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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666표 받는 자 십자가표 받는 자>의 줄거리: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뜻하는 표식인 666표와 관련하여 기독교 종교 안에서 참으로 미혹도 많이 일어나고 어처구니없는 미신도 난무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 생활화하지 못하고 기독교 종교인의 상태로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미혹이고 미신입니다. 나는 666표를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666표 받는 자 십자가표 받는 자
(누가복음 21장 5절~6절)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666표 받는 자 십자가표 받는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666표 받는 자 십자가표 받는 자’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재건한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민의 자부심을 갖게 할 만큼 괄목할만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성전 건물을 짓기 위해서 사용한 대리석들의 크기만 해도 가로 5미터, 세로 3~4미터, 높이가 11미터나 되었습니다. 또한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하나의 높이만도 12미터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이 헌정한 인조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금으로 입힌 포도송이들이 사람만큼 컸다고 합니다. 이 화려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시되었습니다. 본래 성전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커튼 뒤에 가려진 하나님의 있음을 선민들에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음에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성전의 내부구조를 살펴보자면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돌판이 안치된 법궤가 있었습니다. 말씀이란 시간과 공간의 커튼 뒤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나 여기 있다.”라고 인기척을 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담고 있는 법궤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인기척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알았다면 이제 마음에서 하나님을 느끼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느낌으로써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 즉 지정의는 마음에 담은 대상에게 종속되어 그 느낌을 따라 움직이고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을 때 인간의 지정의는 부패하고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고 죽이는 것이 바로 번제단의 상번제가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어린 양이 각이 떠져서 불태워지는 것을 내가 죽는 것으로 동일시하여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무엇인가 있다고 느끼는 존재감은 지정의의 활동을 규정합니다. 마음에 있음을 느끼는 동안 생각하고 희로애락이 발동하고 의지가 작용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에 담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존재감을 느껴서 마음에 담게 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제목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것은 곧 상번제가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느끼고 그로부터 비롯된 의식에서 지정의와 말과 행동이 지배되는 인격 상태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성전의 취지와 존재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모두 흡수되었습니다. 성전 생활화를 완전히 업그레이드해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느끼며 지정의와 말과 행동이 부패하게 된 상태를 돌이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666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보다 세상의 있음을 더 먼저 느끼고, 그 느낌에 따라 지정의가 종속되고 말과 행동이 지배받고 있는 상태를 더 이상 바꾸거나 죽일 수 없게 된 상태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소유물로서의 표식인 666표를 받은 상태인 것입니다.
성전 파괴의 예고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전의 파괴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성전의 존재의미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이 완전히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는 666표를 받는 사건입니다.
666표를 받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에 의해서 지정의가 활동하고 말과 행동이 지배받는 상태가 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재산에 이르기까지 세상 것을 먼저 느끼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체질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세상에 찌든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선민의 특징입니다. 세상을 느끼던 상태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세상의 있음을 먼저 느껴서 마음이 찌든 상태를 부인하지 않고 유지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서 비롯된 원죄의 체질 탓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상번제의 어린 양과 함께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적그리스도의 소유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과 연관하여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666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성전이 파괴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상번제 어린 양의 죽음을 생활화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세상의 있음만을 느끼는 찌든 상태로 끝까지 살다가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666표를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표식인 666표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운명적으로 멸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소유한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에게 보람찬 일이 아닙니다. 해볼 만하고 성취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666표를 안겨주는 것이야말로 적그리스도와 그 추종자들에게 보람찬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두 짐승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짐승이 적그리스도이며 두 번째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돕고 숭배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13장의 핵심은 바로 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이해의 핵심입니다. 8절에서 언급되는 첫 번째 짐승은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11절부터 두 번째 짐승이 나타나서 하는 일이 언급됩니다. 이 짐승이 하는 일이 666표를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위해 역사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적그리스도에게 속하게 하려고 역사하는 악령입니다. 이 악령이 주는 666표는 완전히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인증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이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표식이 666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되느냐, 666표를 받느냐의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이후로는 666표와 관련되어 미혹되거나 미신을 붙잡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란 성전의 상번제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또한 상번제의 어린 양은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성전의 상번제의 의미를 온전히 성취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삶을 날마다 반복하는 사람들이 바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짐승은 666표를 주게 됩니다. 666표는 결코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항간에 베리칩을 몸에 심는 것이 666표를 받는 것이라거나 심지어는 코로나 백신주사를 맞는 것이 666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영성은 육체의존적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6절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른손과 이마는 사람의 행위와 지정의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내 육체에 표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음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묘사한 것이지 육체에 무슨 표시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발상은 영성이 완전히 왜곡되었거나 없는 것이고, 이런 식의 생각을 하고 미혹된다는 것은 아직도 육체의존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상황을 가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온 몸에 666 문신을 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부모의 성화를 지긋지긋하게 여겨서 반항심에 이러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예수를 잘 믿는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 아가씨에게 이끌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청년은 온몸에 666 문신을 새긴 채로 예수를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세상의 있음보다 먼저 느끼면 온몸에 666표시가 박혀있을지라도 이 청년은 하나님의 권속이고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차원에서 666표시를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666표시를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 이론과 교리로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의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돌이키고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666표를 받은 상태입니다.
이어서 666표의 의미에 대해서 더 생각해봅니다.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이것이 없으면 매매를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오늘의 번제 시즌1의 요한계시록 부분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것과 연결시켜서 살펴볼 것입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번제의 죽음을 생활화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세상 느낌에 완전히 절여진 장아찌로써 하나님과 등지고 살도록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상번제의 죽음을 생활화할 수 없게 되었기에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대표적 상징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입니다.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날마다 드리는 상번제를 제거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다니엘서에 반복되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결국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란 상번제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상번제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 느낌에 절여진 마음이 죽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 사람은 상번제의 의미가 제거된 것이고 성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 666표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적그리스도의 표식이 666인 것일까요? 선민의 특징은 죽음에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는 일에 온 힘을 다하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하나님의 있음보다 세상의 있음을 먼저 느끼는 죄악 된 체질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상번제가 존재하였습니다. 선민들에게는 상번제 외에도 죽음을 이루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었는데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6일 동안 일하고 칠 일째 쉬는 것입니다. 칠 일째의 안식일은 죽음의 날이었습니다. 6일 동안은 성전에서 어린 양이 번제로 드려지는 모습을 삶의 현장에서 기억하며 세상을 먼저 느끼던 나를 순간순간 죽여 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럴 때 나 대신 하나님께서 삶을 이끌어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칠 일째가 되면 삶의 현장에서 아예 몸조차도 빠져나오는 죽음을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였습니다.
6일 동안은 삶의 현장에 몸이 있으면서 상번제를 기억하며 죽습니다. 하나님의 있음보다 세상의 있음을 먼저 느끼는 나를 어린 양과 동일시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칠 일째가 되면 삶의 현장에서 완전히 몸이 빠져나옴으로써 죽는 것입니다. 상번제는 삶의 현장에서 죽는 것이고, 안식일은 삶의 현장 밖으로 나감으로써 죽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루 전체를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로부터 666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별세 사건은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삶의 현장을 빠져나가는 칠 일째의 안식일을 마주하지 않는 삶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666의 의미입니다. 육일 째에서 안식일이 찾아오지 않고 다시 육일 째가 시작되는 것이 반복됩니다. 즉 666은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계속됨을 의미합니다. 6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또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666은 세상에 대한 느낌이 쉼 없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른손에 표를 받았다는 것은 스스로 세상의 주체가 되어서 세상의 느낌을 따라 활동이 쉬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 이마에 표를 받았다는 것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 지정의의 작용이 세상을 향해 이루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오른손에 666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에 끊임없이 손을 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마에 666표를 받았다는 것은 지정의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사는 것이 선민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른손에 666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는 죽을 때까지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이마에 666표를 받았으니 지정의가 세상의 삶에 대해서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계시록 13장의 이해의 핵심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표를 받는 자와 666표를 받는 자가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666표를 받은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그러한 삶에 역경도 없고 무난하고 순조로울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안정적인 삶의 조건은 오히려 함정과도 같습니다. 그 느낌에 빠져서는 안 되고 빠졌다면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안정된 삶에 빠져있었습니다. 어제 살펴본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생각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겼기에 이들은 돌이킬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유함과 형통함에 감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을 문제시할 수 없게 만드는 평탄함과 안정은 역경과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보다 못합니다. 마음을 세상에 안주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필요성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요한계시록 13장 17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매매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먹고 살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666표를 받은 사람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으면 대체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666표를 받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머리를 쓰고, 스스로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 의지를 발동시키고,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스스로 손을 대서 활동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매매를 할 수 없게 된다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계속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는가?” 혹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고 나의 마음이 안식일의 의미대로 세상을 빠져나가 버리면 도대체 내 삶은 누가 살 것이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긴다면 오른손과 이마에 666표가 찍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손대지 않고, 내가 머리를 쓰지 않는데 누가 나의 삶을 책임지느냐?”라는 마음을 가진 상태는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말이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고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매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의 의미입니다. 666표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스스로 삶을 끌어가고자 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능력으로 메꾸어보려고 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망각하는 것을 제일 무서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생활 속에서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만은 삶에서 절대로 타협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고 접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첫 번째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수 없다면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느껴질 수 없고 교리와 이론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온통 세상에 대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마음을 따라 세상에 몰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빠져나가는 별세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일에 타협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세상의 느낌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면 적그리스도의 소유물이고 666표를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베리칩을 몸에 심든지 말든지, 코로나 백신주사를 맞든지 말든지 그런 일들은 기도하시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 대로 행하면 될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적그리스도의 표식이 아닙니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이것이 왜 화두가 되는지에 대해 의아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사시는 교포들 가운데 코로나 백신주사를 맞는 것이 666표를 받는 것이라며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붙잡아야만 합니다. 세상이 두쪽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붙잡아야 하지만, 세상이 평탄하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린다면 세상이 네 쪽 나는 것과 같은 멸망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 너무 목을 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 유익하고 건덕적인 내용들이지만 문제는 이해하기에 쉽지 않기에 미신에 빠지고 오해하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666표를 받는다는 것은 성전이 파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성전 의미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잊히는 상태가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마시고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순간마다 죽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별세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느낌에 의해서 지정의가 활성화되며 말과 행동도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십자가표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심지어 몸이 살아있다는 것까지 잊어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만은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심령에 십자가표를 받은 사람들로써 살아가게 하시고 이 방송을 듣는 분들 중에서 결코 666표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