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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_태승철 (누가복음 3:21~3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9.07|조회수115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의 줄거리: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 안으로 올라타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방주나 배가 물 위에 떠야 한다는 근본적인 상식과는 달리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탄 나를 끌고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배이십니다. 가라앉는 목적은 점선 그리기의 달인인 나를 죽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

(누가복음 3:21~38)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

본문 23절 이후로는 예수님의 족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42명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에는 무척 자세하게 77명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가라앉는 배에 올라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라앉는 배임을 알고도 올라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라앉아서 죽고자 하는 사람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죽음을 가장 급하고 강하게 소원하는 사람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는 잘못된 개념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의 방주이십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올라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올라탄 사람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할 대상은 교회 자체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올라탈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정의를 아무리 내려 봐야 실제로 예수님께 올라탈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교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앉는 배라는 말은 낯선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올라타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물속에 가라앉아 죽기 위해서라는 표현은 더욱 낯섭니다. 다만 이러한 표현들은 그동안 도외시되어 왔을 뿐 성경 속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써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오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세례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죄인도 아닌 예수님께서 대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필요한 마음가짐은 저주와 죄악에 찌든 나는 죽어야만 한다는 결단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준비의 핵심 내용은 바로 자가진단입니다. 스스로 몸의 병을 진단하듯이 세례를 통하여 마음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 때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악과 저주라는 병에 걸려있다는 자가진단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죽어야함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은 복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이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스스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이 이것을 일깨우며 준비하는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핵심은 자가진단입니다. 7절을 보면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선민들의 악함을 비난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지 말고 독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임을 인정할 때에만 나의 인격을 죽이고자 하는 결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의미는 이러한 자가진단을 통해 스스로를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돈을 많이 벌거나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혹은 가족의 형통 같은 것들을 소원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나 자신이 빨리 죽는 것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역이고 물세례의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지 않고 공생애를 사셨다 한들 문제가 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세례란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하였다가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다시 올리는 것은 부활 즉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례의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과 저주에 찌들어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 따라가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졌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마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생기면 자살을 할 정도로 삶을 거부하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심을 통해 창조의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계속되는 창조에는 사람을 참여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사라지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시기에 그 창조의 모습을 점선으로 그려두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고 마음에 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점선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삶에 돈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돈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고 하나님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돈 문제에 대해 그려두신 점선을 실선으로 그려가며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시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선을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 후에 나타난 일들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실선으로 바꾸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바람직하다 여겨지는 점선을 그려두고 그대로 살고자 합니다. 점선을 실선으로 옮기기 위하여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은행에 가서 빚을 내기도 하고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를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도저히 안 될 때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 그린 점선을 실선으로 바꿀 힘을 요청합니다. 점선을 따라가는 달인이 되는 대신에 스스로 점선을 그리는 달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죄악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려놓은 점선을 하나님께서 실선으로 바꿔주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은 아주 악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고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가짐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악이 자행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선민이었음에도 스스로를 독사의 자식으로 여기며 죽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점선을 그려가는 달인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핵심 속성이기도 합니다. 내가 점선을 그리면 절대자 신이 실선을 그려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담기 위한 거대한 공간이시고 통이시고 방주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께서 통째로 물에 빠져 죽음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사람의 마음을 태워서 죽일 수 있는 길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로써의 구원의 방주이십니다.

우리는 점선 그리기의 달인들이 된 상태에서 많은 세월을 예수를 믿는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오직 점선을 따라서 실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린 점선에 하나님께서 실선을 그려주시기를 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대로 독사의 자식으로 산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독사의 자식임을 자가진단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이시며 죽음을 향해 내려가시는 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소원하고 문제나 상황에 대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동안에는 삶의 주체가 된 것이고 점선을 그리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나에게 실망과 좌절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강력한 소원이 된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앉는 배이십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가라앉는 배에서 도망칠 것입니다. 오직 죽고자 하는 사람만 가라앉는 배에 올라탑니다. 죄악과 저주에 찌들어서 이 세상의 삶을 향하여 점선을 그리고자 하는 나에게 좌절하고 나 자신이 미워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속성을 죽이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가라앉고 죽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인격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유일한 공간이셨습니다. 교인은 몸이 예배당에 모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가라앉아 죽음으로 내려가시는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보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23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마음을 두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점선 그리기의 달인으로써 살아가던 나는 죽게 됩니다.

점선 그리기의 달인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삶에서 실현되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점선만 그릴 뿐 평생을 살고 뒤를 돌아봐도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점선의 달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점선을 그리는 삶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점선을 그리는 달인들입니다. 반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 있으나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을 따라가는 달인들입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같으나 기쁨의 내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13절에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기쁨은 세상에 없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속성자체를 죽여야만 합니다. 그 속성이 무엇인지는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나오는 답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하기를 소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부흥과 예배당 건축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소원으로 삼는다면 아직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소원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기뻐해서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만 합니다. 다만 그 대상이 세상 밖에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22절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같이 가라앉아 죽었음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천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놀랍습니다. 말씀이 은혜로워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어려워하시고 못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놀랍니다. 하늘로 가야된다는 생각, 하나님과 직면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못하십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최근에 두 목사님과 어떤 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각각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약속이라도 하신 것처럼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의 저서를 읽으셨다고 합니다. 이분들과 지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혜는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주어지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의 저자와의 연결을 뜻합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저자와 연결이 되고 그 생각이 내게도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의 저서는 주로 교회론에 집중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생활을 강하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로는 그러한 내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단지 돈이나 건강 혹은 권력 같은 추구할만한 가치들에 대해서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마틴 루터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존 캘빈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요한 웨슬레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C. S. 루이스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프랭크 바이올라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가라앉는 배이신 예수님께 올라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와 연결된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달려가는 외통수 길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사람이 캘빈의 사상을 운운한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직면하는 외통수의 길을 가지 않고 외통수의 길에 놓여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캘빈이든 루터든 끼어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릭 워렌(Rick Warren)목적이 이끄는 삶이 한국의 교계를 뒤덮었을 때에 저는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목자가 이끄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외통수의 길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으로 삶의 현장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방송에 대해서도 죽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에서 아침마다 말씀을 전하는 목적은 여러분을 십자가까지 거듭하여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부활과 승천과 우편까지의 통로를 진리라고 믿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라앉는 배이신 주님께 마음이 올라타면 루터의 사상이나 캘빈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직면하는 외통수의 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다시 보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내용은 요한복음 1723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이 사랑입니다.

스스로 점선을 그려가는 내가 싫어서 죽기를 소원하는 자들은 예수님이라는 가라앉는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로 뻗어있는 외통수 길을 예수님께서 내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시는 우편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나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기쁨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22절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느끼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언급되었습니다. 한편 앞서 본 것처럼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기쁨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직면하는 외통수 길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울 것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교황도 루터도 캘빈도 저명한 저자들도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요새 학생들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비대면 강의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대면하는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굉장히 낯설어하고 어렵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루터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함부로 논문을 쓸 수도 없습니다. 이미 엄청난 연구가 되어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잘못 썼다가는 지도교수들에 의해 가차 없이 잘리게 됩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에 대단히 뛰어난 선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분 중에 공부를 가장 잘한다는 목사님이 루터를 연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조차도 논문을 못 마치고 귀국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루터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루터에 대해서도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까지 가는 길에 도움을 받기 위해 루터를 인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직통으로 연결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일에 결코 루터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열리는데 땅에 있는 사람들의 담론에 열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타납니다. 이 족보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이를 두고 마리아의 족보가 언급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23절을 보면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언급되고, 요셉의 아버지로 헬리라는 인물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기록되었기에, 이 헬리라는 인물은 마리아의 아버지로써 요셉에게는 장인에 해당됩니다.

누가가 이러한 기록을 한 이유는 창세기 315절에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계속 올라가서 아브라함에 이르고 이윽고 아담까지 가서 하나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길이 하나님께로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족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다만 그 아담은 온 인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아담 안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있었으며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나 일본의 아베 총리도 들어있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들어있었습니다. 저나 여러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태어날 아기까지를 포함한 존재가 아담입니다. 이 아담은 앞으로 태어날 인류를 담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기쁨의 땅인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인류가 기쁨이 없는 곳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저주와 죄악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기쁨을 찾고자 점선을 그리는 달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돈을 벌면 기쁘지 않을까, 건강하면 기쁘지 않을까, 형통하면 기쁘지 않을까 싶어서 기쁨의 점선을 그려갑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내가 그린 점선을 실선으로 바꿔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누가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제시한 이유는 바로 아담으로부터 나온 타락과 저주에 찌든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이렇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라앉는 배이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시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영원한 기쁨 속에 살아가는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가는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계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셨듯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이 기쁨 가운데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실선으로 그리며 말하고 행동할 때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됨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가라앉는 배이신 예수님 안으로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통과하게 하시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늘로 뻗어있는 외통수 길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을 실선으로 그리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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