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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안쪽이 지구보다 큰 팩트의 의미>의 줄거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경험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하나님 나라가 임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지구의 인간 세상을 하나님은 섭리는 하시지만, 그 세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수용하기에는 인간 세상이 너무 작고 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안쪽이 필요하신 겁니다.
내 안쪽이 지구보다 큰 팩트의 의미
(누가복음 17장 20절~25절)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안쪽이 지구보다 큰 팩트의 의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안쪽이 지구보다 큰 팩트의 의미’
사실이라는 의미를 보다 강하게 전달해보고자 팩트(fact)라는 표현을 사용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20절 하반부에서 21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으로 특정한 지역에 국한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간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그 파장이 퍼져나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희망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절대로 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확인하고 싶다면 너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바깥쪽 즉 인간 세상으로는 절대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구절에서 ‘안에’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헬라어 엔토스(ἐντός)입니다. 엔토스는 “안쪽”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중에(among)”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부에서는 이것을 개인적인 내면이 아닌 바리새인들 무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으로는 ‘바리새인들 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뜻이 되기에 본문의 맥락과 크게 어긋나게 되므로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었기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원천적으로 합당치 않은 해석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매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그 여파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서도 예수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란 무엇일까요?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씀을 항상 인간 세상에 임하는 것을 전제로 이해하셨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이라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섭리하심과의 차원과는 구분됩니다.
섭리의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떨어져 있는 인간 세상을 이끌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섭리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언제나 인격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한 사람과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관계맺음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섭리는 인격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섭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를 포함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임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인간 세상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수용할 만큼의 크기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임하기에는 지구 자체가 너무 작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인간 세상이 하나님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 세상이란 물질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가 되면 우주는 휴지가 물에 녹듯이 녹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수용할 수 없고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을 시간 안으로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아닌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신비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이 마음은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 세상은 너무나 작아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티끌 같은 세상에서 더 티끌 같은 사람이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안으로는 들어오시지 못하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사건으로도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 안으로는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신비한 사실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내 안쪽이 지구보다 큰 팩트의 의미”입니다. 이 팩트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은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은 인간 세상이 아닌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 각자의 마음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게 되면 그 의식과 몸을 통해서 하나님 임함의 여파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사람의 안쪽에서 나타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쪽인 마음에 임합니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함으로 생겨난 파장이 나타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삶에서 티를 나타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인간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직접적으로 임하실 수 없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존재는 인격적 현상이고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의 사건인데 이 사건 안쪽의 상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은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로 지정의 즉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활성화되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셋째로 사지백체 오장육부와 오감으로 이루어진 육체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떼려야 뗄 수 없이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의식을 거쳐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또한 의식을 거쳐 몸에도 영향이 미칩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주조차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사는 동안에 제일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세상에 별의별 사건이 많고, 별의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도 인간 세상 전체가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지구도 우주도 수용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보다 육체의 삶이 중시되고 있으니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팩트만 정확히 알고 있어도 우리가 인생에서 마음 뺏기며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던 대부분의 일은 사소해집니다. 사소하다 못해 존재의미조차 없다고 여겨질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아담 이후 저주의 상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주도 수용할 수 없는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게 된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육체로 마주하는 대상들에게 마음을 쏟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마치 집채만 한 밀가루 반죽을 주먹만 한 그릇 안에 담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우주도 수용 못할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에 시간과 공간의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다 담는 것도 아니고 육체로 접하게 되는 아주 티끌 같은 일들을 마음에 담고 그것으로 채워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결코 마음의 올바른 사용법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던 바리새인들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을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변화에 대한 희망에 묶이고 중독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깥에서 찾지 말고 안쪽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했지만, 인간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애초에 수용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직 인간의 마음 공백에만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앞서 엔토스(ἐντός)를 ‘~중에(among)’로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모임 즉 인간 세상에 임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서 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 나라는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 안에 수용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나타난 여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25절을 보면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의 별세사건을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 담겨 있는 세상의 모든 소유가 없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소유를 담고 있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수용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도 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은 곧 저주가 극복되었고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고 마음 안에 하나님이 수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이 수용되면 결핍감과 부족감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삶의 조건과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수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통해 삶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솥 안에 솥뚜껑을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구원은 기대할 수도 없으며 이룰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삶의 환경이 아닌 마음에 임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은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하게 유지되며 의식과 몸을 통해 여파가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 돈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수 없습니다. 몸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수용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세상을 담고자 희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정작 마음을 붙이고 담고자 하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2~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언급됩니다. 22절을 보면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시간의 기본 단위인 하루라는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24절에서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성립되지 않듯이 공간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재림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이 유지되는 한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시간의 기본 개념인 하루도 사라지고, 번개가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보이듯이 공간의 개념조차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까지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며, 대한민국에 있는 사람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재림을 동시에 볼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깨질 때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앞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 안에 마음이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가둔 채로 살다가 인생이 끝나게 된다면, 시간과 공간이 깨어질 때 세상에 갇혔던 마음도 함께 깨져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때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간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간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이라는 숫자로 인식합니다. 다만 당시에는 시간은 숫자보다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한 날을 유월절로 기념하며 새해의 첫 날로 여겼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이 이때 이미 유월절을 기준으로 날짜를 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 또한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느 때를 물은 것도 이러한 사건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게 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이 기대했던 것이라면 로마 황제의 급사나 반역자들에 의해 헤롯왕이 암살당하는 것이나 로마 군대의 본부가 주둔하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주먹만 한 우박이라도 떨어지는 것 등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징조로 여길 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새해 첫 날이 유월절임을 염두에 두자면 출애굽은 시간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사건입니다. 다만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는 한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강동6주를 되찾았던 서희처럼 담판으로 바로를 설득했던 것도 아니었고,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처럼 정복전쟁을 통하여 출애굽을 이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만 받고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초강대국 애굽이 초토화되고 선민들이 빠져나오는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직접 하지 않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바로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강제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은 이유는 출애굽 사건이 250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세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삼고 있었지만 요셉으로부터 이미 430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거의 남지 않았던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창조주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상황에서 애굽은 너무 좁았습니다. 애굽에서는 선민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수용할 상태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모세를 이끄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 모세는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있는 250만 명의 선민들에게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모세의 마음을 이 땅에 임하시는 공간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납니다. 나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삶의 영역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아내에게 인격적으로 관계하시고 싶으셔서 ‘나’라는 사람의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장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임하셔서 인격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나가시고자 할 때 세상이 너무 좁아서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사건에 하나님이 임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마음에 임하셔서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몸에 연관된 모든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를 수행해 나가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격적 임함은 눈에 보이는 바깥 환경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인격적으로 임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담아야 될 마음에 사소하기 그지없는 세상을 담게 된 마음을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길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나의 마음은 주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밥 짓는 일도 작은 일이 아니게 됩니다. 남북통일도 큰 일이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써 이상하고 신비한 삶이 여러분의 것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지구의 티끌 같은 내가 수용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도 신비한 팩트를 알았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백분 발휘함으로써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