭할 때에는 완전히 의미가 달라집니다. 열 드라크마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열 드라크마는 한 줄로 꿰어서 머리에 얹거나 목에 거는 장신구로도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결혼식 때에 신랑이 신부에게 사랑의 증표로 건네주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결혼반지나 패물 같은 의미였던 것입니다.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은 열 드라크마 대신에 황금과 보석과 진주의 장신구를 사용했겠지만 당시 서민층 여인들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목자의 모든 관심이 한 마리 양에게 쏠린 상황이 중심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기대하는 사람은 스스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잃어버렸고 되찾기를 기대하는 한 마리 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데에는 당시의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의 기대주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이 의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임을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잃었으면서도 세상 것을 소유하게 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였고 또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어서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처럼 1:99의 대결구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아홉 드라크마가 계속해서 사랑의 증표로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야만 합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을 수 없다면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 또한 사랑의 증표로서의 의미를 잃고 낱개로 흩어져서 생활비용으로 지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 전 당시의 여인들에게 남편의 존재는 인생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준 드라크마를 잃었을 때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란 실로 간절했을 것입니다. 바로 잃어버린 한 사람을 향한 천국의 사무치는 아쉬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선민은 모두 한 드라크마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도 서기관들도 세리도 창기도 선민사회의 구성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되찾고 싶은 사람들이 선민이었습니다. 즉 드라크마의 비유는 인류를 위해서라도 선민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비유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은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한 자들입니다. 다만 이러한 자들조차 선민의 일부였기에 하늘의 아쉬움은 똑같이 존재합니다.

 

한편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잃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고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적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심을 통해 인간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될 마음의 공백에 이 세상의 것을 담게 되었고 그 결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잃으신 것이고 나도 하나님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비유는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마음으로 우리를 찾고자 하심에 대한 천국의 아쉬움과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열 드라크마가 온전히 있는 상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잃기 전의 상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영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마음의 공백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공백을 인간의 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육체와 의식을 갖도록 지으셨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대상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지정의가 활성화됨으로써 의식이 드러나게 됩니다. 정리해보면 인간은 세상을 오감으로 포착하는 육체, 지정의를 느끼는 의식,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 공백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음이 잃음과 연관이 됩니다. 마가복음 7장 6절을 보면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류가 다 잃은 자들입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택하신 선민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조차 잃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잃은 구체적인 대상은 마음 하나입니다.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 하나를 잃은 것이 사람 전체를 잃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소원하고 소유한 상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잃으신 것이고 사람도 하나님을 잃은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소유함이 지속될 수 있다면 몸과 의식의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이 팔십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그 삶의 매일 매일을 통하여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마음의 공백을 지으시고 의식의 가능성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지으심을 통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 소유하게 되면 의식과 몸을 통해 살아가게 되는 삶의 영역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창조적 계획들이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게 됨으로써 팔십 년 동안 이루어질 모든 계획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묶여버리고 무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적 삶을 마친 후에는 천국에 불러들이셔서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게 하실 계획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림을 통해 무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하나에 하나님을 채우지 못함이 육체와 의식을 통해 살아갈 평생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의 평생을 통해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계획들과 영생까지도 다 의미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홉 드라크마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마음의 공백을 만드셨고 의식과 몸도 만드셨습니다. 이로써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계획이 있었고, 몸과 의식을 통해 진행되는 삶에서는 날마다 보배로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들을 보시기에 좋게 이루어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사랑의 증표로써 열 드라크마가 온전히 모여 있는 상태입니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은 태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합격이 있으라, 취직이 있으라, 결혼이 있으라, 자녀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팔십 평생을 통해 이루어 가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이 끝나면 영원토록 하나님 곁에 두시고자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쁨 가운데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그 기쁨 속에서 살게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표로서 열 드라크마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매일 매일의 모든 계획과 영생까지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지 않으면 아홉 드라크마 또한 의미가 퇴색합니다. 더는 사랑의 증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시며 천군천사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열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열 드라크마는 온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잃지 않으시고 나도 하나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한 드라크마로 인해서 나머지 아홉 드라마크가 엮여서 사랑의 증표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마음 하나가 하나님을 잃고,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하나를 잃으심으로써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가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삶은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되찾아지고 지켜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몸과 의식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봉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아쉬움을 느껴서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못했더라면 당연히 이러한 일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봉장으로서의 바울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서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기 위하여 태어나기도 전에 택하셨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마음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기에 천군천사들 또한 이러한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바울이 되기 전에 예수를 탄압하던 사울을 보면서 얼마나 사무치는 아쉬움을 느꼈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이 “사울아! 이렇게 굉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네가 마음 하나를 하나님으로부터 잃음으로써 이 계획 전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너를 사랑하셔서 만든 사랑의 증표인데 마음이라는 한 드라크마를 잃음으로써 너의 아홉 드라크마가 다 무용지물이 되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교회의 수장이 된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태어나기 전부터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삼으시고자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열 드라크마가 계획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베드로가 마음 하나를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 채워지자 나머지 아홉 드라마크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마음 하나를 잃었다면 어땠을까요? 교회의 수장이 되게 하시고 영생까지 포함하는 아홉 드라크마는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천사들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불꽃 가운데 타지 않는 가시떨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이끄는 대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없었다면 모세를 통해 계획되었던 출애굽사건으로부터 모든 일들은 아홉 드라크마로써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고 천국에서는 너무나 아쉽게 여겼을 것입니다.

바로 천국에서 나를 볼 때도 이와 똑같이 사무치는 아쉬움이 존재합니다. 지금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동안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잃고 있습니다. 승진을 못 했다고 아쉬워하는 동안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고 있습니다. 몸에 이상신호가 켜졌다고 두려워하는 동안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세상에 보내실 때는 사랑의 증표로 열 드라크마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주려 하시고 육체와 의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모세처럼 요셉처럼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처럼 이루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으십니다. 꼭 이 세상에서 주목을 끄는 일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평강과 기쁨과 만족 가운데 살 수 있는 모든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돈을 원하고 건강을 원하고 승진과 합격을 추구하는 동안 마음이라는 한 드라크마는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때문에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가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라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만 찾을 수 있다면 인생과 영생까지 포함하는 아홉 드라크마는 본연의 자리를 되찾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문제 삼을 겨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들을 마음에 담고, 안 되는 일에 대해서 근심걱정을 할 때가 아닙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심정으로 마음을 찾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마음을 되찾았다가도 내일 다시 잃게 되는 것이 유전 죄에서 비롯된 죄적 성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 드라크마를 잃지 않고 또 잃었더라도 되찾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우리에게는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파악하는 육체와 의식도 있습니다. 마음과 의식과 육체가 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식의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몸이 있는 곳에 세상이 있고 의식이 있는 곳에 십자가가 있고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즉, 나의 의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 있으면 나의 영인 마음의 공백은 부활의 자리에 있게 되고 내 몸은 세상에 남아있게 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시켜 나가면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지 않는 상태가 되고 내 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내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있을 때 비어있는 마음에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서 채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의 증표로 주신 열 드라크마가 나에게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사람에게는 몸이 있고 의식이 있고 영인 마음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를 십자가와의 관계에 대입해보자면 몸은 세상에 있고, 의식의 자리에는 십자가가 서있고, 마음의 공백은 부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열 드라크마가 한 줄로 꿰어져서 사랑의 증표가 되듯이 하나님의 계획들이 나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에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가슴을 치며 아쉽게 여길 것입니다. ‘나’라는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려있기만 하면 마음의 공백인 영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몸으로 사는 세상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채워질 것이며 몸이 죽고 나서는 영생의 삶이 허락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붙잡지 못함으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고 아홉 드라크마 전체가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놓였으니 아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잃어버린 열 드라크마 전체를 되찾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실감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아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림으로 사랑의 증표로써 의미가 있는 열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남을 알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잃어버린 마음이 하나님께 되찾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다 잃어버릴 위기에 있던 아홉 드라크마까지도 온전히 회복되는 날마다의 삶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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