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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된다>의 줄거리:
나는 다윗보다 2900년 늦게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다윗보다 더 먼저 계셨던, 아니 아담이나 아브라함보다 더 먼저 계셨던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태초 이전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렇게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태초 이전으로 늘어나면 나는 이제 신이 되고 내 삶은 신화가 됩니다.
나는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된다
(누가복음 20장 41절~44절)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어려운 점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보다 거의 천년을 늦게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년이면 이조 오백년이 두 번이나 합쳐진 긴 기간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존재가 공백의 마음 즉 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서는 다윗보다 늦게 태어나셨을 뿐이지 존재의 시작이 다윗보다 늦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은 고사하고 아브라함은 물론이거니와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하늘에 계셨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시고 성령님과 함께 수용하시는 결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은 자기보다 천년이나 늦게 태어날 예수님을 주라 칭하였습니다. 42절을 보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님께서 영원의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면서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들으시는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의 별명이었습니다. 선민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이고, 다윗에 이어서 왕의 자리에 등극할 것이라 여겼기에 다윗의 자손이라 불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메시아의 육체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부활에 관한 말씀을 생각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죽지 않는 부분은 바로 공백의 마음인 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의 차원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육체로만 다윗의 자손으로서 천년 늦게 태어나셨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무려 삼천 년이나 늦게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물론이고 아브라함과 아담보다도 먼저 계셨던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하나 될 때 예수님께서는 공백의 마음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태초 이전의 상태 속으로 끌고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를 입고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세상 안에서만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계셨던 예수님과 하나 될 때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있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차원을 달리할 만큼 확장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하여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통해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육체 의존적입니다. 마음이 온통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갇혀 있었기에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음상태로는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존재감의 사정거리는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 태초 이전으로 존재감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감의 극적인 확장이 이루어질 때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본문의 맥락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과 하나님의 계심을 세상보다 더 우선적이고 강하게 느낄 때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됩니다. 그렇기에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하늘까지 확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시작되기 전 태초 이전의 상태에서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확장되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납니다.
성경은 사실(fact)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영적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영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영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역사적인 기록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성경이 담고 있는 영적인 사실을 내 것으로 삼을 때 나는 신이 되고 나의 삶은 신화가 됩니다.
자꾸 신이 된다고 하고 삶이 신화가 된다고 하니까 무슨 허황된 소리를 하는가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언급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4~3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심으로 인하여 신성모독의 비난을 받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율법 즉 성경에서는 예수님처럼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닌 피조물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지는 37~38절을 보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이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하나의 신화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허구의 신화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은 신으로서 사신 신화의 삶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담겨있는 영적인 사실을 내 것으로 삼으면 우리 또한 신이 됩니다. 그때 일어나는 가장 큰 특징은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존재감이란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있음을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느낍니다. 아내가 있다, 남편이 있다, 자녀가 있다, 우리나라가 있다, 돈이 있다는 식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담겨있는 영적 사실을 내 것으로 삼을 때에 이 존재감의 사정거리는 예수님만큼 확장되게 됩니다. 존재감이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 태초까지 확장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있음의 근거로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감을 갖는 것이 신이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신이라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TV나 영화에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를 보면 신적 존재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허구적 존재를 언급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신이 될 수 있음도 모르고 나의 삶이 신화가 될 수 있음도 모르기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 작품을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됩니다. 이것은 선택 가능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신이 되지 않고 삶이 신화가 될 수 없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기에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이 신화가 될 때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존재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삶이 신화가 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을 볼 때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상황이 신화로 여겨집니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재벌이 되고, 목사님들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삶이 신화가 된다는 것은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초월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말려들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이 말려들지 않는 초월성을 갖는 것이 바로 신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초월한 상태에서 사는 삶이기에 신화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 주무셨던 사건을 떠올려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광풍노도라는 극단적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주무십니다. 바로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마음이 말려들지 않는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이 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랬고 스데반 집사님도 그랬고 바울과 실라도 그러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죽도록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람이라면 괴로워하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기도하고 찬양을 하였고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서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며 하나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이 말려들지 않는 초월성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전하다가 산헤드린공회에 잡혔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인 산헤드린공회가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워하던 산헤드린공회 앞에 서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하면서 예수를 전파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음을 밝히며 죽음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렇게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이 신이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신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은 신화가 됩니다. 이렇게 신들이 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은 신화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앞서 신이라는 말은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신화라는 말도 오해되기 쉬운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화는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세상을 초월하는 일은 허구가 아닌 실제이고 현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세상을 초월하는 일은 판타지 작품과 똑같은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이 일이 현실이고 삶입니다.
신화적 삶의 또 다른 특징은 비현실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집니다. 실제로 삶이 진행되는 상황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며, 그러한 과정에서 마음에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도 비현실적입니다. 초월적이고 초상식적이기에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신이 되고 삶이 신화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 신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인간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 갇혀서 1등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시간과 공간의 세상을 초월하는 신이 되어야 하고 여러분의 삶은 초상식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신화의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잘나도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과도 무관하게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육체를 기준으로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민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문제를 제시하십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어떻게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에 매인 사고의 틀을 흔들어 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별세 사건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별세는 곧 이 세상의 탈출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틀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시간과 공간의 세상 안에서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를 일으키리라 믿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번영케 할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진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확장시키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는 세계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마다 신이 되고 삶이 신화로 살아가게끔 하시고자 메시아로서 별세 사건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1000년 전에 태어났고 메시아는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틀에 갇혀 있는 한 메시아가 이룰 사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 본문은 앞선 사건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앞서 권위에 대한 질문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질문과 부활과 계대결혼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 세 번의 답변을 하셨고 이들은 그 답변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앞선 질문들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점을 의식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부활과 계대결혼에 대한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문제는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했던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직을 독점하던 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은 내세의 삶을 믿지 않는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만치 세상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한편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포진해있던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나 이들 또한 마음이 세상에 얽매여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 후 내세에서도 현세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랄 정도로 세상을 좋아하였습니다. 현세주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 문제는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선민이란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민들 중에서도 지도자들의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철두철미하게 현세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내세도 믿고 부활도 믿고 천사나 사탄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있음을 느끼는 사정거리는 철저하게 세상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죽했으면 부활해서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속되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면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러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 뒤에도 이 삶이 계속되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시간과 공간 안에 국한시킨다면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는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선민이면서도 메시아를 버리게 되는 것이고 메시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도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당시의 선민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를 수 없다면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별세 사건은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늘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세상 바깥의 천국에는 온갖 보석빛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보좌에 아버지가 계시고 천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하늘을 먼저 느낄 수 있습니까? 배우자보다 자녀보다 사장님이나 부장님이나 직장동료들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느끼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고 이는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다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허락하시는 은총을 내 것으로는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몸으로 머무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있음을 느끼기에 앞서 하늘이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먼저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은 바로 이것을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을 먼저 느끼는 자들은 신이 됩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축약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하늘로 확장시킨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시던 삼위일체 하나님께 닿음으로써 하나님이 있음을 느끼고 체감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은 자는 신이 됩니다. 신이 되었기에 삶은 신화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2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이 되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에도 마음이 휘말리지 않는 초월적 자유를 갖는 마음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돈이 없는 것을 문제로 여기실까요? 건강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것을 문제로 여기실까요? 자녀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것을 문제로 여기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러한 문제에 휘말리고 계신다면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계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시지 휘말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라간다면 우리의 마음 또한 세상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고 계시던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도록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확장되면 하나님은 나를 신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신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 다른 사람들은 과정과 목적을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되는 것은 필수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세상에서 잘난 인간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우리의 존재감의 사정거리는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태초의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신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삶은 신화가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신이고 여러분의 삶은 신화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 존재감의 사정거리가 시간과 공간을 돌파해서 태초 이전의 상태에 도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있음을 느낌으로써 신이 되어 사위일체를 이루게 하시며, 지상에서의 삶은 신화가 현실이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