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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모임’ 우상을 깨야 참교회가 보인다_태승철 (누가복음 20장 9절~1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3.01|조회수9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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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임'우상을 깨야 참교회가 보인다>의 줄거리:

신앙 생활에서 성도의 모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유가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보조적인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우상시 되면 나타나는 일이 참으로 깜짝 놀랄 일임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십니다. 지도자들이 이 모임을 강조하여 우상시하면서 성도를 도둑질 한다는 것입니다.

 

‘모임’ 우상을 깨야 참교회가 보인다

(누가복음 20장 9절~18절)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모임’ 우상을 깨야 참교회가 보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모임’ 우상을 깨야 참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성도를 교인 혹은 선민으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성도의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한 모임의 중요성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모임은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임은 신앙생활이라는 참 목적을 위해 필요한 보조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모임이 목적이 되고 우상시될 때에는 성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설령 성도가 모임을 우상시할 의도가 없더라도 모임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만든 체제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도둑맞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성도를 되찾으셔서 자녀 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확인되어야만 합니다.

모임을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돈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을 필요로 해서 잘 사용하는 것과 우상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우상시하거나 자녀가 부모를 우상시하게 되는 것 또한 관계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성도의 모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임을 우상시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모임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고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모임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방 땅에서 홀로 예수님에 대한 큰 믿음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여인은 선민의 모임에 참여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렸던 광인도 치유를 받은 뒤에 이방 땅에 홀로 남겨져서 구원을 간증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는 믿음의 동료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홀로 구원을 간증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백부장 또한 큰 믿음을 칭찬받게 됩니다. 백부장은 동료 백부장이나 부하들과 함께 했던 것이 아닙니다. 홀로 예수님을 향해 큰 믿음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도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군중 틈에 끼어서 예수님께 접촉함으로써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관심을 사로잡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았으나 사마리아 사람만이 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수가성 여인도 마을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수가성 마을을 전도하여 엎어버립니다. 삭개오도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모임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일은 각자에게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임에 속하여 있으면 예수님과 만남을 이루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모임의 소속감이 하나님과 연합의 절대적인 필요성과 목적을 대체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임에 참여했기에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도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이 주어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설령 하나님과 개별적 연합을 이루었더라도 모임이 강조되는 신앙체제 속에 갇혀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기의 과정이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던 선민들이 그러했기에 예배당에 모이는 교인들의 모습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늘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갖고,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가지시는 일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이 강조되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과 연결을 잊어버릴 정도가 된다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는 도적질 당한 것이며 성도의 마음으로부터도 하나님께서 도적질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을 일종의 공동체를 만드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무척 아름다운 단어이면서도 남용되고 오해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을 한 그룹으로 묶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부르셨고 이들과 관계하실 때에도 열두 명을 하나의 단체로 대하셨던 것이 아니라 각자와 개별적으로 관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일대일의 관계가 열두 개 존재하던 것이 열두 제자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그 누구도 단체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이 우상시될 때에 이러한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묻히고 중단되고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등한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단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모임을 우상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선민사회를 도둑질하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장소는 성전이 아니라 삶의 현장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 생활화를 해야 되기에 건물로서의 성전을 허락하신 것이고 일 년에 세 번 방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곳은 갈릴리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의 성전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전의 의미와 구조를 명확하게 기억함으로써 성전을 생활화하기 위함입니다. 성전방식으로 마음을 살피고 기도함을 통하여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만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위해 선민들에게 성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설령 가정에서도 부모형제나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선민으로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우상시함으로써 선민들을 도둑질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해결해 가실 일입니다. 선민이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선민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하는 삶의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성전에서의 모임을 강조하였고, 성전에 모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던 조직은 산헤드린공회였습니다. 이들은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행사를 주관하였습니다. 성전중심의 사회였던 이스라엘 내에서 산헤드린공회는 성전을 주관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함으로써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에 소속된 분도 아니었으며 이름을 떨치던 정통 랍비계열의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고작 나사렛 변방 출신이었던 예수님이 권위 있게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을 정화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성전정화는 물론이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산헤드린공회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거침없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대체 무슨 권위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산헤드린공회는 최고의 권위였습니다. 그렇기에 산헤드린공회에 속해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장사꾼의 결탁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행패를 지적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허락 없이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침없는 행보는 살아계셔서 이 땅을 주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로부터 나온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늘과 직접 연결되고 밀착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과 행동을 지시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전의 모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전 생활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전에서의 모임을 통해서 이루라고 못을 박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독점함으로써 최고의 권위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의 현장에서 선민들과 만나기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민을 성전이라는 건물에 몰아넣으면서 도둑질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실태를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기는커녕 주인의 종들과 아들마저 죽임으로써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고자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민의 나라를 통째로 도둑질하고 있는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 사건까지 단 며칠을 남겨두신 상황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기간에 예수님의 관심은 성전에 집중되어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민들을 도둑질하였음을 드러내셨고, 성전의 목적은 모임의 장소가 아닌 생활화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선민 각자의 마음에 성전이 분양되고 이식되어야만 함을 가르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올려봅니다. 홍대 앞을 지나다보면 청기와주유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더 들어가면 지금은 성산동이 된 연희동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저희 집 근처가 모래내로 불렸습니다. 그곳에서 열 집 가까운 가정이 공동체처럼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장때가 되면 엄마들이 모여서 리어카를 끌고 아현동 고개를 넘어서 배추를 사오고 한 가정에 150포기나 200포기씩 김치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한편 그렇게 살아가던 저희 집에는 화분이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식물을 키우셨는데 선인장이 많았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희귀한 선인장을 구해서 키우다가 분갈이 할 때가 되면 뿌리를 나눕니다. 그렇게 분양받아 키우던 선인장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마치 성전을 분양받는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전의 목적은 모임이 아닌 선민 각자의 마음에 분양받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서 성전이 희미해져 갈 때쯤이면 절기에 따라 성전을 방문하여 다시 선명한 성전을 분양받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전을 기억하고 성전방식을 따라 마음을 관찰하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모임은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각 지방마다 회당도 있었고 모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의 모임들도 성전을 중심으로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의 의미와 성전방식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율법 또한 성전방식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율법에서 어긋나는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성전방식의 삶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졌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염두에 둔 율법의 존재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선민사회에서는 성전의 분양이 아닌 성전의 모임이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고집하고 백성들을 성전 건물에 모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성전의 관할권과 행사의 주도권을 독점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선민들은 점점 성전에 모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점은 성전의 모임을 목적으로 하느냐 성전을 분양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중요하되 부모는 자녀를 우상시해서는 안 되고 자녀도 부모를 우상시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민들은 성전에 모여야 했지만 모임을 우상시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산헤드린공회를 통하여 성전을 장악하였고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우상시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때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1장 12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모습이 역겨운 것임을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마땅히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들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절기에 맞춰 성전을 방문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충분하다고 여기게 되었으니 그 모습이 역겹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임을 우상시하는 문제는 이사야 때부터 포로기를 거치고 회복되어 예수님 때에 이르기까지 반복됩니다.

선민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선민 각자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르친다면 자신들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사라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 밑으로 모이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현장에 몸담고 있었을 때도 저의 의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고 진리의 기준에서 볼 때 옳고 바르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하는 마음의 동기가 옳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몇 명이 모이느냐를 염두에 두고 나온 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인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를 관심으로 삼는 것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로소 십자가 복음을 깨달으며 그러한 생각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몇 명을 모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선민들 각자가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 세상 누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연결된 말과 행동을 지시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모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자녀를 우상시하지 말라는 말이 자녀를 없애버리라는 뜻이 아니듯이, 모임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할 때에 주어진 삶의 현장이 어떠하든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도 나를 선민으로 가지실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은 증거가 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 앞에서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보일 수 있고, 자녀 앞에서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은 성전에서 드리던 예배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버리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믿음의 원형을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성전이 없었고 모임이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것들을 통해 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였습니다. 모든 왕들이 탐낼 만큼 아름다웠던 아내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갖고,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시는 일은 성전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예배당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닙니다. 이 일은 오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 위하여 성전에서의 모임은 허락되었습니다. 예배당의 모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당의 모임은 십자가 분양을 위한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배우자나 자녀 앞에서 십자가를 잊지 않도록 돕는 것이 목회여야 합니다.

교인들을 예배당에 모이게 하고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고 성경공부를 하게 하고 예배당 조직을 위해 봉사하게 하고 헌신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한 때 이러한 일을 목적으로 목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성도들을 도둑질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목회하던 현장은 교회가 아닌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도둑이었는데 누구도 원망하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시점에서 교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모임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敎會)로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세상 안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 밖으로 부름을 받은 이유는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머물며 기쁨과 만족을 찾는 동안에는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밖으로 부름을 받고 나와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일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부부동반으로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할 장소는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앞선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의 저는 이 말씀을 수없이 보면서도 모임밖에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 중에 제 마음에서 조명을 받는 부분이 모임의 숫자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임이 우상시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목회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를 도둑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홀로 굳건히 땅에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처럼 마음의 뿌리를 하늘에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이루어진 하늘 수목원이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강릉에 있지만 뉴질랜드에 계신 분도 있고 프랑스 파리에 계신 분도 있습니다. 각자 자기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분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어 낼 때 우리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성전에서의 모임이란 절대적인 목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성전을 분양받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전 분양과 십자가 분양은 모임이 아니라도 가능한 환경이 되었습니다. 모임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자 보조적인 수단입니다. 이 시대에는 성전에 직접 모이지 않더라도 마음에 성전을 이식하고 성전의 내용을 흡수한 십자가 사건을 분양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모임을 절대시하고 도그마처럼 붙잡는 의식 자체가 깨어져야만 합니다. 모임을 우상시하는 동안 참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참 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을 따라 얼마든지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우상시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우리의 마음에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말과 행동이 예수님처럼 하늘의 권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임이 아닌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권위를 받아 말씀하실 때 필요로 하신 것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밀착하셨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밀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종교의 시스템이나 예배당 조직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모임을 우상시한다면 예배당 조직과 성도의 사유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권위로 말씀하실 때 종교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의 학력이나 졸업장이나 전문지식이 필요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삼위일체이셨기에 하늘의 권위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일체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며 세상의 전문지식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이 나의 마음을 세상에서 탈출시키시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질 수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임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우상시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이면 될 것이기에 모임이라는 생각은 의식에서 제거해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 만날 수 있고 십자가를 계속 이식하고 분양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식받고 분양받은 십자가를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증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죄 사함을 위하여 영생을 위하여 삶이 복지가 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종교나 예배당 조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붙잡고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모이는가에 대해서는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임이 우상시 되는 동안에는 참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참 교회는 각자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의 뿌리를 하늘로 내린 우뚝 선 나무들 전체입니다. 한 장소에서 모임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전의 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민을 도둑질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자 주인의 아들조차 죽이고자 하는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하여 드러내 보여주고 계십니다.

삶의 현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하였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러하였고 혈루병 여인이 그러하였고 삭개오가 그러하였듯이 진짜 구원을 얻고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좋든 싫든 여러분의 삶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설령 돈이 없는 환경에 있을지라도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성전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양받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처럼 하늘의 권위 안에서 나오는 일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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