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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활의 달인, 점선 따라가기>의 줄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업적이나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객관적으로 드러날 빛나는 업적이나 성취에 대한 욕망과 부담은 순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우리만의 욕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한 그루 나무입니다. 내 바깥에 무슨 일을 이루려 할 것이 아니라 내게서 나오는 열매에 관심 합시다. 좋은 열매의 달인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생활의 달인, 점선 따라가기
(누가복음 3:7~9)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생활의 달인, 점선 따라가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생활의 달인, 점선 따라가기’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검색을 해보니 찹쌀떡 달인도 있고 메밀국수 달인도 있고 총각김치 달인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을 ‘생활의 달인, 점선 따라가기’라고 정해보았습니다.
9절을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의 인격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과 행동이 좋은 열매가 아니라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처럼 심판이 임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좋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태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좋다고 판단하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이십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말한 좋은 열매란 인간세상의 기준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 보이는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말과 행동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태초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제일 큰 두려움입니다.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여기신 창조 활동을 통하여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열매가 없으면 공허합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를 때에 흑암이 짙게 드리워지게 됩니다. 얽히고설켜서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혼돈이 삶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좋다고 판단하시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8~29절에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좋은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사셨기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든지 나쁜 일이 생기든지 삶의 상황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처해있는 상황이 좋거나 나쁜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러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며 말과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가 아버지인 사람에게 있어서 해고는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고를 당했다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는 상황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열매로 맺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말과 행동을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해고라는 상황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고를 당했음에도 마음에는 질서와 평강이 유지되게 됩니다. 반대로 해고를 면하여 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지라도 하는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수 없는 것이라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는 말씀은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심판이 임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이 나의 말과 행동에 적용될 수 없다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마음이 지배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허전함을 느낄 때에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인가를 얻어서 채워보고자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삶이 나쁜 열매들로 가득 차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도 말할 수 있으며 나쁘게도 말할 수 있는데 선택을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싶다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한자를 연습할 때와 같습니다. 천자문 연습노트를 사면 글자가 점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점선을 따라 연필로 실선을 그려나가며 연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하는 동안에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 말과 행동이 좋은 열매가 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점선으로 배우자에게 해야될 말과 행동을 그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서 배우자에게 말하고 행동하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럴 때에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없어지고 평강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설령 배우자가 악할지라도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안 되고 장사가 안 돼서 돈이 벌리지 않을지라도 그 상황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입장에서 지극히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있든 없든 그 상황에 대해 말과 행동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때에 사업장에서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사라지고 광명과 평강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으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지배를 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점선 따라가기의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마주하고 계십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실 말과 행동을 점선으로 그려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좋은 말과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가며 말하고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드 헴스테터(Shad Helmstetter)라는 심리학자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5~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만 2,500가지의 생각을 하는 셈이고 일 분마다 40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들 중에 우리가 말로 내뱉고 행동으로 옮기는 생각은 몇 가지나 될까요?
또 다른 연구자가 여성의 뇌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하루 평균 여성은 2만 단어를 말하고 남자는 7천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많은 단어들 중에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가는 중에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면 다 나쁜 열매들입니다. 이렇게 수치적으로 놓고 보면 하루에 쏟아내는 나쁜 열매가 얼마나 많은지 체감이 됩니다. 그러니 직장이 있어도 그리고 자녀들이 훌륭히 앞길을 가도 마음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자녀들은 형통한 삶을 사는데도 정작 부모들이 우울증에 걸려서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아이가 없는 상태였기에 이런 자녀를 두고도 우울증에 걸리나 싶어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말기암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기암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수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느끼실 때 문제가 아닌 것은 우리에게도 문제로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기암이라는 상태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무능하고 악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배우자에 대한 나의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배우자를 주셨습니까?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합니까?”라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쁜 열매라면 부부관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배우자가 무능하고 악할지라도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열매라면 어느덧 나의 마음과 부부관계는 광명과 평강의 세계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하고 업적을 남기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건설했다지만 무한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는 그처럼 사소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너무나 대단해서 나에게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이 너무나 사소하기에 나에게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아침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300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만 가지고도 남북통일도 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통일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는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하게 여기시는 것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의 인격을 나무로 비유한 이유는 말과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려놓으신 점선을 얼마나 잘 따라가느냐는 것입니다. 대제국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들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가는 달인으로써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점선의 달인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인격이라는 나무의 열매가 말과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가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며 해야 될 말과 행동을 점선으로 그려놓으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선을 넘어서 나타나는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나쁜 열매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 결과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듯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지배를 받게 되거나 질서와 광명과 평강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삶의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볼 수 없다면 따라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치신 대로 하셨다는 것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먼저 행하신 일을 땅에서 실선으로 그려가야 할 점선이라는 뜻입니다. 점선을 보려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내가 대처해야 되는 상황과 상대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별은 여전히 떠있지만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해가 져서 깜깜해지면 비로소 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 나의 의식이 깜깜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보기 위해서 깜깜해져야 한다는 말이 참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돈이 안 벌려서 월세도 제때 내지 못하는 걱정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상황에 대해 말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월세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좋은 열매로써 내가 해야 될 말과 행동의 점선을 그려놓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돈이 안 벌려 월세를 못 내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열매 맺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대로만 할 수 있다면 삶에는 하나님이 창조 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처럼 평강이 주어지고 기쁨과 감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참 모순되게도 하나님의 점선을 보기 위해서는 돈이 안 벌려 월세를 못내는 상황에 대해 의식이 죽어야만 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을 따라가는 생활의 달인이 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죽음의 단계까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세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눈앞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해 의식이 죽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예고한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대상들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십자가 생활화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삶이 복잡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를 고민하게 하고 대처하기를 요구하는 일들에 대해서 죽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눈앞에 보이는 일과 대상에 대해 내 마음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을 끌어안고 있는 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과 사람들에게 빼앗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찾아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 되기를 원하오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내 마음이 보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에 마음은 정말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의식으로 가득해집니다. 기도하고 눈을 떠보면 내 주변 전체가 하나님의 손길과 주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의식에서 제거해버린 일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고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면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가며 맺히는 좋은 열매들입니다.
좋은 열매 맺기는 점선 따라가기의 달인이 되면 됩니다. 점선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점선을 그려두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죽으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이 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도 보게 됩니다. 상황과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마음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에 대처하고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살 때에 마음에 평강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제가 잊지 못하는 명언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유명한 위인이 한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동일하게 말씀을 들으시는 집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분께서 말씀을 들으시고 연락을 하게 된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 집사님께서 크게 흔들릴 뻔한 사건이 있으셨습니다. 남편이 돈도 못 버는데 외도까지 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남편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부부관계는 깨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분께서 십자가를 생활하는 분임을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이 상황을 대처하실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 이상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는 남편이 예쁘고 안쓰럽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심지어는 남편에게 감사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을 의식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 동안에는 남편이 원망스럽고 괘씸하고 한심하고 모자라게만 보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면 마음에는 사업을 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보느라 사업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사업이 잘 돼도 안 돼도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사업이 잘 되더라도 마음에 담게 되면 사업 때문에 걱정 근심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몸에 병이 났더라도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 병든 몸에 대해서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때문에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빠져들게 됩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해야 될 말과 행동과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점선은 항상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점선을 보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나의 자발적인 말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대상들에게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대상들을 의식하고 관심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를 보게 해주세요. 아버지를 찾게 해주세요. 아버지만 보면 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려놓으신 점선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진정한 의미의 생활의 달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내 마음에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세상이 보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봄으로써 아버지가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 땅에서 실선을 그려가는 점선 따라가기의 달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