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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성전방식 기도는 이 세상 철수 작전_태승철 (누가복음 19장 45절~4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2.25|조회수8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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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전방식 기도는 이세상 철수작전>의 줄거리:

철수(撤收)란 "진출하였던 곳에서 물러남"입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가이드라인을 성전방식으로 한정한다는 뜻이지요. 성전방식을 제대로 따라서 기도하면 모든 기도는 마음이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진출해 있던 하나님 이외의 모든 대상으로부터 철수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 철수와 피난이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승리입니다.

 

성전방식 기도는 이 세상 철수 작전

(누가복음 19장 45절~48절)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전방식 기도는 이 세상 철수 작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전방식 기도는 이 세상 철수 작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시간을 기점으로 해서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 기대했습니다. 일제치하의 대한민국을 독립시키듯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실 것이며, 이방민족위에 우뚝 서게 하여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다시 이루어내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을 예고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다르게 이 사건 뒤에 성전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의 취지와 존재의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남은 기간 동안 계속해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통하여 성전은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의 취지와 존재의미는 예수님께 흡수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없어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후에 며칠이 지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없어지게 될 성전의 의미를 다 흡수하셔서 그리스도 연쇄 사건으로 이어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사건은 성전의 의미를 완성시킨 영원한 업그레이드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생활화는 성전 생활화의 완성판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은 성전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민들은 성전을 생활화한다는 것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목을 “성전방식 기도는 이 세상 철수 작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전 생활화는 곧 성전방식대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전 생활화는 성전방식대로의 기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마음을 철수시키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성전 생활화를 하지 못했기에 멸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생활화는 이러한 성전 생활화의 영원한 업그레이드판입니다.

 

요즘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을 만나고 십자가온라인교회를 진행하면서 실제로 생활 속에서 십자가를 적용하고 있는 성도님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을 하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삶에 적용할 수 없다면 십자가 생활화의 취지는 버려지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삶에서 떠나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감시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십자가는 매순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용하여 쓸 수 없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복음이 약속하는 은총을 내 것으로 누리며 기쁘게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성전방식의 기도는 십자가 생활화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 세상에서 철수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쟁취하고자 해서는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얻으면 얻는 만큼 세상에 지는 것이고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철수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승리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고 나면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만족과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삶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전방식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고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요즘 만나는 성도님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써먹자.”라는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묵혀 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철수 작전을 예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5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군이 유럽에 대한 전면전을 시작하자 프랑스와 영국은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네덜란드를 이미 점령당한 상태에서 영국군과 벨기에군 40만 명은 프랑스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인 덩케르크에 주둔해있었고, 프랑스는 마지노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80만 독일군이 전차부대를 이용하여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뚫고 들어오면서 프랑스 북부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의 퇴로와 보급로가 차단되게 됩니다. 40만 명의 연합군이 바닷가에 몰려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군 3만 명이 결사항전의 각오로 독일군을 막게 되었고 나머지 37만 명에 대한 철수작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이나모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덩케르크의 해안이 얕았기 때문에 대형선박이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국은 작은 보트를 이용해 군인을 구축함이나 기뢰 제거함으로 실어 나르려고 했으나 오히려 독일군의 폭격에 군함들이 격침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작전 수행 이틀 만에 37만 명 연합군의 철수는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려 900척의 영국 민간인 선박들이 자발적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 덩케르크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 200척이 넘는 배들이 적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게 되지만 37만 명 중에 33만 8000명을 철수시킴으로써 작전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때 철수하던 군인들은 가지고 있던 장비들은 물론이거니와 무기까지 버려야만 했습니다. 배는 좁고 타야 할 사람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병사들의 마음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자국민들의 지탄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영국 국민들은 철수해서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열화와 같은 뜨거운 환영을 보냅니다.

처칠 수상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신문에 연설을 하였는데 그것이 또한 유명합니다. 앞부분만을 인용해보자면 “전쟁에서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명백한 승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다와 육지와 하늘에서 싸울 것을 결연한 의지로 표명합니다. 역사학자들은 33만 8000명의 철수를 막지 못한 것이 독일군의 짐이 되어서 2차 대전의 패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해석을 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한편 되기는 세상으로부터의 철수로 이루어집니다. 철수는 진출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었던 이 철수를 영국 국민들은 환영하였고 처칠 수상은 이 작전을 승리로 규정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을 위해 채움거리를 찾으며 세상으로 진출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아내에게 마음을 진출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승리의 전쟁을 위해서는 아내에게 진출했던 마음을 철수시켜야만 합니다. 아내에게 요구하고 갈등하면서 마음 채움의 내용물을 쟁취하려 해서는 진정한 승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마치 덩케르크 같아야만 합니다. 덩케르크에서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완벽하게 철수하는 것이야말로 승리였듯이, 아내로부터 마음을 완벽하게 철수시킬 때에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승리는 찾아오게 됩니다. “전쟁에서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명백한 승리입니다.”라는 처칠 수상의 연설은 그대로 복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는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과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평화의 상태는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 진출해 나가 있던 마음이 철수될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돈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했다면 돈은 덩케르크입니다. 승진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했다면 승진이 덩케르크입니다.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도 덩케르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덩케르크에 진출했다면 도버 해협을 건너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입니다. 거기서 기쁨과 만족을 얻겠다고 싸워봐야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을 얻었을지라도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신 하나님을 잃었기에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40만 명이 바다를 등진 채 항전하다 몰살을 당하는 것보다 철수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승리일 수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 보람과 성공과 형통을 위해 세상으로 진출했던 마음은 반드시 철수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철수의 길을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덩케르크에서는 900척의 민간인 선박이 병사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실어 날라주실 배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싣고 고향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고자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야 될 본토이고 고향입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승리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철수함으로 얻게 되는 승리가 바로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신 뒤에 46절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해보면 ‘기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해석한다면 기도하려면 성전에 와야만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문대로 직역하자면 성전은 곧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는 성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만 기도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고 이슬을 맞으면서 밤이 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셨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더 적습니다. 물론 성전에서 기도를 해도 됩니다. 다만 ‘기도하는 집’이라고 한다면 성전에서만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기에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성전은 ‘기도를 위한 집’이고 기도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기도를 올바르게 하게 하는 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의 구조는 그 자체로 기도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의미입니다. 선민들이 성전을 향하고 그 구조를 떠올리며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성전의 존재의미였고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성전방식의 기도를 생활화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멸망해서 흩어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참담한 멸망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방식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첫 구절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구절로부터 성전방식을 따른 기도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이름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성소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지성소가 지극히 거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법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 안에는 모세가 기록한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체로서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도를 풀어보자면 ‘성전의 지성소가 내 마음에 그대로 재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에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어떠한 대상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추구하게 됩니다. 성전의 지성소 바깥의 성소에는 분향단 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성도의 기도란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구하고 찾고 두드림을 뜻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어떤 이름을 붙잡게 되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실제로 가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길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갖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떡상의 의미는 만족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유는 바로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또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금촛대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얻을 때 그것으로부터 기쁨과 행복의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성전방식의 기도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것은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죄를 속하는 장소가 지성소 안에 들어있다는 것은 지성소에서 이름을 붙잡을 때 죄가 발생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외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자 하는 이름을 붙잡을 때 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죄가 발생하는 곳에서 속죄를 위해 속죄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처럼 마음의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분향단이 의미하는 대로 돈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돈을 얻고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다. 돈을 얻으면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만족하게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돈으로 가득 차면 기쁨이 발산되리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것 자체가 죄입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돈을 붙잡음으로써 부패가 발생하여 인격 전체가 썩어버리게 됩니다.

한편 성소 바깥에는 상번제가 드려지는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에서 조각낸 어린양을 불에 태웁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부패가 발생하여 인격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 나를 조각내고 석쇠에 올려 태워진 어린양과 동일시하여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성전방식의 기도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의 이름을 붙잡았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될 마음이 세상으로 진출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진출한 마음은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철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내가 어린양과 함께 번제단에서 불타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내 마음은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께로 철수하게 됩니다.

성전 생활화의 기도는 십자가 생활화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끊임없이 세상을 철수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세상으로 진출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국군이 독일군과 상대하고자 도버 해협을 건너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진출하고자 했다면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로 철수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성소에 어떤 이름을 붙잡았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소원이 마음에 생겨납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무엇을 가지면 좋겠다는 식으로 소원과 바람이 나타나면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이름을 붙잡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진출한 마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쟁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삶의 현장에 진출한 것이 이미 세상에 진 것이기에 이기기 위해서는 얼른 철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철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나의 삶을 맡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철수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세상에 진출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랬습니다. 자녀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서 자녀를 형통하게 해주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가 아닙니다. 자녀에게 진출했던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철수할 때에만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를 한편으로 붙잡고 계신 하나님께서 자녀의 삶 또한 이끌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성경에는 이 기도 이외에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기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단 한 순간도 계획과 생각이 없으셨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 삶을 위한 것들을 계획하고 아뢰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 편이 아닌 상태에서 본향이자 아버지 집인 하늘로 철수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한편이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내 삶에 주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 책임져 가실 것입니다.

삶에 진출한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마시고 철수시켜 하나님과 한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삶에 진출시킨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패배는 피할 수 없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전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철수하는 기도가 없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 또한 전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하여 마음의 철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성전방식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사건 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삶에서 마음을 철수시킬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이라도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철수하기는 우리의 캠페인이 되어야 합니다. 열 번이라도 철수하고 스무 번이라도 철수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세상 것들을 생각했다면 마음이 삶에 진출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서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로 철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성전방식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성전 생활화는 십자가 생활화로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삶에 적용함으로써 계속하여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철수시키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마음이 진출해 있는 세상의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철수작전을 펼치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진출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구명선으로 보내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올라타서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철수하여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편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의 삶에서 온전히 살아나고 꽃피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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