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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탕자>의 줄거리: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피상속인이신 아버지와 상속자 아들 관계를 이처럼 잘 표현할 수가 없지요. 상속자인 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이 참 좋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을 혹시 아시나요? 실제로 이 말대로인 부자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귀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탕자
(누가복음 15장 25절~32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귀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탕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귀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탕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 15장의 1~2절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보고 비난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마리 잃은 양의 비유와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이어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에 기록된 인물들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짚어보자면 돌아온 탕자는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집안에 있으면서 돌아온 동생의 환대를 못마땅하게 여겨 불평하는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돌아온 동생으로 인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맏아들의 마음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돌아올 수 없는 탕자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무척 유명하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활 속에서 언급하고는 합니다. 다만 우리는 보다 심도 있게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이 비유에서 돌아올 수 없는 탕자에 대한 내용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올 수 없는 탕자와 돌아온 탕자를 비교함으로써 돌아온 탕자에 대한 의미는 더욱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탕자란 맏아들을 의미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떠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맏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선민들 중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제시해줍니다.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기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이혼이 결혼한 사람만의 바람직하지 않은 특권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의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으로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며 맏아들이 어떠한 영적상태에 있었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읽어서 아시다시피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불만의 이유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봅니다.
31절을 보면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하셨습니다. ‘내 것과 네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제가 소유의 문제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소유에 대한 문제는 14장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온 내용입니다. 14장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비유가 나타난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14장 26절에서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이 소유의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을 통해서 만나는 것들 중에 의식 안에 담게 되는 모든 것들이 소유입니다. 경제적 차원의 소유의 개념에서는 자녀가 부모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자녀도 엄연히 부모를 의식 안에 담음으로써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소유의 문제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와 잃은 탕자의 비유로 이어지며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소유 문제를 염두에 두고 31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음이 진짜 소유임을 강조하는 것은 맏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소유하지 못했음에 대한 반증입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소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맏아들이 마음에 담았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상속할 재산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맏아들과의 관계를 소유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이 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원망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상적인 관계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맏아들은 몸으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음에서도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에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만 아버지의 것이 다 맏아들의 것이 되는 일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맏아들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재산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는 것은 결국 도둑질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맏아들은 몸이 아버지와 함께 있듯이 마음으로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소유가 다 맏아들의 소유가 되는 일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원했던 관계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맏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상속자란 단순히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를 마음에 담은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상속자입니다. 아버지를 마음에 담았기에 아버지의 것을 당연히 물려받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에게 배우자의 사회적 성과를 함께 누릴 권리가 주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어렵게 모은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세상천지에 아버지를 가장 깊게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것이 상속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가 아닌 부모의 재산만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속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 갖는 짝사랑 때문입니다. 상속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고 맏아들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없는 맏아들을 비유로 삼아 우리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맏아들이 잔치가 열리는 집에서 아버지와 마주친 뒤에 한 일은 성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29절을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둘째가 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돌아온 것이 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바로 집에 남아 있었던 맏아들의 정체를 탄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섬김’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종노릇을 한다는 뜻의 둘레워(δουλευω)로써, 종이나 노예라는 뜻의 둘로스(δουλος)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맏아들에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따랐던 것은 과제였고 일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월급을 받으려고 사장님의 명령을 따르며 일하는 것처럼 맏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을 따랐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맏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지만 마음에서는 이미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영적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과는 다르게 아버지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불순합니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맏아들의 목적은 아버지가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재산의 소유권이었습니다. 아버지 곁에 머물고 싶어서 머문 것이 아니라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맏아들이 소유권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빨리 죽어야만 합니다. 결과적으로 맏아들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바라면서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닌 재산을 마음에 담은 결과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소유권의 상속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고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마음에 재산을 담고 있었고 상속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버지 곁에 머무르는 것을 종의 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을 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러다가 절대 궁핍과 마주치게 되자 풍요로움을 동경하게 되었고 마음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재산을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은 둘째와 똑같습니다. 다만 이후의 선택이 다릅니다. 맏아들은 재산의 소유자인 아버지의 죽음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영적인 상태였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몸으로 접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음에 담은 것을 실제로 가질 수 없을 때는 결핍감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에 담지 않았다면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결핍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부족감과 결핍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소유하지 못한 세상 가치들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하나님을 통해 세상의 가치를 얻어서 마음의 결핍감을 없애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모습은 맏아들과 같습니다. 결핍감이 충족된다면 더 이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맏아들이 아버지 곁을 지키는 이유가 아버지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 무척 모순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전에 이 말씀을 드리며 반창고를 비유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 있는 응급키트를 열면 일회용반창고가 들어있습니다. 상처가 나면 연고를 바르고 일회용반창고를 붙입니다. 일회용반창고를 좋아해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일회용반창고가 없어도 되는 상태를 위해서 붙이는 것입니다. 의사를 찾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를 안 찾아도 되는 상태를 위해서 의사를 찾습니다. 결핍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핍감이라는 상처를 없애는 반창고로써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상태를 위해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맏아들의 심리상태입니다. 아버지 곁에 남아있지만 그 이유는 아버지를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느껴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음이 세상을 먼저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소유했는데 실제로는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상태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반창고가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반창고를 찾는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맏아들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상태를 바라면서 아버지 옆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관계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 안에 담는 소유의 일이 벌어지고 나면 반드시 나의 소유권과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맏아들은 마음에 아버지를 소유하는 대신에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유권자로서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재산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소유권자로서의 의식과 아버지의 주권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마음에 아버지를 가질 수 있었다면 충돌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아버지와의 거리가 없다면 아버지의 주권행사가 다 자신의 일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뉴스 등을 보면 자녀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내 아이는 절대로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며 자녀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녀의 행위가 아닌 자녀 그 자체를 마음에 담고 있기에 잘못이 잘못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상당히 주관적인 상태에 빠져있는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면 아버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면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충돌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예로 들어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의 순간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했고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을 행사하시는 장소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주권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는 일도 좋았던 것입니다.
한편 마음이 세상 것을 좋아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도 마음에 맞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라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의 소유권과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늘 불만과 원망과 짜증이 나고 삶은 무겁고 힘겨워집니다.
이러한 충돌의 원인은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의 현실로 나타날 때 원망과 짜증이 생겨납니다. 마음에 불평불만이 있다면 맏아들의 상태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아버지! 내 삶이 경제적으로 힘이 듭니다. 어떻게 좀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기도하지만 경제적인 영역에서 난 상처를 호소하며 하나님을 일회용반창고로 쓰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보자면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다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그 후에 퇴장하시면 됩니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제적인 문제가 있을 때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실질적인 기도의 내용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기도를 하고 있으니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게끔 해달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도가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맏아들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해야 하는 것일까요? 경제적인 문제든 건강상의 문제든 가족의 문제든 어떤 문제와 연관해서든 불평불만이 생긴다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기쁠 수 있다고 믿는데 주어지지 않기에 불만인 것입니다. 이 삶의 현장이 절대 궁핍의 현장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에 진정한 회개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의 문제에 못지않게 떠나지 않았던 맏아들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면 돌아온 탕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우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이 맏아들의 상태를 알아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이유를 찾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간 적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맏아들이 아버지 곁에 남아있으면서 아버지가 빨리 죽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모습은 참 무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세상을 먼저 담게 되면 내가 바라는 것이 실제로 없다는 결핍감 때문에 하나님을 일회용반창고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에 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미 결핍감 때문에 배우자를 일회용반창고로 썼고, 결핍감 때문에 자녀를 일회용반창고로 써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조차도 일회용반창고로 쓰고자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결핍감입니다.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관계는 일회용반창고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회용반창고를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없어도 되는 상태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결코 그러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불신앙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맏아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염두에 둠으로써 진정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탕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모순된 신앙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운명적으로 절대적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불신앙의 상태를 신앙으로 알고 살았던 모든 시간을 돌아보게 해주시고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떠난 탕자입니다.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탕자가 되게 해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