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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와 걸리는 자_태승철 (누가복음 17장 1절~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30|조회수87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와 걸리는 자>의 줄거리:

이순신 장군에게는 조선을 위한 길이, 정주영씨와 이병철씨에게는 돈의 길이, 조수미씨에게 소프라노 가수의 길이 각각 운명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선민에게는 하늘길이 운명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운명이고 복 된 운명이지요. 그런데 사탄의 한 판 뒤집기가 '하늘길의 실족'을 유도하며 중단 없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와 걸리는 자

(누가복음 17장 1절~4절)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와 걸리는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와 걸리는 자’

본문의 말씀은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가 있고 그 덫에 걸리는 자가 있으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덫을 놓으려고도 하지 말고 놓인 덫에 걸리지도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한 죽는 날까지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늘길은 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한다면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위하는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인이 되신 이병철 씨나 정주영 씨는 돈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수미 씨는 소프라노 가수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마음을 채우는 방법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마음 채움을 위해 살았고, 이병철 씨나 정주영 씨도 마음 채움을 위해 살았고, 조수미 씨도 마음 채움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길, 기업을 일구어 돈을 버는 길, 가수로서의 길을 통해서 마음 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 채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운명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늘길을 간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은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선민의 인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직장에서 나는 승진을 못하고 있는데 동료가 승진을 했습니다. 이제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섭섭함과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선민의 모습이 아닙니다. 스스로 선민임을 자각한다면 승진을 기쁨의 이유로 삼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의 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선민의 운명이자 팔자입니다. 다만 이 팔자가 싫다면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의 형통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자녀가 잘되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없고 자녀가 못되더라도 슬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지게 되면 기뻐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슬퍼하는 것이 선민의 운명이자 팔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기뻐하고 돈이 없으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면 돈과는 무관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고 돈이 없어도 슬퍼할 수 없는 팔자입니다. 기쁨과 슬픔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선민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으면 기쁘고 없으면 슬픈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운명이 싫고 팔자가 싫으면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기쁨과 슬픔의 이유로 삼는다면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실족입니다.

 

우리는 평강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여러분께서는 평강이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마음구조로부터 답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기에 언제나 채워지고자 합니다. 평강의 상태란 이 공백이 채워져서 더 이상 흡입력이 작용하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 크기이기에 운명적으로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선민입니다.

한편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은 부차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앞서 선민이란 하늘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늘길을 간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을 운명이자 팔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늘길을 갈 때 이 땅의 길은 하나님께서 가시게 됩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이 땅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 됩니다.

선민은 땅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민이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갈 때 하나님은 삶이 이루어지는 땅의 길을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내가 사는 것처럼 보이고 삶에서 이루어진 일들 또한 나의 이력이 됩니다.

 

이렇게 선민으로 하늘길을 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실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실족은 소유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일이기에 주님께서는 앞선 비유들에 이어서 소유를 주제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별세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마치 소유의 문제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자 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 소유의 문제를 매듭지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로서 이루실 연쇄사건의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끈질기게 이 문제를 언급하시며 끝장을 보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소유의 문제가 실족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실족이 소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소유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소유는 마음의 소유와 의식의 소유입니다. 마음의 소유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내가 실제로 가진 것들을 아까워함을 통해 소유가 나타나고,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소원을 통해 소유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10억 벌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실제로는 소유하지 못했지만 소원의 형태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실제로는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원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소유란 지정의와 연관된 소유입니다.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생각 속에 돈을 담은 것이기에 소유입니다. 돈이 안 벌려서 기분이 나쁘고 돈을 벌 때 기분이 좋다고 여기는 것은 감정 속에 돈을 소유한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속에 돈을 소유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재료들이 곧 의식의 소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의 소유와 의식의 소유를 버려야 함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소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소유를 버리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 사건이 나 때문에 일어난 죽음의 사건이라는 것을 또한 인정하면 비로소 소유를 버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내가 세상 것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 소유가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실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실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은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는 덫이나 올무를 말합니다. 즉, 실족이란 하늘길을 가는데 놓인 덫이고 그 덫에 걸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여전히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인해서 더는 하나님으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으로 삼는 것을 운명과 팔자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작은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학자들 간의 이견이 있습니다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자가 있다는 것은 큰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크고 작음의 관계성에서 하늘나라를 전하는 자가 큰 자이고 하늘나라에 대해 듣는 자가 작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해석해보자면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늘길을 갈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에게 덫을 놓아서 하늘길로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는 큰 자의 입장입니다. 제가 잘못된 말씀을 전한다면 덫을 놓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께서 잘못된 말씀을 접하고 그대로 하려고 하다 보면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족하게 하고 하늘길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하늘길을 가는 선민들 앞에 덫을 놓고자 하며, 어떤 사람들이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에 대한 답을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앞선 16장 13~14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세상 것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가르치고 전하는 자들이 하늘길에 덫을 놓아 실족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덫에 걸리는 사람들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내 마음의 소유와 의식의 소유가 덫이고 올무이고 지뢰와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를 무척 아끼는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은 마음에 아내를 소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내는 하늘길에서 남편을 실족하게 하는 덫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때에 마음에 아내를 소유하고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할 수 있다고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끼어듭니다. 결국 마음에 아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문제시하지 않게 됨으로써 하늘길을 갈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소유의 문제를 실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시 한 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들이 있고 그로 인해 실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실족해서도 안 되고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방송이나 예배당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에 마음과 의식에서 세상의 소유를 버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내용을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지 않는 목회자라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길에 덫을 놓는 자들이고 실족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진짜 목회자라면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과 의식에서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상태를 깨고 찌르고 타파해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민들 앞에 덫을 놓는 잘못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거나 보내주신 메일을 읽을 때는 탐정이 실마리를 찾듯이 마음과 의식 속에 무엇이 소유되어 있는가를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답변은 어떻게 하든지 마음과 의식 속에 소유되고 있는 것들을 버리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강릉 앞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위한 일일 뿐만 아니라 제가 살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더라도 여러분 마음에 아까워하며 소유하게 된 것들, 소원하느라 소유하게 된 것들,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서 소유하게 된 것들을 귀찮을 정도로 버리라는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제 스스로 덫을 놓는 자가 되는 것이기에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죽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기쁘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자 팔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는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하늘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라면 돈이 잘 벌려서 기뻐하려고 할 때 그 기뻐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반대로 돈이 안 벌려서 슬픔이 생기려고 할 때도 슬퍼하고자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안 벌릴 때는 소원의 형태로 돈을 갖는 것이고, 잘 벌릴 때는 아까움의 형태로 돈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식에서 돈을 소유하였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어야 할 기본입니다. 이 기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한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소유를 버리는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하늘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걸으시는 삶이 살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기본이자 전부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로써 선민들을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하늘길만 있으면 되는 선민들에게 소유를 늘리기 위한 땅의 길을 알려줍니다. 자신들처럼 마음과 의식에 세상의 가치들을 소유한 채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예배당 모임이 어려워졌습니다. 답답한 것은 코로나가 잠들만 하면 다시 발현시키는 모든 단체가 개신교라는 것입니다. 불교도 잠잠하고 가톨릭도 잠잠한데 유독 개신교에서 코로나를 발현시킵니다. 저 또한 개신교에 속한 목사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공해로 느낄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서 정말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합니다. 설교를 듣거나 기독교 서적을 읽을 때도 이것이 내 하늘길에 덫이 될지 도움이 될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7~8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제가 설교를 잘하지는 못해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소유한 나를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날마다 걸어가는 것이 진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육체로 이루어지는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걸어가십니다. 이 진리에 저의 마음과 의식과 말씀의 내용이 묶여있다는 것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는 제 것이 아닙니다. 네 것도 아니고 그의 것도 아니고 그녀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집요하리만치 소유의 문제를 강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와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십자가복음방송을 듣는 분들이라면 누가 덫을 놓는 자인지, 어떤 상태가 덫에 걸려 실족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3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조심하라와 용서하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부연으로 4절을 보면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해달라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요?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또 회개 할 짓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장법을 통하여 용서가 이루어지는 마음상태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남이 나한테 잘못하든 어쩌든 아무 미움이 생기지 않는 마음바탕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라는 것은 단순히 일곱 번은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열 번째 스무 번째가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첫 번째에서 끝나는 것이지 두 번째 잘못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회개는 가짜 회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짜 회개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잘못한 것도 화나는데 가짜 회개를 일곱 번이나 받으면 더욱 화가 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잘못한 것이나 가짜 회개에 대해서나 어떠한 것에든지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생기지 않는 마음바탕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야 스스로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4절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실족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과 의식에서 소유를 버려야만 합니다. 다만 이것이 마음과 의식의 문제이기에 스스로도 소유를 버렸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로 나타나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음과 의식에서 소유를 버렸는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분명해집니다. 정말로 마음과 의식에서 세상의 소유를 버렸다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더라도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행할 수 있는 범위는 나의 소유에 한해서입니다. 소유에는 기본적으로 육체와 재산이 포함될 수 있고 가족이 포함되며 명예와 권력 같은 추상적 개념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몸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에만 해를 끼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몸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내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폭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유한 상태에 대해 해를 끼칠 수 없고 손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하나님을 갖기 위해 하늘길을 가는 사람에게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마음과 의식에서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유를 버려서 하늘길을 운명과 팔자로 받아들여서 평생 동안 원활하게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타인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해도 피해의식이나 손해의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미 내가 마음에서 버린 것들에 대해서 잘못을 하든 말든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과 의식에서 버린 것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버린 것들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잘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용서로 번역된 헬라어 아페시스(ἀφήσεις)는 ‘방출하다, 떠나보내다’라는 뜻입니다. 너에게서 떠나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용서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나의 마음으로부터 몸을 중심으로 한 삶 전체를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식에서 삶을 떠나보냈기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해달라고 일곱 번이나 반복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의 관점에서는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백구십 번의 가짜사과를 받을지라도 떠나보냄으로써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밖으로 탈출한 마음이 되어서 잘못한 사실 자체도 내버려두고, 잘못에 대한 거짓 사과도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내 몸과 연관해서 사람들이 나를 부수려고 하든 무시하든 발로 밟든 밀치든 때리든 내버려두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발끈하고 반응을 보이면 그만큼 세상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스스로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죄 없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몸을 중심으로 한 삶 전체를 떠나보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길을 보았고 실족하지 않고 하늘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교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하더라도 우리의 팔자는 내버려 두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연예인들이 악성댓글을 단 사람들을 고발한다는 뉴스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분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혹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빠져나가서 하늘길을 가면 됩니다. 하늘길을 가는 자들은 절대로 내게 잘못하는 사람으로 인해서 스스로 덫에 걸려 실족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마음의 소유와 의식의 소유를 다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외치는 자들의 덫을 피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덫에 걸리지 않고 하늘길을 왕래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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