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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내 삶은 온 세상에 내가 최고 권위자_태승철 (누가복음 20장 1절~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2.27|조회수8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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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삶은 온 세상에 내가 최고 권위자>의 줄거리:

내 삶에 관하여서는 온 세상에서 내가 최고 권위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민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권위란 '밖으로'라는 접두어와 '내가 있다'라는 의미가 합쳐진 단어 입니다. 나는 있지 않고 있게 되었지요. '내가 있다'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말과 행동이 나오는 상황이 바로 권위입니다.

 

내 삶은 온 세상에 내가 최고 권위자

(누가복음 20장 1절~8절)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삶은 온 세상에 내가 최고 권위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삶은 온 세상에 내가 최고 권위자’

제목은 내 삶에 대해서는 온 세상에서 내가 최고의 권위자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권위라고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밖으로”라는 접두어와 “내가 있다”라는 말이 합쳐져 있는 단어입니다. 즉 권위란 “내가 있음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어떤 피조물도 “내가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는 있게 되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닌 있게 된 존재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기에 “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 또한 하나님뿐이십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인격이 있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나와서 있게 된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있다”가 아닌 “나는 있게 되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나의 삶의 최고 권위자일수 있을까요? 말과 행동이 “있게 되어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 나의 삶의 최고 권위자가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과 행동을 권위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은 채 이 세상 안에서 권위를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의미에서 권위란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의 가장 높은 출처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 분야에서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기 위해서는 각 정당에서 “내가 있다”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위치가 되어야 합니다. 당원들끼리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할 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인 셈입니다. 예전에 김대중 씨나 김영삼 씨가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동교동계는 김대중 씨를 찾아가고, 상도동계는 김영삼 씨를 찾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김영삼 씨나 김대중 씨의 말과 행동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각각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로 불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한 가정 내에서도 일어납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집안에서 며느리가 하는 음식은 으레 시부모님 입맛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설령 음식이 남편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 불평을 하더라도 며느리는 시부모님의 권위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권위는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있는데 어떻게 너는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떠올릴 수 있을 때에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과 행동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엑수시아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권위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각 분야나 장소나 단체에서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로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래의 권위로부터 분리되고 왜곡되어진 인위적인 가짜 권위가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진짜 권위와 가짜 권위가 충돌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에 이어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셨고 그 이후에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성전의 타락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선민의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전을 대하는 선민들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당시 선민들과 특별히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지도자층이 성전을 대하는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 문제를 권위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허락하신 본래의 취지대로 선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선민의 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성전에 대한 선민들의 태도가 선민나라의 존망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정화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시기를 계속하십니다. 이 가르치심을 성전에서 행하셨음도 권위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의 마지막 사역을 멸망하리라 예고하신 성전에서 행하셨다는 것은 성전의 취지와 존재의미를 예수님의 인격 안으로 다 흡수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존재의미는 예수님 안으로 모두 수용되었기에 성전은 빈 껍데기 건물만 남은 상태에서 멸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성전의 존재의미를 모두 수용하신 상태에서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의 과정을 밟아 가십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예수님이 가신 각 단계마다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 예수님께서 흡수하신 성전의 존재의미와 취지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이는 곧 선민사회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독자적으로 갖는 효과가 일어나는 셈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전을 독차지하는 것이고 나 혼자 성전을 갖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선민 각자와 성전의 관계가 어떠해야 했는지는 예수님을 통하여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잘못됨으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성전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각자가 성전을 개별적으로 마음에 소유할 수 없었던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성전 생활화를 위해서 성전이라는 건물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선민 각자가 성전이라는 건물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에서 성전의 존재의미를 생활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선민의 숫자만큼 존재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백만 명의 선민이 있었다면 그들 각자의 마음에서 성전은 이백만 개로 증식될 수 있어야 했고, 선민이 오백만 명이었다면 성전은 오백만 개로 증식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모임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에 성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건물에 모이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선민들의 마음에 성전은 수백만 개로 증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성전을 종교행사가 이루어지는 핵심 장소로만 여겨 모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사회의 영적 부흥은 3대 절기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전에 모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적 부흥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선민들 각자의 마음에 성전이 이식되고 증식되고 있느냐에 달려있었습니다. 선민들은 일 년에 세 번 무교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 의무적으로 성전에 모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정을 두신 이유는 이렇게 성전을 방문함으로써 성전의 구조를 마음속에 뚜렷하게 기억하고 각자 삶의 현장으로 담아가라는 취지였습니다. 모임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전을 담아서 흩어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선민들에게서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선민들은 각자 성전을 마음에 담고 삶의 현장에서 성전방식대로 기도생활을 해나가야 했습니다. 번제단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어린양이 상번제로 드려지고 있음을 떠올리고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들여놓았고, 분향단이 의미하는 대로 그것을 추구하였으며,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그것으로 배 부르려 하였고,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그로부터 기쁨을 발산하려 하였다면 그러한 마음을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하루에도 몇 번이라도 반복함으로써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밀착함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이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사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린 나무로 우뚝 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는 존재입니다. 갈릴리에 사는 사람은 갈릴리에서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린 나무가 됩니다. 베다니에 사는 사람은 베다니에서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린 나무가 됩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린 나무가 됩니다. 선민은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뿌리를 내릴 때에 삶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민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선민이란 이러하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을 듣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본래 취지대로라면 선민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온 세상에서 더 권위 있는 자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성전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전방식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동시키며 말과 행동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삶의 최고의 권위자는 바로 나입니다.

선민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선민들이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올 때마다 성전의 구조와 기구들의 의미를 가르치고 행사의 취지를 가르쳐서 마음에 담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서도 성전을 생활화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둔 우뚝 서는 나무가 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선민들의 삶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 있는 말과 행동의 열매들이 맺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모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였고 모이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가능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흩어져 살고 있던 모든 선민들은 모임 자체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성전을 가지고 성전방식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리는 나무가 되기를 원치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에 모임으로써 지도자층은 성전을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고 모든 종교의식에 책임을 지고 진행을 시키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성전에 방문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간절함을 이용하여 권위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들이 가짜로 만들어 낸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셨던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산헤드린공회가 독점권을 갖는 장소였습니다. 성전의 모든 행사와 가르침에 대해서는 산헤드린공회의 권위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대체 무슨 권위로 누구의 허락을 받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 세례 요한을 언급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이는 곧 하늘로부터 한 개인이 권위를 받아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권위를 받은 세례 요한의 모습이야말로 본래 선민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선민들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밀착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했습니다. 선민 각자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산헤드린공회라는 이름 아래에 성전을 독점한 채 가짜 권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행동이 도둑질과 다름없다고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선민들을 산헤드린공회의 권위 아래에서만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19장 46절에서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권위자로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산헤드린공회가 들어섰고, 성전의 독점권을 가지고 장사꾼을 들여놓고 수수료를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사회의 부패를 적나라하고 직선적으로 비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을 받은 사람 중에는 정치적 실세였던 헤롯 왕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헤롯 왕의 부적절한 혼인 문제에 대해 마가복음 6장 18절에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9절에서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에게 대체 무슨 권위가 있었기에 이렇게 거침없이 날선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권위가 바로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백성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민사회의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총회나 노회의 권위자들이고 예배당 안에서는 당회의 권위자들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낸 조직의 권위 아래에 일반 성도들을 머물게 하고 있다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스로의 삶에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성전의 의미를 흡수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전 생활화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둔 나무로써 우뚝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서 살아가는 상태에서 내 삶에 관해서는 나보다 더 나은 권위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교계에서도 예수님 때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지 않고 예배당 건물에 모이기만 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둔 굳건한 나무가 아니라 예배당 안에 모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모아놓은 군중들 위에서 권위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 지도자들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밀착하는 상태를 돕는 자들입니다. 이 일을 위한 지도자이고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도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당신들은 하늘과 직접 연결될 수 없습니다. 하늘과 연결되고 싶다면 우리 밑으로 모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성전과 마찬가지로 예배당은 삶의 현장에서 하늘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조직이어야만 합니다. 예배당에 참석하지 않으면 하늘과 연결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본래의 취지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견디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배당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을 정화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코로나는 개신교와 연관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단이든 정통이든 잠잠하다가도 개신교에서 발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체 왜 그러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민들은 모임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목적이 됨으로써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늘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이 삶의 권위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몸에 병이 생겼더라도 병이 생긴 몸에 대해 내가 권위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병이 생긴 내 몸에 대해서 의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긴 몸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은 다음에 나의 몸에 대한 권위자로서 의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사에게 병이 생긴 몸을 보이라 하시기에 가는 것이지 의사를 최고의 권위자로 생각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삶의 모든 과제나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보다 더 권위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 뜻에 따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컴퓨터 일도 나와 관련되었다면 내가 최고 권위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대치하던 종교지도자들이 한 일은 이와 같지 못했습니다. 선민들의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린 나무로 우뚝 세워주려고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독점하던 종교적 기관과 체제 속으로 종속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관과 체제 밖에서는 하늘과 연결될 길이 없는 것처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혼자 골방에서 기도를 하더라도 어떤 예배당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더라도 어떤 교단에 소속된 자로서 찾도록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고 연결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각과 말을 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음으로 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됩니다. 본래 종교 기관이라는 것은 각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면 됩니다. 종교시설과 지도자 밑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성도들을 빼앗는 강도의 발상입니다. 진정한 종교지도자라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어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으면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성전을 독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들의 권위 아래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뒤틀리고 왜곡되고 사악한 의도를 성전정화를 통하여 단칼에 베어버리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이 시작되기 직전에 공생애 마지막 사역으로써 성전의 존재 의미를 흡수하십니다. 이로써 멸망이 예고된 성전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민들이 개별적으로 성전을 갖도록 하시기 위한 준비 작업을 공생애 마지막으로 행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마음에 성전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전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내용입니다. 성전방식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수행함으로써 삶에 대해서는 75억 중에 내가 최고의 권위자가 되는 위치에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일체됨을 고백함으로써 성전의 존재의미가 내게서 부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남을 통하여 내가 나의 삶의 최고 권위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복지를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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