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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 (누가복음 18장 1절~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2.10|조회수11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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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의 줄거리:

무신론 유신론, 다양한 종교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기도는 공통적으로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질 일에 대한 의욕과 기대감의 소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한에 사무친 기도를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항상 드려야 할 기도로 제시하십니다. 항상 기쁨과 범사에 감사 대신에 원한에 사무친 기도를 항상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

(누가복음 18장 1절~8절)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

저주 친화적 기도란 저주에 대해서 익숙해하고 편하게 느끼며 저주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기도입니다. 반대로 저주 탈출 기도란 저주를 탈출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드리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7~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대로라면 부르짖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지 못하시고 마음속에 맺힌 원한과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절 하반부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덧붙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밤낮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원한과 간구를 밤낮 부르짖는 것이 믿음이라니 다소 의아한데 이에 더해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니 더욱 의아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이미 다들 그렇게 부르짖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집회 자체가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회 때마다 모여서 부르짖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저주 친화적 기도와 저주 탈출 기도가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저주 탈출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기도에는 항상 성취에 대한 기대와 의욕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을 때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기대감과 성취감과 의욕이 넘칠 때 나타나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기도는 긍정적이고 전진적으로 앞을 향하여 뛰어나가는 형태의 기도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 탈출 기도의 내용입니다.

 

앞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길게 대답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저주의 상태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바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임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는 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임하셔서 내가 처한 환경을 나의 뜻에 맞춰 바꿔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기들이 입는 배냇저고리를 일본의 스모 선수들에게 입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인격으로써의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마음에만 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주란 곧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채우기 위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을 예로 드시며 하나님께서 지독하게 역겨워하시는 상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상태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바로 저주 친화적인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저주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서 간과한다면 하나님께 역겹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주 상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부족감과 결핍감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상의 가치들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저주 친화적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 공백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간구해야만 합니다. 다만 저주의 상태에서는 저주 친화적 기도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필요한 것은 이 저주의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기도가 바로 저주 탈출의 기도입니다.

 

저주 탈출의 기도는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에 가득 찬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이 맺힌 기도이며 원한에 사무친 기도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하여 1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주 탈출의 기도가 끈질기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쉬지 말고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는 바로 원한에 사무친 기도일 수 있어야 합니다. 원한에 사무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항상 한이 맺혀있어야 합니다. 한이 맺혀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한이 맺혀서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바로 원한에 사무쳐서 저주 탈출의 기도가 쉬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맺힌 끊임없는 기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노아의 홍수나 소돔의 멸망 때의 원인으로서 인간의 기본적 행위들이 열거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저주의 상태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역겨워하셨고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문제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지음 받은 마음이 좁디좁은 세상 안에서 채움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저주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 저주의 상태에 한이 맺힐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주의 상태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서 빠져나가고자 발버둥 칠 수 없다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주의 상태에서 탈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믿음인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저주의 상태에 대하여 원한에 사무치는 기도가 항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곧 구하고 찾고 두드림이기에 사실 그 자체로는 강조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채우고자 24시간 흡입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로 기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다만 문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 친화적 기도인가 저주 탈출의 기도인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분함을 통해 저주 친화적 기도의 문제가 무언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주 친화적 기도란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특히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독종교인들에게 큰 문제가 됩니다.

저주 친화적 기도의 시작은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들을 희망하고 소원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것들을 희망과 소원의 형태로 갖게 되면 더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에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과 소원을 실제로 이루어 달라는 간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기가 입는 배냇저고리를 일본의 스모 선수에게 입으라는 것과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거부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삶의 현장에 개입하시기를 요청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내 안에는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야 하니 내 안으로 들어오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희망하고 소원하고 있는 일들이 현실이 되게끔 역사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을 몸종만도 못하게 여기는 기도입니다. 종은 적어도 주인의 집안에서 머물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 친화적 기도는 하나님이 머무실 장소를 박탈하고 하나님을 세상에 내팽개치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세상과 하나님의 크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말씀에서 세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담을 수 없는 좁은 곳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마음이 어떻게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주 친화적 기도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러한 구도와 연관이 있기에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안에서 스스로 충만하게 채워져 계십니다. 한편 우리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러한 인간을 속여서 그 공백을 무한히 축소시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0억을 벌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때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봅니다. 이제 마음은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던 크기에서 10억이라는 돈만큼 좁아지고 수축됩니다. 이제 이 수축된 마음을 채워보고자 실제로 삶에서 돈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10억을 벌게 되었다면 수축되었던 마음은 잠깐동안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조금씩 10억의 크기로 수축되었던 마음은 이완되게 됩니다. 이제 10억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소원과 희망이라는 형태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시 삶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가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는 꿈이 생겨서 그것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잠깐 만족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만족은 사라집니다. 수축된 마음이 좀 더 이완되면서 그 크기만큼의 공허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마음을 채워보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이 되어도 마음은 또 이완되면서 만족이 사라지고 또 다른 공허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소원과 희망이라는 형태로 소유가 이루어짐으로써 마음의 크기는 규정됩니다. 평생을 저주 속에서 되풀이하는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저주 친화적 기도의 문제점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과학적 가설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이기에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이 등장하면 휴지처럼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중에서 현재 가장 신빙성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빅뱅 이론입니다.

우주를 관찰하면 같은 별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어느 부분을 관찰하더라도 서로 멀어지는 것으로부터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주가 팽창하는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면 우주는 계속 수축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필름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우주는 지극히 작은 하나의 점으로 귀착됩니다. 그 작은 점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면서 우주가 생겨났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빅뱅 이론에서 말하는 우주 탄생의 가설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음과 세상의 관계에 접목시켜 봅니다. 세상에서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음을 채우고자 사업을 소원과 희망의 형태로 마음 안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이때 마음에서는 우주 탄생을 거꾸로 돌려보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빅뱅이 바깥으로 폭발하여 커지는 것이라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축소는 굳이 영어로 하면 쉬링크(shrink)를 써서 빅 쉬링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던 마음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사업만큼 쪼그라든 것입니다. 설령 재벌회장의 자리일지라도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마음에 비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마음이 이 세상에서 재벌회장이 되겠다는 소유의 형태를 갖게 되면서 사업이라는 한 점으로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쪼그라든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완전히 펼쳐진 마음으로는 도저히 그 공백에서 오는 결핍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는 진정한 충만이 없습니다. 유쾌함도 없고 쾌적함도 없으며 평강과 자유로움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보다 더 큰마음을 한 점으로 수축시킨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은 항상 긴장해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흔히 기쁜 일이 있으면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꽉 찬 상태에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관계없이 언제나 얼굴에서 빛이 나서 환할 것입니다. 그런데 긴장하는 마음상태에서 살아가기에 스트레스와 피로에 절어버린 얼굴에서는 빛이 날 수가 없습니다.

좋은 남자,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자 마음을 긴장시킵니다. 결혼을 하고도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긴장시킵니다. 일을 잘해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긴장시킵니다. 우주보다 더 큰 마음을 한 점으로 수축시키느라 긴장이 풀어질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기진맥진하게 됩니다. 긴장하고 수축된 마음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진정한 평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세상에 끌어들이려는 저주 친화적 기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편 택하신 자들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매이고 묶이고 갇히는 긴장이 저주임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저주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에 대해 원한이 생기고 한이 맺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택하신 자들은 이 세상 것이 없어서 느끼는 것 자체가 저주임을 알기에 기도 또한 그 상태를 빠져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야말로 저주임을 알고 한이 맺히고 원한에 사무치게 되는 것입니다. 원한이란 곧 원수를 향한 보복심입니다. 원수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그러한 심정이 될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고,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고, 좋은 상대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등의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체질을 원수로 생각합니다. 이 체질이라는 원수 때문에 마음에 한이 맺히고 응어리가 져서 미칠 지경이 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벌기를 바랄 수가 있느냐? 이토록 커다란 마음을 어떻게 건강으로 채워서 만족하기를 바랄 수 있느냐? 어떻게 세상에서 형통함으로 채워지기를 바랄 수 있느냐?”라는 생각을 하며 이러한 체질에 대해 원한을 갖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게 억울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택하신 자들이 갖는 원한입니다.

 

세상 것을 희망하고 소원하는 체질을 원수로 느끼는 자들의 기도는 저주 탈출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항상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 곧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려운 이유는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이 생기는 죄악 된 체질을 원수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원수로 여기기에 앞서 세상을 좋아하는 나의 체질을 원수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원수는 나를 저주에 묶이게 하고 저주 친화적으로 만드는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체질입니다. 이 체질에 대해 한이 맺히고 응어리가 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의 한 과부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재판관은 악독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악독한 재판관마저 두 손 들게 한 과부의 끈질김을 강조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한이 맺힌 응어리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저주 친화적인 체질에 대해 한이 맺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믿음이란 저주 탈출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체질에 대해 한이 맺혀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세상 것들로 채우고자 하는 체질에 한이 맺혔다면 십자가에서 원수의 체질을 죽임으로써 한을 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항상 한이 맺힌 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이 물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본 17장에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을 말씀하시기 전에 25절에서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한이 맺힌 마음으로 항상 끈질기게 드려야 될 기도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틈만 있으면 세상 것을 바라고,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원수 같은 체질이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나의 진짜 원수는 나를 때리는 자도 아니고 나의 돈을 훔쳐간 자도 아닙니다. 세상 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체질이야말로 진짜 원수 중의 원수임을 알았습니다. 이 원수에 맺힌 한이 응어리가 졌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원수의 체질이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한 맺힌 응어리가 풀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저주의 상태에 대하여 한이 맺혀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를 십자가 생활화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체질을 원수로 여기며 한이 맺힐 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사건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한 맺힘이 유지되어야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영화로운 하나님을 뵙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복지의 기초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나의 체질에 대한 한 맺힘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을 마음에 담고자 하는 나의 체질에 대해 한이 맺히고 원한이 사무칩니다. 이 응어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함께 나의 체질이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이 응어리가 풀리게 하시고 한이 풀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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