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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의 세상비관은 복음의 반쪽>의 줄거리:
복음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반면에 비관은 인생을 어둡게만 보아 슬퍼하거나 절망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앞으로의 일이 잘 안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과 비관, 이 둘이 하나일 수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철저하게 비관적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에 관해서 내가 들을 수 있는 소식 중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비관은 복음의 반쪽
(누가복음 21장 7절~28절)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의 세상 비관은 복음의 반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세상 비관은 복음의 반쪽’
본문에서는 종말에 있을 사건들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언급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AD 70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로 약 40년 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하실 때에 나타나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구분 없이 말씀하신 이유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시점은 이 세상을 탈출하시는 별세 사건의 과정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는 천국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탈출하셔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심을 통해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께 큰 염려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염려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 의도를 알아야만 합니다.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세상 끝에 일어나게 될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종말에 대한 예고가 의미하는 바를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신 것은 바로 인간 세상에 남아 살아가게 될 제자들과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지만 오고 오는 세대에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예루살렘 멸망으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세상에서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40년이 못 되어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보자면 거의 이천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의 속성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속성을 염두에 두시고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혼재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남게 됩니다.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도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지속되다가 재림 때에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말리게 될 것이며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던 모든 물질도 녹아서 없어지게 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때가 되면 이 세상이 없어지도록 결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세상이 없어지기까지 남아서 살아가게 될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대해 염려하시며 본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오늘은 종말론의 입장이 아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의 표현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마음이 곧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맞춤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온 세상보다 크신 창조주를 모셔 들일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은 이 세상보다 크고 우주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몸에 귀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몸을 해부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음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우주보다도 더 큰 마음이 몸에 결합되어 있는 신비함은 의학이 밝혀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이 몸과 결합된 상태에서 사람의 의식은 작용합니다. 이 의식은 뇌의 영향을 받기에 육체가 죽으면 사라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자들 또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떠나간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과 함께함을 통해 마음에 예수님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떠나실 것이기에 우주보다 더 큰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마음은 세상에 정복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7장 11절을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마음을 지키고 보전하시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 자녀들을 집에 두고 친정에 다녀오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습니다. 또 13절에서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또한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마음이 묻어납니다. 이처럼 세상을 떠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지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모으시고는 곧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몇 년이라도 세상에서 사시며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될 만한 사건이나 업적을 남기셨던 것이 아니었으며, 제자들에게 장관 자리를 주시거나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셨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남을 제자들이 염려되셨다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걱정 없이 살도록 해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이 세상을 엄청나게 헐뜯는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왜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셔야 했는지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아 살아갈 제자들의 마음이 세상 있음의 느낌에 절여져서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기시기는커녕 비관적인 사실을 드러내시며 마음을 세상에 붙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견해가 아니라 사실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면 그것은 비관론이 아닌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관론이나 낙관론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대하면서도 낙관하기도 하고 비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셨다면 그것은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대항하는 것이며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해 비관하셨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점 또한 세상에 대해 비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사람의 마음에 담는 용도로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한 공백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마음과의 관계에서 볼 때 세상에는 낙관적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헐뜯으시듯이 세상을 비관하십니다. 마치 못 먹는 호박 찔러보기라도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전에서 비관론을 찾아보면 “인생을 어둡게만 보아 슬퍼하거나 절망스럽게 여기거나, 앞으로의 일이 잘 안될 것이라고 보아 아무런 것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담아 절여진 상태에서 세상에 있는 것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어둡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곳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견해이기에 세상의 속성에 대한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비관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공백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채움을 얻을 수 없고 안정된 환경을 구축할 수도 없다는 비관이 어떻게 복음의 반쪽이 될 수 있을까요?
복음이란 기쁨의 소식입니다. 비관과 기쁨은 병존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 세상에 대한 비관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이 세상에 대한 느낌의 죽임이고 하늘에 대한 느낌의 삶입니다. 삶과 죽음의 양면이 복음 속에 붙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의 죽음 없이 하늘에 대한 느낌을 갖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하늘에 대한 느낌을 갖는 삶 없이 세상에 대한 느낌의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있음의 느낌에 절여지면 하나님의 있음은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이론과 교리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끼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갇혀있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갇혀있다는 것은 내가 직접 손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손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죽어야만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의 느낌에 대해 죽어야만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어서 절대적으로 비관적인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로부터 이천 년이나 지속된 세상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몇백 년, 몇천 년이 되더라도 똑같이 비관적인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에 대해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이 비관적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는데 고국에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애국심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국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민을 간 덕분에 고국에서 일어난 안 좋은 일을 피한 셈이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났는데 바로 그 자리에 벼락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벼락이 떨어질 자리를 떠난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별세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좋은 것이 많다고 여겨진다면 마음이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결코 마음 붙일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세상의 비관적 속성을 속속들이 밝혀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세상을 떠나야하는 입장에서 마음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을 정도로 비관적인 곳이라는 사실은 반가운 일입니다. 조금이라도 기쁨거리를 얻을 수가 없고, 조금이라도 안정된 토대를 구축할 수가 없다는 것이 세상의 속성임을 알았기에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비관을 복음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난리와 소요와 전쟁과 기근이 지속되고 천체의 이상 징후들이 있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언급들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도 천국에 못지않은 평강을 누릴 수 있고, 세상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으며, 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보람찬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죽을 맛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심술이 난 것처럼 세상을 헐뜯고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심술을 부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아드님께서 비관하신다면 그것이 곧 세상의 속성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비관하신 세상을 낙관하는 삶이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노력하면 안정된 삶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세상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도 얻을 수 있다.”라는 낙관론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한 낙관론이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오직 예수님의 철저한 세상 비관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것 같고 범사에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낙관할 때 기쁨 대신 슬픔과 불안과 걱정을 끌어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는 멈추게 됩니다. 범사에 원망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관을 철저하게 나의 비관으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진정한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의 감사가 가능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한 철저한 비관을 갖게 되었을 때 이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을 향한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하나님을 만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황홀경에 빠졌던 것처럼 항상 기뻐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철저하게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기 때문에 세상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쉬지 않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아름답게 물든 상태가 될 때 이 세상은 내가 손댈 필요가 없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깨닫고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이 갖고 계신 철저한 비관을 가질 수 없다면 항상 기뻐함도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9~11절을 보면 말세에 일어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 민족과 민족의 대립, 나라와 나라의 대립,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천체의 변화나 기후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말세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헐뜯고 계십니다. 이렇게 비관적인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을 찾아야 할 곳은 바로 하늘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기 전까지는 안정이란 없습니다. 안정이 없는 세상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할지라도 안정이 없는 불안정한 생애를 끝까지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읽지 않은 12절 이하를 보면 박해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박해가 일어나는 이유는 타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비관적 속성을 전혀 모른 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과는 타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회당과 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잡혀갈 때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넓히자면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기 위한 입에 담을 말이나 해답을 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만 세상에 대해 할 수 있는 말과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관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입에 담을 수 있는 말과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물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따라 지정의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별볼일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입에 담을 어떠한 말이나 해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6절부터는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 또한 이제까지의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세상에 있는 존재들인 한 그 누구도 나의 안정감이나 마음 채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세상을 헐뜯고 계십니다.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관계를 놓고 보았을 때 비관적이되 이렇게 비관적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대해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앞으로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별세를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비관이었습니다. 마치 세상을 헐뜯는 것처럼 보이는 이 본문은 세상의 속성에 대한 사실이자 진실입니다. 마음의 관계에서는 추호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세상에 대해 마음의 접촉조차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서 언급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제자들이 행여나 세상의 느낌에 마음이 절여질 것을 염려하시며 절대로 마음을 붙여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25절을 보면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월성신이란 해와 달과 별을 뜻합니다. 즉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것이 불변의 법칙처럼 보이는 천체의 움직임조차도 실은 절대적이지 않기에 이러한 세상에서 결코 안정된 토대를 구축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7~28절을 보면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때가 정해져 있는 시한부의 장소이나 사람의 마음은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영원한 마음으로 시한부의 세상에서 안정된 토대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조차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친구나 나라는 물론이고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자연법칙까지도 마음 채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관점에서 볼 때 종말에 대한 예고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세상에 남아 살아갈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있음의 느낌에 마음이 절여져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대한 사실로서의 철저한 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비관을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속량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이르는 시점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세상을 비관하며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반복함으로써 오늘도 하늘에 속하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속량의 경험을 꼭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을 향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뼛속까지 비관적이라는 사실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 기쁨의 소식을 우리의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 속량되어 하늘에 속했음을 체감하게 하시고, 하늘에 물든 느낌이 지정의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멋진 천국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