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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성공이다_태승철 (누가복음 15장 20b절~2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22|조회수12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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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성공이다>의 줄거리:

유산을 앞당겨 상속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탕진한 결과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쫄딱 망하고도 자살하지 않고 돌아온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마치 무슨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대 성공이었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성공이다

(누가복음 15장 20b절~24절)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성공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탕자의 귀환은 아버지의 성공이다’

탕자의 귀환은 세상에서 출세하여 나팔 불며 비단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금의환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먼 나라에 가서 절대 궁핍에 처해 있다가 도저히 절대 궁핍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탕자의 행색과 몰골은 비참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가 측은하게 여겨 먼 거리에서 달려가 끌어안아 줄만 합니다. 다만 아버지의 측은함은 곧 아들을 되찾은 성공의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단 한 마디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기세 좋게 나가더니만 꼴좋다! 이게 정말 네가 바라던 바였느냐! 이제 철 좀 들었냐! 빨리 들어가자 동네 사람들이 볼까봐 창피해 죽겠다. 네가 아들로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나도 너를 아들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는 온갖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하는데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습니다. 먼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일 좋은 옷으로 번역된 헬라어를 보면 “집안의 첫 번째 옷”입니다. 집에서 연회나 잔치를 베풀 때에 제일 귀한 손님에게 내어드리는 옷을 의미합니다. 또 가락지를 끼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락지는 집안의 최고의 결정권과 권위를 가진 주인이 끼는 증표입니다. 이러한 반지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상속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가장 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였으며 유일한 상속인으로 인정하여 공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탕자가 둘째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아실 수 있겠지만 집안에는 첫째 아들이 존재했습니다. 본래 가락지는 집에 남아있던 첫째 아들에게 상속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마중하는 이 순간에도 첫째는 밭일을 하러 나가서 동생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첫 번째 옷과 가락지는 모두 첫째 아들에게 허락되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고 있는 첫째 아들을 마치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연회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첫째 아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여전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첫 번째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연회를 시작해버립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아버지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사랑”이라는 자체가 전적으로 우리의 기준과 관점을 아버지의 마음에 오버랩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아버지의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보다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볼 때 돌아온 탕자의 귀환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성공을 겨우 이루어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탕자는 아버지가 바라는 성공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은 관계성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성공한 남자라고 한다면 으레 사업에서의 성공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성공한 남편이라고 할 때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공한 아버지라고 할 때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성공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단지 아들의 귀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성공을 자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는 그들이란 집안의 종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탕자가 돌아왔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같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죽었음과 잃었음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여기서 바로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함께 생각했던 잃어버림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말씀하셨던 14장 33절의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잃거나 얻음은 소유와 관계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잃으셨다는 것은 나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 대상들의 이름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없는 것이 나를 잃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지시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마음에 가진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러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24절의 말씀도 풀어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아들의 마음 안에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잃으신 것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마음 안에 아버지가 없던 상황은 첫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상속받을 재산과 그 재산을 기반으로 일구어내고자 하는 인생의 미래를 마음에 담고 있었을 뿐이지 아버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이 서로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진정한 부자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아들 마음에 들어가야 하며 아들이 아버지 마음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 자체를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아버지를 보고 입으로는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음에도 마음 안에 아버지를 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 아들의 마음 안에는 언제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재산과 그 재산으로 일구어낼 미래가 들어있었습니다. 따라서 둘째가 상속할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가기 전에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읽을 때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그저 먼 곳으로 떠났던 아들이 돌아왔음을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잃은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들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는 도둑 둘과 같이 사는 상태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언급하고 자기 몫의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둘째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요구에 응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 찾기를 위한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마음 안에 아버지를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아들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만을 노리는 두 도둑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둘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함을 통해 아들을 되찾기 위한 모험을 감행합니다. 두 아들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혹시 하나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둘째를 내보냈던 것입니다.

둘째가 재산을 가지고 나간 순간부터 진정으로 아들을 되찾는 성공에 대한 아버지의 기다림은 시작되었습니다. 비참한 몰골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도 이러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잃어버린 상태였던 아들이 이제는 마음에 아버지를 담고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가 꿈꾸던 성공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본의 아니게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집에서 나갈 때부터 허랑방탕한 삶을 계획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기근을 만나 절대 궁핍에 직면하게 됩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채움과 만족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탕자에게는 쥐엄 열매를 주는 자도 없는데 자기 집에서는 아버지가 품꾼들에게 풍족한 양식을 주고 있습니다. ‘주다’라는 개념을 통해서 탕자의 마음에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집에서 풍족함을 누리던 때에 그 풍족함을 주시던 아버지를 마음 안으로 모셔 들이고 바라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탕자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풍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먼 타국에 와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 궁핍에 직면하게 되고 굶주리다 보니 풍족한 음식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 풍족함의 근원을 생각해보니 당연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에서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집에서 눈으로 아버지를 보고 입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볼 수 없고 부를 수 없는 타국에서 풍족함 가운데 볼 수 없었던 아버지가 절대 궁핍의 상황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예는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집을 떠나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고시생이나 취업준비생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답들이 비슷합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물론 시험에 붙는 것을 언급하지만 그와 똑같은 정도로 집밥이 먹고 싶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집밥과 똑같은 밥상을 차려준다고 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밥은 엄마가 차려주는 밥입니다. 늘 먹어야 하는 밥에서 엄마를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고시원의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끼니를 챙길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잠자고 있어도 깨워서 먹으라 하시고, 먹기 싫다고 해도 밥상을 들이밀며 먹게 하시던 그 어머니를 고시원에 와서야 비로소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밥상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혼자 고시원에서 살게 되면서 끼니가 부실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밥상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마음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궁핍 앞에서 늘 풍족함을 허락하시던 아버지에게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 궁핍과 전혀 반대 상황인 모든 것이 풍족하던 때에는 눈에 보이던 아버지를 마음 안에 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궁핍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드디어 마음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워하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의 회개의 고백이 나타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인정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러나저러나 자기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정정하신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은 것이 무례하기는 하지만 상황이 처참하게 된 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하늘과 아버지에 대한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탕자의 죄는 한 번도 아버지를 마음에 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언제나 아버지를 보고 부를 수 있었지만 마음 안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이 그 아버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주신 아버지를 고마워해 본 적도 없고 좋아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궁핍을 만나 풍족한 양식을 떠올리게 되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그립고 소중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소중한 아버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재산을 생각하고 자기 인생을 생각하느라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고자 하지 않았고 좋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회개는 먼 나라에서 탕진한 재산에 대한 회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를 고마워하지 못했고 마음 안에 담은 적이 없었음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어떻게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차라리 품꾼의 하나로 취급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의 상봉이 이러한 모습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이 있었으나 두 아들을 모두 잃은 상태였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유산을 가지고 나가겠다는 둘째 아들에 대해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혹시 아버지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거지꼴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성공이었습니다. 드디어 마음에 아버지를 담은 아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빼서 끼워줍니다. 마음에 아버지를 담고 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아들만이 진정한 아들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상봉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보석빛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을 떠나서 세상이라는 참으로 머나먼 나라에 와있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을 이 세상의 것으로 많이 채워보겠다고 온갖 시도를 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이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바라시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애초에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절대 궁핍의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의 채움과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위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마음 채움이 불가능한 절대 궁핍 앞에서 풍족함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마음에 담게 되고 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아버지께로 가고 싶어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녀를 되찾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되찾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아버지께로 가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는 절대 궁핍을 깨달은 탕자의 회개와 같은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나는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절대 궁핍의 현장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은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절대 궁핍의 현장입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나의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절대 궁핍의 자리에서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려는 나는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머물게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는 아버지만 마음에 담게 되고 아버지만 그리워하는 아들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생활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부인은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절대 궁핍을 인정하지 않는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승진하면 기쁠 것이라고 여기고 월급이 인상되면 만족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절대 궁핍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의 형통이 기쁨과 만족의 근거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 것 또한 절대 궁핍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부활의 자리에 이를 때에 마음 안에 아버지만을 담고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늘도 하루종일 가는 곳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성공을 안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로도 아버지께 기쁨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께 성공을 안겨드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절대 궁핍의 현장임을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리며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시고 그리워하게 하시고 마음에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따라 부활과 승천의 길을 가서 마음이 아버지께 도달하여 아버지께 성공을 안겨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버지의 성공이 또한 나의 성공이 되는 은혜롭고 참으로 놀라운 빛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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