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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미래보장책을 마음에서 박리하라>의 줄거리:
영원함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있음을 느끼는 마음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립니다. 영원함을 실제로 느끼는 마음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언제나 지금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 있음에 대한 느낌에 모든 미래 느낌이 압도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미래 보장책에 대한 열망이 근본적으로 사라집니다.
미래 보장책을 마음에서 박리하라
(누가복음 21장 1절~4절)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미래 보장책을 마음에서 박리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미래 보장책을 마음에서 박리하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래의 삶을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보장책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기독교인을 자청하면서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보장책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갖게 됩니다.
한편 십자가 생활화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라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자들은 마음에서 미래의 보장책에 대한 욕구를 마음에서 박리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리(剝離)란 껍질을 벗겨낸다는 의미입니다. 칼로 껍질을 벗겨내듯이 마음에서 미래의 보장책에 대한 욕구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이미 보장책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마음에서 반드시 벗겨져야만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다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에 대한 경고를 해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감으로 느끼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커튼 뒤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입니다. “얘들아 나 여기 있다.”라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인기척으로 제시된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기척인 말씀을 맡아서 관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있음이 아닌 사람의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삶에 대해 경고하시며 서기관과 정반대의 예를 찾으시다가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발견하시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동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 이 가르침을 위해 예비 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의 이스라엘 여인들의 뜰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헌금함마다 용도가 적혀있었는데 이 과부가 어떤 헌금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목적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시고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음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과부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러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과부의 등장은 단순히 헌금을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사람의 있음을 느끼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사용하였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는 이러한 서기관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한 인간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과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정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던 때는 별세 사건을 고작 하루 이틀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마지막 정열을 다해서 교훈을 쏟아내시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는 그날도 어김없이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과부는 성전에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린양을 바치는 상번제에 참여하면서 큰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과 교리에 가두고 있는 서기관들과는 대척점에 선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부를 산증인으로 삼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하였습니다. ‘렙돈’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단위 중에 가장 작은 돈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면 렙돈은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계산하기 편하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2만 8천 원이라고 해보자면 한 렙돈은 천 원입니다. 과부는 이천 원을 헌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돈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한편 공교롭게도 당시 성전에는 헌금의 최소금액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두 렙돈이었습니다. 한 렙돈은 도저히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라 취급할 수도 없다고 여겨졌기에 최소한 두 렙돈은 드리자는 의도에서 그러한 규정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과부가 헌금을 하는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도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부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작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음을 아시고는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하루 생활비인지 일주일 생활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과부는 경제력이 전무한 계층이었습니다. 구제의 대상으로 항상 고아와 과부가 언급되었던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일정한 기간의 생활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저 하루 이틀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비용이었던 것입니다.
과부는 성전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상번제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하여 두 렙돈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정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큰 의미를 가진 행동이었습니다. 생활비 전부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과부가 대척점에 있는 서기관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떠올려봅니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있음을 크게 보아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또한 돈을 크게 보아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이러한 서기관들의 행동과 정반대의 일이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렸다는 것은 미래의 보장책을 포기한 것입니다. 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상번제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루 이틀의 끼니를 보장해주는 두 렙돈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크게 느꼈기에 생활비를 헌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끼니의 해결은 삶의 가장 필수적 문제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부에게도 딸린 식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가 성전에 들어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상번제에 참여하는 동안에 그 마음에서는 끼니보다 하나님의 있음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성전에 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가 되자 본의 아니게 먹고 사는 문제는 뒷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생활비 전부를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을 걱정해야 되는 입장에서 하루 이틀이라는 짧은 미래만을 생각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짧은 만큼 분명한 미래였기에 그 보장책인 두 렙돈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 필수적인 두 렙돈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낌이란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과부의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을 빨아들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느낌으로부터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망각되었고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림으로써 의도치 않게 미래의 보장책으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을 동원하셔서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생활을 떠맡는 책임을 지셔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인은 의도치 않게 하나님을 미래의 보장책의 자리에 세우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활비를 다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과부가 유일한 미래의 보장책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제 과부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입장에 서시게 되었습니다. 고작 두 렙돈이 창조주를 움직이는 헌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미래의 보장입니다. 본문은 바로 미래 보장의 문제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신앙생활과 연결이 되면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미래를 걱정합니다.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고 그 이후의 미래의 있음을 걱정하기 때문에 보장책과 대비책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시간과 공간의 세상의 일이기에 영원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칼로 자르듯 중단되고 맙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마음이 미래의 보장책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있음은 오직 이론과 교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미래의 있음을 하나님의 있음보다 더 크게 느끼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미래의 보장책을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평생을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살아가지만 실제로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 부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감 있게 마음에 들어와 계실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영원함의 차원입니다. 영원함 안에는 과거에서 이어지는 현재도 없고,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도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가 아닌 영원은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함 속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 죽는 것이고, 과거에서 이어지는 현재에 대해 죽는 것이며, 현재에서 이어져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도 죽는 것입니다. 언제나 영원은 순간이고 지금 느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있음은 지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부가 성전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상번제 어린양의 죽음을 볼 때 마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동작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서기관들과는 반대되는 지점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고 내일이나 모레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보장책으로서의 두 렙돈을 지금 현재 느껴지는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별세 사건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이 별세 사건은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의 탈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탈출로가 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서 마음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영원함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면 그때 우리에게서는 과부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서 미래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죽어버리게 됩니다. 날카로운 칼로 벗겨서 박리하듯이 마음에서 미래의 보장책을 붙들고 있던 상태가 벗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보장책을 염두에 둡니다. 보장책을 마련했으면 안심하고 보장책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집과 돈은 미래에 대한 보장책의 대표입니다. 어떻게든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고 어떻게든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연금을 받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대한 보장책을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한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절대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과부에게 미래의 보장책인 두 렙돈은 무척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결코 이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영성의 소유자라고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을 각오로 성전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볼일만 보고 돌아갔던 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통해 성전의 의미가 표현되고 있었고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듣던 과부를 감동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과부의 마음에서 미래에 대한 관심이 박리되고 하나님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 마음 상태가 미래의 보장책인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느냐 마느냐 얼마나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난 결과로 헌금을 드리게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별세 사건을 앞두고 계신 상황입니다. 그리고 별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날 결과를 있는 힘을 다해 묘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중요했던 것은 헌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별세 사건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라 시공을 탈출할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이 어떠할지를 묘사하시는 일에 마음이 바쁘셨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은 칼날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미래의 보장책에 대한 마음의 유착상태를 박리시키는 칼날인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내일 먹고 살아야 될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바쳐버릴 정도로 미래의 느낌에 대해 죽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미래를 빨아들이려던 마음이 변하여 스테인리스 그릇처럼 마음이 미래와 분리되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르는 십자가 생활화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미래에 대한 국부마취와도 같습니다. 제가 발바닥에 사마귀가 생겨서 제거하기 위해 피부과를 간 적이 있습니다. 사마귀가 생긴 부분에 냉각가스를 쏴서 동상을 유발하여 조직을 죽입니다. 그 과정이 아프기에 국부마취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치과에 가서도 치료를 할 때 잇몸을 마취합니다. 마취가 되면 도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데도 건드리는 느낌만 있지 아픔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면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어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절박하게 반응하게 하는 느낌이 주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미래에 대한 느낌을 압도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예수님이 별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과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타나야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고정적 수입이 있고 연금이 있고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고 노후 준비를 하고 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제 과부처럼 다 가져다 어디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을 드리는 형태로 드러나게 된 과부의 마음의 변화가 핵심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지점도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미래의 보장책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때만 미래에 대한 관심은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음을 염려하지 않고, 이미 대책이 있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미래의 보장책들이 박리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미 존재하는 월급이나 연금이나 저축 등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지출의 용도를 결정하시고 사용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미래의 보장책들을 박리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을 스테인리스 그릇처럼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스펀지가 되어서 물을 빨아들이듯이 미래의 보장책을 빨아들이고 젖어들기 시작한다면 인생도 잃고 영생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보배로운 계획들도 무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미래에 대한 보장책이 있어. 이 보장책을 믿고 하루하루 살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어.”라는 느낌에 빠져있는 한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은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래가 돈 몇 푼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생을 팔아치우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미래의 보장책을 마음에서 박리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월급이든 연금이든 보험이든 미래의 보장책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께 진짜 이익이고 진정한 재테크 방법입니다. 미래의 보장책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느낌이 죽을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과부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나의 미래를 완전히 넘겨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처럼 미래의 보장책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서 박리하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충만히 느끼게 하시고, 모든 보장책을 하나님의 주권에 내어드리는 역사가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