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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이사 것, 하나님 것, 그럼 내 건?>의 줄거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 대답이 왜 예수님을 옭아매려 했던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의 말문을 막았을까요? 그들에게는 '가이사의 것'이나 '하나님의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 것이 있고 내 것을 빼앗는 가이사가 있고 그다음에 가이사를 처단할 하나님만 있었던 것이지요.
가이사 것, 하나님 것, 그럼 내 건?
(누가복음 20장 19절~26절)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가이사 것, 하나님 것, 그럼 내 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이사 것, 하나님 것, 그럼 내 건?’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별세에 대해 반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별세라고 번역된 헬라어 엑소도스(ἔξοδος)가 탈출이라는 것에 착안한다면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는 것이 출애굽이듯 별세는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기에 출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세상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단어가 바로 권위로 번역된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권위와는 무관하게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권위란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존재감을 느끼며 말하고 행동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위는 존재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돈으로부터 “내가 있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돈의 존재감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돈의 권위에 장악당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돈이 많은 상태에 맞추어진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돈을 많이 번 사람의 말과 행동을 권위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돈 뿐만이 아닙니다. 학계에서는 풍부한 지식을 가진 학자가 권위 있다고 여겨집니다. 풍부한 지식이 존재감을 가지고 “내가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인 우리들의 말과 행동에 권위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도 존재감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한 이유는 배우자로서의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가 자녀에게 말을 할 때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부모로써의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보잘것없는 가치관이나 신념이나 능력이 존재감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권위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바로 이러한 권위와 존재감의 관계가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모든 속국들에 대해서 인두세(人頭稅)를 거두었습니다. 인두세는 말 그대로 사람의 머리 숫자만큼 매기는 세금입니다. 남자는 14~65세까지 여자는 12~65세까지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인두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상당한 부담이었기에 대다수의 선민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선민들이 이방의 군주에게 납세를 한다는 사실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강제력에 의해 세금을 내고는 있었지만 선민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헤롯 당원처럼 특이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헤롯 가문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들은 헤롯 가문의 부흥을 위해 로마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반선민적이고 반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국수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어서 질문을 합니다. 22절을 보면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반민족주의자로 몰아서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게 하려 하였고,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반로마정치범으로 몰아서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길 판이었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엄청나게 정교한 함정과 올무를 만들어서 예수님 앞에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간계를 아시고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으십니다. 그 대답이 바로 25절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답에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써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고, 선민으로서 하나님께도 헌금을 드리는 것은 얼핏 당연한 말씀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민들은 이미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성전에 대해서는 각종 헌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정치적 속셈에 빠져있던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이사 즉 황제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지 않고 군소리 말고 인두세를 로마에 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것이란 단순히 율법이 규정하는 성전세나 제사 때 드려지는 제물이나 헌금을 바치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말문이 막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헌금이나 십일조나 제물이나 성전세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것을 더 많이 주시리라는 공로사상에 빠져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십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자체가 의식 속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씀 자체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선민이라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은 “내 것” 혹은 “우리 것”이라는 개념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아깝고 좋은 “내 것”과 “우리 것”을 로마 황제가 빼앗아간다고 생각했기에 로마를 싫어했습니다. 이들이 느꼈던 존재감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내 것에 대한 존재감이었고, 두 번째는 내 것을 빼앗아가는 로마의 존재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로마로부터 내 것을 되찾아주실 분으로 여겨졌던 하나님은 겨우 세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 것을 누구에게 바쳐야 하느냐를 두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헤롯 당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선민들이 실제로 세금을 내면서도 내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라 여기며 바치기 싫어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것이라는 개념을 빼버리고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언급하십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개념이 등장하였기에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이사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내 것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 내 것을 늘려서 번영을 이루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도 이와 관련하여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내 것이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었고, 내 것을 늘려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두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마가 내 것을 빼앗아가려는 존재로 끼어들면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밀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었던 내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내 것이라는 존재감에 사로잡혀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 상황에서 내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이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제국도 가이사의 것이 아닌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을 언급하신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도록 결정하시고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선민들은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의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 자체를 성립할 수 없는 사실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로마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생각에서 존재감의 순서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재감의 순서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만 이 말씀을 마음에서 몇 번째로 중요한 존재감의 대상으로 여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선민들의 마음에서 “내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대상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의 소유물이었고, 두 번째는 로마였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존재감의 순서가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도 달라집니다.
나의 것, 나의 나라, 나의 가족, 나의 재산으로부터 “내가 있다”는 말을 먼저 듣는 선민들에게는 로마제국은 내 것을 빼앗아가는 도둑놈들이었습니다. 이 도둑놈을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을 섬깁니다. 내 것을 빼앗기고 있는 상황을 수정하고 개선시킬 존재로서 하나님을 등장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 특이한 역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이 강할수록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실제 참된 신앙의 상황은 이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참된 신앙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제일 먼저 계신 분으로 체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체감한 사람에게는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이기에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헤롯 당원들과 같이 로마를 자신들의 이익수단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매국노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일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인정하면 당시 선민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거부감 없이 세금을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정부에 반감 품는 것을 신앙이 좋은 증거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내 것을 존재감의 첫 번째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내 것이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기에, 그것을 빼앗아가는 로마는 두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고, 그 로마를 물리치시리라 믿었던 하나님은 세 번째 존재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신앙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봅니다. 배우자에게 불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나와서 배우자의 행동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아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한다면 배우자가 비록 부족하고 문제가 많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배우자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배우자에게 불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선민들이 로마에 대해 가졌던 불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불만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 불만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에는 어떠한 권위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비록 세상의 기준으로는 부족하고 낮은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는 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선민들로부터 권위가 상실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을 내 것으로 여기며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말과 행동에는 어떠한 권위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처럼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말과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대체 왜 선민인 너희들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나라가 식민지하에 있더라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기에 기껏 하는 질문이 세금을 바쳐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의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은 내 것이었고, 두 번째 존재감의 대상은 내 것을 빼앗아가는 로마였고, 하나님은 기껏해야 세 번째나 그 이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를 선민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나 선민들은 내 것의 존재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내 것에 유익이 되면 우리 편이고 내 것에 불리하거나 빼앗아가고자 하면 원수이고 강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선민이 고작 그러한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들로부터 어떤 권위 있는 말과 행동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가이사의 것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존재하는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나라를 내 것으로 여기며 존재감의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나라를 식민지화함으로써 내 것이 아니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선민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AD.70년에 선민의 나라 자체가 멸망하여 없어지게 됩니다. 선민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붙잡고 계실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선민은 “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붙잡아야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내 것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고, 내 것과 관계해서 원수를 따지며 그것을 두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삼고, 그 다음에야 하나님을 찾는 것은 선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도 빌라도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선민들 또한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주권만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하나님의 주권 대신 로마의 힘을 크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려야 될 하나님의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존재감을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내가 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감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한 세상의 가치들이 “내가 있다”고 말하는 소리를 먼저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용되어져야 할 이 세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선민들에게 성전 생활화가 제시되었던 것이고, 우리에게는 성전 의미의 완성이신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체감할 수 있도록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마음이고,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너희에게 급한 문제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로마를 이용하셔서 너희를 식민지로 삼으신 이유도 이와 같다. 너희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내 것이라 여기는 대상들을 찾으며 식민지화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드러내시려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깨달음이 없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로마에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곧 내 것이 첫 번째 마음의 존재감의 대상이고, 로마는 두 번째 마음의 존재감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세 번째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너희는 이러한 거짓된 믿음의 체계를 신앙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도록 하셨다면 가이사에게 바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에 보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 정하신 일이라면 하나님을 봐야지 가이사를 봐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듯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식민지가 된 상태는 종식되어야만 합니다. 선민들에게 정말로 급했던 것은 로마에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서 내 것으로 여기는 나의 몸, 가족, 재산, 지위, 신분 등의 식민지가 된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가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식민지가 된 상태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세상에 식민지가 된 상태가 계속된다면 복지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기쁨도 없고 만족도 없으며 행복도 평강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식민지가 된다면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평강도 식민지가 되어버립니다. 이 세상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의 평강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데 평강을 누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세상을 탈출함으로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드릴 때만 우리의 마음은 바쳐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바쳐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내 삶의 최고의 권위자는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고, 단체와 기관에 매이고, 재물과 명예에 매이는 삶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의 식민지가 된 마음은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체감하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권위를 따라 말과 행동을 하는 거침없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이 마음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제일 먼저 체감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을 하며,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하여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알맞고 적절히 올바르게 쓰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