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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동은 하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의 줄거리:
절대 진리처럼 통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행동하라"는 구호입니다. 이루려면, 얻으려면, 도달하려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자에게 승리가 주어지는 법이라고 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도 영생도 없애는 참으로 무서운 착각입니다. 본래 행동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행동은 하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18절~27절)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행동은 하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행동은 하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본문 말씀의 주제는 18절 관리의 질문과 27절의 예수님의 답변을 연결시켜 보면 분명해집니다. “사람으로서는 무엇을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영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관리로 언급하고 있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과 예수님의 별세를 연결시키며 영생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락별로 주제를 삼을 수 있을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18절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담겨있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선민의 기준에서 부자 청년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관리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을 정도의 바리새인이었지만 본문의 부자 청년 또한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공언하는 점에서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큰 부자라 기록된 대로 재물이 많았습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부유함은 곧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청년은 선민의 규정대로 대여섯 살 때부터 율법을 외우게 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잘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부유하기까지 했으니 흠잡을 곳 없는 선민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완벽한 선민이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더욱 기특한 것은 영생에 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청년은 부유한 관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이고 세상적인 유복함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음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 영생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 저에게 와서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 “태 목사님! 너무 훌륭하십니다.”라고 했다면 저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은 당연하지만 그 아들이신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면 대체 누가 선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선하셨고 죄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로 사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심을 통해 인간의 행동이 무엇이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는 사람을 향해서는 선하다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만이 선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질문을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지도록 다시 번역해보자면 “…내가 어떤 행위를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행위는 인생을 형통하게 하고 영생을 위한 열쇠가 된다고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침만 분명하다면 행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 청년에게 있어서 문제였던 것은 영생에 대한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행했다고 확신하면서도 새로운 지침을 바랐던 이유는 율법을 행함과 영생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년에게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영생의 증거가 다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고 젊은 나이에 관리가 되었으며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지도자층에 통용되던 기준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받았다는 증거는 충분하였지만 이 청년은 내면의 영생에 대한 체감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재물의 많음과 사회적 존경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것으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기존의 기준을 모두 충족시켰음에도 내면에 평강도 만족도 없음을 느꼈기에 행동의 달인으로서 영생을 위한 새로운 기준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청년은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행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기존의 랍비들과는 달랐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행동을 보며 예수님은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신비함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영생에 대해 질문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청년은 비록 젊지만 행동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지침만 분명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청년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영생을 얻은 자의 증거가 재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 재물의 포기였습니다. 이 청년은 지금까지 자신이 재물을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실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청년은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게 됩니다.
청년은 행위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재물을 다 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행위는 좌절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실 재물을 다 판다고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을 팔아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팔아서 구제를 할 수 있을 정도라면 굳이 예수님을 따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제자들의 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청년은 가진 재물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들키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재물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을 소원의 형태로 가진 채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까지는 어떤 소유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께서 청년에게만 이러한 말씀을 해주신 이유는 청년이 스스로 행위의 달인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위에 자신이 있다면 내가 말하는 것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라면 예수님을 따르고 난 뒤에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가진 행위에 대한 자신감을 염두에 두셨기에 먼저 재물을 팔라고 순서를 바꾸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의 포기라는 행위에 실패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신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은 행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보시고 선함의 기준을 달리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스스로를 행위로 판단하였듯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행위를 통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행위로 훌륭함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로 인한 판단에서 비롯된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거절하십니다. 이 속에 담긴 의미는 행동은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자체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재물을 얻었고 관리가 되었기에 영생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 행동 자체가 악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인위적이고 의도적입니다. 모든 행동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얻고자 하는 것은 곧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는 대상이 생기게 되면 실제로 얻고자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되기에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고 이루고 손에 넣고 도달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은 그 자체로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거절한 이유 또한 이런 식의 얻고 이루고 손에 넣고 도달하고자 하는 행동을 해보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하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선함을 발견하고자 했던 청년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셨던 예수님을 선한 행동의 주체로 보았기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행동하는 주체로써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하신 이유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선함의 주체가 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사시며 스스로 행동해보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아버지의 행하심이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스스로 주체가 돼서 하신 행동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행동과 실천과 행위의 달인임을 주장하였던 청년의 생각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청년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젊어서 관리가 되었고 재물을 모아 큰 부자가 되었으며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선민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행동이 남달랐던 예수님께 찾아와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차마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어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찾아왔으나 예수님의 대답은 청년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청년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행동의 주체로써 사셨던 적이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이 선하시기에 예수님도 선하실 수 있으셨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청년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타날 수 없는 행동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봅니다.”라고 말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박수를 치시며 엄청난 믿음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 행동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행동의 결과에서 선함과 악함을 구분하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결과 이전에 행동의 동기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2021년 2월 14일 오늘도 이 지구 위에서 75억 명이 넘는 인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75억 명이 각자 주체가 되어서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모습이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75억 명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동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다섯 명이라면 오늘도 한 집안에서 다섯 주체가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았다면 다섯 행동이 나타나지만 오직 하나님의 주체만이 존재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신 상태에서 엄마에게는 엄마다운 행동이 나타나고, 아빠에게서는 아빠로서의 행동이 나타나고, 자녀들에게서는 자녀로서의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타락하여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 자체가 악한 이유입니다. 이처럼 행동에 대한 근본적 오해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인생은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영생 또한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행동하는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생과 영생에서 제외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스스로 사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림 그려 놓으신 인생과 영생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이해도 못할 정신병자 같은 말이 어디 있나 싶지요? 그러나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고 행동이 흘러나오는 샘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의 질문에 대해 20절에 대답하시기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에 인간에 대한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21절에서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앞부분을 빼놓으시고 뒷부분을 언급하신 것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얻으려 하고 이루려 하고 도달하려고 하는 행위를 본질적인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얻고 싶으면 행동하라. 이루고 싶으면 실천하라.”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에 대한 계명들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십계명 본래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이것은 말씀하실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첫째 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은 곧 좋아해서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즉, 첫째 계명은 마음의 충만함을 위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마음 안에는 하나님만이 계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재물이 들어와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붙잡으면 나머지 모든 계명들은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샘물이 흘러나오듯이 하나님이 계신 마음에서 행동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기에 선함을 행동의 결과에서 찾고자 하는 청년의 말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행동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선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마음속에 소유하고 계신 상태이셨고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계명을 다 지켰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가진 상태에서 흘러나온 결과가 아니었기에 실은 하나도 지키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모든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은 선할 수 없습니다. 설령 행동의 목적이 영생에 있을지라도 내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인위적 행동이라면 악한 것입니다.
또한 애초에 청년이 기대했던 영생의 개념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영생은 곧 영원하신 하나님을 마음이 소유한 상태입니다. 영원토록 천국에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 재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재물을 비롯하여 영원할 수 없는 대상들을 마음에 담고서는 영생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영생을 버렸으면서 영생을 얻겠다고 행동의 지침을 달라는 청년의 바람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시고자 청년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재물이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업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또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취직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행동을 실천합니다. 사업을 잘하고 싶어 하는 것도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것도 궁극적인 이유는 마음의 채워짐에 대한 기대입니다. 마음 채움을 목표로 삼고 행동을 통해 거리를 없애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절대 진리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한다고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모든 꿈과 비전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얻고 도달하고 가지려면 행동하고 실천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청년을 통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영생과 무관하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생을 잃어버리게 하는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주체로써 살아서는 안 됩니다. 행동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상태에서 옹달샘의 샘물이 솟듯이 흘러나오는 것이지,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목적지향적인 동기에서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고 실천하고 계시다면 그 내용이 선하거나 악함을 평가하기 이전에 행동 자체가 악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행동하며 살아왔습니다. 행동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도 봉사하라 충성하라 구제하라며 행동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행동과 관련된 모든 명령형의 말씀들에 인위적으로 행동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행해지는가를 확인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그것은 지켜야 할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담을 때에 살인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지, 살인하고 싶은데 인위적으로 참아서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시점에서 이미 살인한 것과 똑같은 일이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간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간음이 일어난 것은 똑같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계시다면 살인도 간음도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청년의 질문은 그 자체로 틀린 것입니다. 행동이라는 단어와 영생이라는 단어를 굳이 한 문장 안에 넣는다면 “영생을 얻으면 어떤 행동이 나오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동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행동하지 않고도 영생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영생은 죽은 다음에 얻는 것도 아니고 행동을 통해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은 행동 이전에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영생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예수님 따름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것입니다만 간략하게 다루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공생애 때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진정한 따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들 또한 부자 청년과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이미 가진 것을 아까워함으로써 마음에서 소유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을 소원의 형태로 마음에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소유를 위해 예수님을 앞세우는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있었던 것은 청년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의 진짜 예수 따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예수 따름 또한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개혁을 주장하고 잘못된 정부를 향하여 데모를 하는 것은 예수 따름이 아닙니다. 오지에 나가서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 또한 예수 따름은 아닙니다. 결코 행동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행동이 나타나기 이전에 마음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자니 마음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세상을 소유함이 없어져야만 되기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영생을 얻기 전에, 구원을 얻기 전에, 마음의 완전한 충만을 얻기 전에 행동이 개입된다면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악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 청년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 또한 부자 청년과 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아까움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고, 제자들은 재물을 소원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마음은 이미 똑같이 세상에 대해 부자인 상태였습니다. 청년과 제자들이 달랐던 점은 청년은 스스로 주체가 될 자신이 있었던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근거로 삼아 주체가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동하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모든 선한 행동은 옹달샘에서 샘이 솟는 것처럼 흘러나오게 됩니다. 혹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한 선생이라 부르는 날이 온다면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나의 모든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뒤로는 한 번도 이 세상에서 행동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예수님처럼 말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영생 없이 빈 마음을 세상에서 얻어 채우려고 행동하는 악행을 멈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동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영생을 얻어서 모든 행동이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로부터 행동의 옹달샘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