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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은 갖고 세상것은 실컷 쓰자>의 줄거리:
하늘은 가지지 않는 것이 불법이고, 이 세상 것은 가지는 것이 불법입니다. 하늘은 가져야만 하고 이 세상 것은 가지는 대신에 써야 합니다. 여기서 '가진다'는 말의 뜻은 마음의 채움 거리로 확신하여 의식이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쓴다'는 말의 뜻은 지혜를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늘을 가진 자만 제대로 쓸 수가 있지요.
하늘은 갖고 세상 것은 실컷 쓰자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은 갖고 세상 것은 실컷 쓰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은 갖고 세상 것은 실컷 쓰자’
13절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접할 수 있었던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늘은 내 것으로 갖되 이 세상 것은 갖는 것이 아니라 실컷 쓸 수 있어야만 한다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늘 즉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지 않는 것이 불법이고, 세상을 사는 동안에 몸으로 만나게 되는 것들을 가지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가져야 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 것들은 갖는 것이 아니라 남김없이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매일매일 잔고를 남기지 않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쓸 때에는 지혜를 따라 써야만 합니다. 지혜를 따라 쓴다는 것은 가장 적절하게 쓴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쓰고 싶어도 쓸 것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지만 몸 하나를 쓰셔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도 무일푼으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하여 유럽을 뒤집어엎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 것의 잔고를 정리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붙자고 마음이 유체이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봅니다. 한 사람의 삶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몸이 있고 몸을 중심으로 관계가 확장되어 갑니다. 마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듯이 나의 지구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의 지구란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관심을 가지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관심의 영역은 작게는 일상생활로부터 크게는 국제관계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이 지구를 떠나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하늘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갖는 것 외에는 마음에 가질 대상이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부활의 자리는 하나님만을 갖기로 운명 짓는 것이고 하나님만 갖는 붙박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가질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나면 십자가 너머에 존재하는 나의 지구는 전부 다 쓸 것이 됩니다. 이렇게 쓰는 것이 지혜롭게 쓰는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는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처럼 가진 것이 몸뿐일지라도 실컷 쓸 것이 됩니다. 꼭 돈만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자리에서는 몸에서 시작되는 부부관계와 부모자식 관계와 모든 관계를 지혜롭게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유 개념으로 보자면 내 마음 안에 소유하는 것들이면 다 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몸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의 대상들을 통해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마음의 흡입력의 기운을 받아서 작동하게 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져서 의식 안에 들여놓은 대상들이 소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유의 개념에 몸으로 만나는 모든 관계를 포함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서 이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질 것이 아니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에 자리에 이른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그동안 소유로 여기던 모든 것은 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의 몸으로 맺는 모든 관계와 사물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지혜를 따라 써야만 하고 죽기 전에 실컷 쓰다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들은 내가 소유로 삼을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나의 지구를 유체이탈하듯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하는 일은 마음에 하나님만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의 대상은 운명적으로 하나님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 너머에 존재하는 나의 몸에 연관된 모든 일과 대상들은 다 쓸 것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다 쓰고 죽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삶입니다. 우리는 쓰는 것을 돈에 한정시켜 생각하기에 자꾸만 쓸 것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만, 실제로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쓸 것이 존재합니다. 이것들은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써야 할 대상들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4장 32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으로 붙잡은 것들이 하나라도 있다면 마음이 세상을 탈출 할 수는 없기에 다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버림은 끝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으로 버렸다 해서 나의 몸으로 관계하는 대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몸으로 부딪히는 대상들을 어떻게 관계하고 대처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롭게 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컷 쓰고 적절하게 쓰다가 우리의 생은 끝나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A와 B가 비교되는 형태의 비유를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것과 큰 것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또 11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작은 것은 불의한 재물로, 큰 것은 참된 것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12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것과 불의한 것으로 표현된 재물은 남의 것이고, 반면에 큰 것과 참된 것으로 표현된 것이 너희의 것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작은 것, 불의한 것, 남의 것이 한 부류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것은 가지면 나도 불의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것이고 재물입니다. 반면에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이 한 부류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교 끝에 13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작고 불의한 남의 재물을 내 것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큰 것, 참된 것 하나님을 너희의 것으로 삼으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재물은 버려야 할 소유의 대표로써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게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 안으로 소유해야 될 유일한 분으로 큰 것, 참된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발전해 나갑니다.
본문을 보면 소탐대실(小貪大失), 무욕이 대욕(無慾大慾) 같은 말이 떠오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지극히 작은 것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지극히 작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작음을 의미하는 미크로스(μικρός)의 최상급인 엘라키스토스(ἐλάχιστος)가 사용되고 있는데 더 작을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한편 큰 것에 대해서는 최상급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큰 것의 의미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큰 것이 의미하는 하나님은 더 크고 작고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은 지극히 작은 것에 포함됩니다. 크신 하나님과 비교하자면 돈으로부터 시작해서 배우자나 자녀, 명예 권력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은 더 이상 작을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장 작은 것들을 마음 안에 들여놓고 크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얻기 위해 가장 작은 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버림은 끝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가장 작은 것들을 다 버려서 큰 하나님을 갖게 될 때는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컷 쓸 것들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비유의 주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비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1~8절까지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청지기는 전권을 위임받아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1절을 보면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주인은 해고를 통지합니다. 별안간 직장을 잃은 청지기는 이제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관리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육체노동을 하자니 감당이 안 되고 그렇다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꾀를 하나 떠올립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채무자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을 모아놓고 한 일이 특이합니다. 6~7절을 보면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채무증서를 바꿔 쓰게 하였던 것입니다. 기름 백 말은 현재 단위로 2,300리터이니 엄청난 양입니다. 그것을 오십 말 즉 1,150리터로 고쳐 쓰게 합니다. 빚이 반 토막이 되는 셈이니 빚진 사람이 이를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또 밀 백 석은 당시 노동자들의 8년 연봉에 해당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것을 또 팔십 석으로 고쳐 쓰게 합니다. 이 사람 또한 빚이 이십 석이나 줄어들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이 고쳐 씁니다. 예를 두 사람만 들었지만 다른 모든 채무자들에게 대해서도 모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이렇게 해서 주인의 채무자들에게 환심을 샀습니다. 나중에 해고를 당해서 쫓겨나더라도 찾아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훗날을 도모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당시에도 법과 기준이 있었는데 청지기가 멋대로 계약서를 고쳐 쓸 수 있느냐는 것도 의심스럽고, 주인이 청지기를 고발해버리면 해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넣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우리가 모르는 관행이 하나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자로 언급된 이 주인은 고리대금업자입니다. 당시 고리대금업자들은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채무증서를 작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기름의 이자율은 100%였습니다. 기름 오십 말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은 이자 오십 말을 포함시켜서 백 말을 빌린 것으로 증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밀가루의 이자율은 25%였기에 팔십 석을 빌리고자 하면 백 석을 빌린 것으로 증서를 썼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사회의 율법은 고리대금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계약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과 청지기가 한 편이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서로 결별하게 된 상황에서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인은 불법으로 여겨지던 고리대금업자였기에 청지기를 고발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칭찬은 반어법적인 칭찬입니다. “이 약아빠진 사람을 보게나. 내가 꼼짝없이 당했구먼. 저 친구가 머리 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그건 인정한다.”라는 심정으로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러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처럼 사람 뒤통수를 치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는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예로 드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위기를 당했을 때 스스로를 구하고자 처신하는 지혜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에게 있어서 이자로 매겨지는 기름 오십 말과 밀가루 이십 석은 어차피 자기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것이었지만 율법으로는 누구도 가지면 안 되는 불의한 재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소유하지 않고 머리를 써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과 관계합니다. 그중에서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마음에서 소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소유할 것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들은 본래 마음에 담고 소유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한 상태가 불의이고, 불의는 곧 하나님과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돈이 불의한 재물의 대표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서 의식 안에 담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불의한 재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관계에서 남편은 아내를 마음에 담고 아내는 남편을 마음에 담습니다. 서로를 소유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자를 통해서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이때 배우자는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배우자를 마음에 담고 기쁨을 얻고자 하였기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비교해보면 배우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너무나 작아서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심지어 배우자는 애초에 마음에 담고 소유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배우자란 지극히 작은 것이고 남의 것이며 가지고자 한다면 불의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비단 배우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도 그렇고 몸으로 관계하는 세상의 모든 대상이 그러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소유의 대상이 아닌 써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바로 지혜를 따라 써야만 합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깨닫고 마음 바깥에 내놓을 때 지혜를 따라 적절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채무자들의 마음을 사서 친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청지기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관계에까지 지혜를 따라 쓸 때 곧 영원한 삶을 결정짓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영원한 삶과 영원한 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내게 주어진 것들을 지혜로 쓸 때 영원한 삶은 결정됩니다. 가정에서 남편노릇이나 아내노릇을 할 때나 자녀 앞에서 부모노릇을 할 때 일상적으로 지혜롭게 쓸 동안 영원한 삶과 죽음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이 세상 것을 지혜롭게 쓴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영원과 연결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보면 불의한 재물을 마음에 담고 소유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쓸 줄을 알았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불의한 재물을 써서 친구를 사귐으로써 비로소 하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되었음이 증거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삶에서 주어진 것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자 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쓴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과 연결되었음의 증거입니다. 청지기가 비록 불의한 재물이지만 그것으로 친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지혜롭게 쓴다는 것을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마음에서 소유를 버림입니다. 둘째 단계는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세상에서 빠져나감입니다. 셋째 단계는 세상을 빠져나가 도달한 부활의 자리에서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인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없고, 세상을 빠져나갈 수 없다면 하나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면 십자가 너머에 있는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쓸 수 있게 됩니다. 마음과 의식 안에 세상 것을 담고 있던 모든 소유는 버려져야 합니다. 마음을 채울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을 갖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몸과 관계된 모든 것을 합당하게 쓸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실컷 쓰는데 지혜롭게 쓰는 것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는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말씀과 지혜이신 예수님의 생각이 보태지자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는 물 쓰듯이 펑펑 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버림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몸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버려져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마음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와 하나님만 소원하는 부활의 자리에 이를 때에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관계하는 지구 전체가 나의 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주어진 것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보태지고 하나님의 뜻이 포함된다면 오병이어만 가지고도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 남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많고 적음은 우리가 걱정해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소탐대실이나 무욕대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무욕의 상태여야 가장 크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여겨서 탐하지 않아야 가장 크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가진다면 이 세상 것도 펑펑 쓰고 실컷 쓰고 주저함 없이 쓰고 거침없이 쓰다가 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쓰던 사람들은 영원한 거처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가난한 환경에 처한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가난하게 느끼는 이유는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서 소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재벌 총수가 갖고 있는 돈이 많다지만 하나님과 비교하자면 작음을 의미하는 미크로스의 최상급인 엘라키스토스에 불과할 뿐입니다. 재벌의 재산까지도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야 할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가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를 못 배운 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애초에 여러분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가난하다거나 부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자녀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것이 아닌 것으로 여러분이 가난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으로 부자여야 될 사람들이 자기 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재정상태가 안 좋아서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재벌총수도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라면을 먹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세상의 상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마음에 소유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망하게 될 뿐입니다. 그럴 때 몸으로 관계하는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재산이 백억 원이나 되어도 한 번도 지혜롭게 쓰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만 급급하다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돈 백만 원을 가지고 있어도 그 돈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는 것에 지혜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인 하나님을 가질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만 가지면 실컷 쓰다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베드로가 그러했으며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갖고 난 다음에는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실컷 쓰면서 살다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다가 죽어야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천국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보다 자세히 말씀해주시고 계심을 다음 시간에 살펴 볼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혜롭게 쓰면서 살아야 된다는 말만 들어도 흥분이 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라 마음에서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세상을 탈출하게 하셔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이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불의한 재물에 속하는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몸으로 관계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실컷 쓰다가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