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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예수님과 다르면 내가 이상한 거다_태승철 (누가복음 16장 14절~1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27|조회수97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과 다르면 내가 이상한 거다>의 줄거리: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어차피 온 세상 사람은 각자 예수님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 때 보이는 반응이 참 중요합니다. 비웃어도 또 훌륭하다고 추켜세워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다르면 내가 이상한 거다

(누가복음 16장 14절~18절)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과 다르면 내가 이상한 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과 다르면 내가 이상한 거다’

오늘의 번제 말씀을 전하기 전에 광고를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방송 일정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의 공지나 전용카페와 유튜브 채널의 최근동영상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에는 오늘의 번제와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의 내용이 업로드 되고 홈페이지에는 오늘의 번제 영상을 비롯하여 다운로드 가능한 음성파일이 함께 올라오고 있으니 참고하셔서 이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목만을 보자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크게 와 닿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과 나를 비교할 때에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크 같은 사업가들과 나를 비교해볼 때에도 다름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국인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뛰어난 미모로 유명한 김태희 씨는 서울대학을 나왔고 남편은 월드스타 비 씨입니다. 워낙 모든 방면에서 탁월하기에 나와는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본문 14절을 보면 비웃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비웃는다는 것은 앞서 보았던 상황과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정책을 발표하게 되면 야당에서는 으레 반대 의견이 나오고 비웃는 장면이 보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항상 비웃습니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름에 대하여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름이 당연함을 전제에 두고 부러워할 수도 있고 비웃을 수도 있을 뿐입니다. 김태희 씨와 내가 다르다고 해서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와 내가 다르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이분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워낙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비교해서는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생각과 말과 마음가짐을 드러내시고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이 다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비웃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비웃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해 다름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크와 다름을 느끼듯이 예수님에 대해 다름을 느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와 다를지라도 굳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수십 년을 믿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의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예수님의 탁월한 점으로 치부해버리고 같아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빌 게이츠와 나를 비교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김태희 씨와 나를 비교했을 때에 다른 점을 탁월함으로 인정하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나로서 살아가는 태도는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에게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특별히 훌륭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들로서 마땅하신 상태를 유지하셨을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보다 탁월하신 분이 아니라 정확하신 분이셨습니다. 또 우리보다 넘치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적절하신 상태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의 다름을 비웃음거리로 여겼고, 우리는 예수님과의 다름을 추켜세웁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공통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예수님을 탁월한 분으로 추켜세우며 다를 수밖에 없다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기준이 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기준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과 다름을 인정하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여전히 내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고 내가 예수님과 다름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분으로 추켜세우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보다 열등한 존재임을 운명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을 관계하며 세상을 관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똑같아지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크와 같은 사람들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나의 기준이 될 수 없기에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과의 다름에서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만은 다름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다르다고 여겨진다면 암에 걸린 것처럼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 예수님과 다른 입장을 드러내고 예수님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몸에 암이 발생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 속의 일엽편주에서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의 처지였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제자들을 기준으로 삼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탁월하시고 믿음이 굉장하신 분이시구나!”라고 감탄하며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과 같아지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고자 몸부림치던 제자들의 모습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을 주무신 것은 기준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인생에서 광풍노도가 몰아칠 때마다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편히 잠드는 것이 정상임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예수님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소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소유의 문제에서 예수님과 나의 현격한 다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듣고 비웃은 이유는 13절의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며 비웃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보면서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 느껴지는 다름을 암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을 비웃지는 않으나 나와는 다른 탁월한 분으로만 생각하며 마음으로는 바리새인들처럼 똑같이 돈을 좋아하고자 합니다. 좋아함이란 가지게 되면 마음이 채워져서 기쁘고 만족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소유 개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유 개념에서는 실제로 돈을 가지지 못했어도 마음에서 돈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이미 돈을 소유한 것이었습니다. 돈을 좋아하고 돈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소유의 개념이란 곧 마음 채움을 기대하며 의식에서 붙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형통을 생각한다면 자녀를 소유한 것입니다. 사업을 생각한다면 사업을 소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소유를 다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의식으로 붙잡는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고 희망하고 생각하는 등의 의식하는 일이 바로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서 비웃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동일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섬김을 도구로 삼아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소유를 늘리고 번영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재물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겼기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애초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의심 없이 인정되는 기준이란 세상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애착을 느끼고 생각하고 안 풀리면 걱정하고 잘 풀리면 즐거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누구나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을 마음에 담은 상태를 의심하지 않았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담는 것 자체, 생각하는 것 자체, 의식하는 것 자체가 소유이기에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로 절대로 다가갈 수 없고 하나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의식 안에 품고 애착을 느끼며 생각하고 소유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고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다면 의식으로 소유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우리 또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삶의 문제를 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갑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나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다름을 누구도 문제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에 대해서는 월등하고 탁월한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적어도 종교적 천재성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다름을 바리새인들은 비웃으며 무시하였고, 우리는 예수님이 워낙 뛰어난 분이시기에 따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수님과 다름을 기정사실화하고 무시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탁월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와 스티브 잡스는 같을 수 없음을 당연시하며 살아갑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삶의 태도는 현명합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아지려 한다면 삶은 괴로워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이러한 태도로 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워낙 탁월한 분이라고 생각하여 다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의 다름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름을 이상한 일로 여겨 문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은 곧 예수님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똑같이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어서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란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버리라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소유를 문제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입장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대해왔고 그것을 문제시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많이 갖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지자들의 교훈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셨기에 이러한 섬김이 지속될수록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됨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소유하려면 이 세상 소유를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물의 소유에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고 재물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다면 마음에서 재물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에 재물을 품고 애착을 느끼게 되면 재물을 실제로 얻기 위하여 계획하고 추진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애착을 느끼면서 재물을 얻고자 하듯이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실제로는 재물을 섬기려고 했던 일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키는 것을 선지자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그런 용도라면 폐지되어야 마땅하며, 그 대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과 선지자의 본래 기능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하나님과 나의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측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삶에서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돌이키라는 선지자의 외침이 들려온다면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곧바로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자 경계이며 경고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졌음을 확인했다면 성전의 정신을 따라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늘로 끌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 안에서 세상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마음에 세상을 담은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녀도 실은 마음에서 버려야만 하는 소유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자녀를 버려야 한다면 비웃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비웃을 수는 없으니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예수님이야 워낙 탁월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평범한 어머니는 자녀를 버릴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다름을 무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마음에 자녀를 품은 채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소원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무척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율법이나 선지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소유한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야말로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 것을 소유하고 얻고자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은 본래 율법의 존재의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이지 노력함으로써 애써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과 율법과 산상수훈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또한 율법과 마찬가지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것은 암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악성종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과 동일시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될 때에 나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는 저절로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공생애 때의 예수님과 나를 비교해서 다른 점이 발견된다면 그 이유는 소유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을 의식에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소유할 수 없고 그 결과 예수님과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이혼을 예로 드십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에서 이혼을 허락하였습니다. 아내의 음식솜씨가 맘에 들지 않아도 이혼증서를 써주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만 힐렐 학파와 같이 진보적 성격을 띠었던 바리새인들이 이혼 규정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이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마음 채움이 일어나서 하나님으로 만족한 사람은 애초에 아내에게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지 않기에 음식을 못하든 박색이든 그것이 이혼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을 빈번하게 허락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였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소유하는 악성종양의 상태가 유지되기에 고작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내와 이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마음에 사업을 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이 세상 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문제시하시며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장님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사업을 버릴 수 없다면 아버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탁월하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삶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크와 김태희 씨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나와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달라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과 같아져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예수님과 같아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소유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때 하나님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소유할 때에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질 것이며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삶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삶에서 공생애 때의 예수님이 재현되는 상황을 확인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함으로써 소유의 문제에서 주님과 다르게 나타나는 모든 차이가 소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주님의 공생애의 삶이 나의 삶에서도 재현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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