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2

녹취문: 세상 적응을 잘하는 사람의 문제_태승철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2.11|조회수177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적응을 잘하는 사람의 문제>의 줄거리: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몸의 오감으로 만나는 이 세상을 좋아하는 나의 인격적 체질은 내 마음을 이 세상에 잡아 가두어 인질로 삼는 납치범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체질에 대하여 한 맺힘이 없이 내 마음의 인질범인 이 체질에 순응하는 삶의 문제점을 들여다 봅니다.

 

세상 적응을 잘하는 사람의 문제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적응을 잘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적응을 잘하는 사람의 문제’

오늘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양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로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잘하고 훌륭하고 보람되게 사는 플러스 쪽의 극단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못살고 실패하고 낙오자가 된 마이너스 쪽의 극단에는 세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극과 극이 비교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로 삼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14절의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섭렵해오면서 예수님께서 반전을 좋아하신다는 느낌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전을 좋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과는 너무나 반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방증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를 물이 흘러가듯이 하고 계실 뿐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반전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예수님과는 거꾸로 되어있다는 것의 증명인 셈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끈질기게 매달리는 과부의 비유를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한 과부를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택함 받은 선민들의 원한이란 저주 친화적 체질에 대한 한 맺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저주탈출을 위한 기도를 낙심하지 말고 중단 없이 해나갈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이 한 맺힌 기도는 이 세상 것을 좋아해서 세상에 갇히게 되고 머물게 되는 인격적 체질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인격적 체질을 원수로 삼고 한이 맺힐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이러한 한 맺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영적 상태란 쉽게 말해 속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한 맺힘이 없다는 것은 원수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에 잘 적응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오류가 발생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마치 영적인 스톡홀름증후군에 걸린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스톡홀름증후군을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질로 잡아서 위험에 처하게 하고 극도의 공포에 몰아넣는 범인에 대해서는 한이 맺히고 원한이 사무쳐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인질범과 함께하는 동안 공감하여 그들에게 동조하고 좋아하게 된 것이 스톡홀름증후군입니다.

이러한 일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세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자 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의 체질은 나의 마음을 세상에 잡아두려는 인질범입니다. 이 인질범에 의해서 세상에 갇혀있고 묶여있는 상태를 당연시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인격적 체질에 동조해서 이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인 스톡홀름증후군에 걸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묶인 사람들은 세상 것을 많이 가질 때에 그 위에 올라서서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야말로 높아지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갖는 경쟁에서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이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높아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올라설 발판이 없어서 낮아졌고, 세상의 가치를 긁어모으는 경쟁에서 낙오자이며 실패자가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게 된다니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민으로 의인의 대표로 여겨지는 자들이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선민 자격을 박탈당하고 구원이 취소된 죄인의 대표로 자타가 공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하심으로써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은 인생이라는 판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인생의 판에서 인질범이란 바로 육체의 오감을 통해 파악하는 세상을 마음에서도 좋아하고자 하는 체질입니다. 나의 체질이라는 인질범이 나의 마음을 인질로 삼고 있는 상태가 바로 세상입니다. 이 판 자체가 인질극이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판이기 때문에 이 판에서 잘되면 잘될수록 잘못됨은 커지고 깊어집니다. 잘못된 판이기에 잘못되는 것이야말로 그나마 낫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9절에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기록하며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비유의 초점이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들에게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세리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의 문제점을 들추어내고 계십니다.

선민들에게 있어서 의롭다는 확신이란 곧 나의 행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의로움에 대한 확신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래 의로움에 대한 확신이란 세상 안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모른 채 의로움의 확신을 세상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는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위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 있다면 그가 하는 잃은 옳고 그 자신도 옳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 안에 머문 상태에서는 옳게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과 행동이 율법의 기준에 맞아떨어지고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었으며 선민이라는 단체의 기준에 부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옳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순응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인질범이 일으킨 범죄에 순응하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겉으로는 옳게 보일지라도 무조건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 흠이 없는 길을 따라 재벌총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는 이 사람을 훌륭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자면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순응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무조건 잘못된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세상에 순응하고 있는 상태라면 무조건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마음이 세상에 순응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옳고 그름은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무엇을 이루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이란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갔다면 옳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시며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인간에게 옳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 마음을 다하여 사랑함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기준이 됩니다. 이 옳음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은 반드시 세상 바깥으로 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당장 그렇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 과정에 속하여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무조건 잘못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를 드러냅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토색(討索)은 강권적으로 억압하여 타인의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불의와 간음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였든 그렇게 하지 않았든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사로잡힌 상태라면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그중 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반성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 바로 본문의 요지입니다.

우리가 옳을 수 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되셨어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중단된 적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채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늘이십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옳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옳을 수 있는 길은 도덕적 윤리적 기준에서 흠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오신 하늘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때 우리는 옳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을 향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옳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 땅에 머물러 있다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악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 더 악한 이유는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붙잡혀 갇혀있으면서도 그 인질범에게 동조하며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윤리적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해도 옳은 일이 된다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가정입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는 사람에게서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보면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명령형의 말씀들은 이러한 잘못된 행동이 나오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만들라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명령형의 내용대로 문자를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세상에서 마음을 탈출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의롭고 옳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면 무슨 수를 써도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마음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면 무슨 수를 써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의로워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았다면 곧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옳다고 여기시고,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움과 구원의 의미가 이러하기에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에 붙잡혀서 갇혀있으면 의로움도 구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니다. 연인들이 한창 사랑할 때에 “나 잡아봐라”는 놀이를 할 때가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놀이지만 이 놀이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영적인 측면에 대입시켜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친구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나 잡아봐라”하고 뛰어갑니다. 이것을 굳이 해석해보자면 “우리의 거리가 떨어진 이 상태를 참을 수 없음을 보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붙어있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이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서 게임을 한다면 어떨까요? 여자는 무척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여자가 바란 것은 남자친구가 자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거리를 좁혀주는 것입니다. 그때 연인으로서 기쁨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셨고 당신의 이름을 입에 넣어주시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리를 향해 “나 잡아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체 누구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땅을 빠져나와 하늘로 달려오는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에 당시의 선민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탁월하다는 바리새인들을 위시해서 모든 선민들이 “나 잡아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세상을 뛰쳐나와서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선민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선민들은 오히려 인질범에 동조하는 인질처럼 되어서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에 마음이 붙잡혀 있었습니다. 세상에 순응하며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이리 오세요”라고 세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이미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려고 해도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도록 ‘나’라는 현상 밖으로 쫓아낸 뒤에, 하나님을 세상으로 내려오시게 해서 희망을 이루어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실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못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옳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상 좋아하는 체질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태를 한이 맺혀 있을 수 없음에서 시작된 문제입니다. 인질범을 원수로 여겨야 하는데 인질범에게 순응해버린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 작동하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선민임을 자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땅으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큰 문제가 됩니다. 오래전에 본 “타짜”라는 영화가 떠오릅니다. 화투치는 일에 고수가 된 사람들이 타짜입니다. 영화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기에 내용이 좀 틀리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내용 중에 팔도의 타짜들이 모여서 놀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속임수를 쓰다 걸리면 손목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타짜는 화투판에서 속임수를 잘 쓰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타짜들의 놀음이라는 것은 속임수를 얼마든지 써도 되는 대회입니다. 단 속임수를 쓰되 걸리지는 않아야 됩니다. 속임수를 잘 써서 타짜가 되면 전국에 이름을 날리고 화투꾼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속임수를 쓰다 걸리면 그 자리에서 손목이 잘립니다.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화투에 소모했기에 각 도에서 최고라는 타짜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애초에 이들이 하는 짓이 불법 도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대회에 참가한 모든 타짜들의 손목을 잘라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그 대회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도 규정을 지킨 자와 어긴 자가 나누어집니다. 속임수를 쓰는 것도 괜찮은데 걸리면 안 되는 것이 규정입니다. 불법 도박판에서 의로운 사람은 속임수를 써도 안 걸린 사람이고, 불의한 사람은 속임수를 쓰다 걸린 사람입니다. 악한 짓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불의하게 여겨지는 사람만이 손목이 잘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악에서 떠나고 싶다면 도박판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도박판에 머물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속임수를 잘 써서 1등을 했어도 그것은 결국 악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한편 세리는 화투를 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진작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포기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화투판이라는 경쟁에서는 낙오자가 되고 실패자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투판에서 흥한 사람과 화투판을 벗어난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의로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판이 마치 도박판과 같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도박판에서 타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박꾼들이 모여 있는 화투판에서 타짜로 올라선 것은 칭찬받을 거리가 아닙니다. 마음은 애초에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공백의 마음은 애초에 세상으로는 채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가지고 결혼을 해서 행복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손목을 잘라야 하는 도박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혼을 해서 행복하려고 한다면 마음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행복하고자 하여도 마음의 손목은 잘라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은 결코 결혼으로도 돈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상형과 결혼을 하고 돈을 벌게 되었다면 도박판에서 잘나가는 타짜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걸리지 않는 속임수를 잘 쓰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나의 마음을 잘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마피아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피아는 범죄 집단이지만 그 안에서도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충성파가 있고 배신자가 있습니다. 마피아 집단에서 의롭게 여겨지는 자들은 보스에게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의로움이란 결국 보스의 뜻을 따라 도박, 마약, 성매매, 밀수, 돈세탁 등의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판이 마피아 조직과 다름없습니다. 정말로 의롭게 살고 싶다면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나오면 됩니다. 마피아 조직 안에서 정해놓은 규칙을 잘 지킴으로써 의롭다 여겨지고 승승장구하는 것은 결코 진짜 의로움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피아 조직에서 인정받기를 바라서 들어갔다가 하는 짓이 바보 같아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의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마피아에 남아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잘 된 것입니까? 아니면 마피아에서 쫓겨난 사람이 잘 된 것입니까? 본문의 비유에서 바리새인들은 바로 마피아의 조직원으로 승승장구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고, 세리는 바보 같아서 마피아 조직에서 쫓겨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붙잡힌 사람들끼리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은 인질범에게 동조하여 범죄를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마피아 집단에 들어가서 보스가 되었다고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도박판에서 타짜가 되었다고 부모님 앞에 와서 자랑을 하여도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고 싶다면 범죄 조직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범죄 조직 안에서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켜서 의롭게 여겨지고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깡패집단이고 도박판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인질범에게 붙잡힌 인질입니다. 스톡홀름증후군에 걸려서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판에 있는 것입니다. 이 판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옳음도 없고 의로움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렇게 붙잡힌 마음으로는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행해도 옳음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구원도 의도 옳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인질범에게 붙잡힌 상태에 잘 순응하는 삶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1등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계시다면 만입이 있어도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순응하며 잘 나가고 계신다면 큰일 났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들을 마음에서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에 한이 맺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속에 있는 내 마음의 인질범과 전투를 위한 선전포고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무기삼아 인질범의 사슬을 끊고 반드시 세상 밖으로 나가 아버지께서 오늘도 “나 잡아봐라”하시며 손꼽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