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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할 순간_태승철 (누가복음 22장 1절~6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3.18|조회수84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할 순간>의 줄거리: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이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룟 유다와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예수님과의 결별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과 결별할지 아니면 함께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은 사실 우리 일생에 걸쳐 매일 수 없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이렇게 매 순간 함께 할 것을 반복 결정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할 순간

(누가복음 22장 1절~6절)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할 순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결별할지 함께할지를 결정할 순간’

본문은 별세하시는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수 없거나 들여보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산헤드린공회원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내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는 바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이들만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해서 나타날 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결별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동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예수님께 드려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음에 전달되고 주어지는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예수님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기에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갈 수 없다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동선은 움직임이 발생하는 선입니다. 이 선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한 자리에 머물러 계시면서 양팔을 벌리고 나를 맞이해주시고 품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을 향한 동선의 주인공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른다면 나의 마음 또한 세상을 떠나 하늘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마치 “세상발 하늘행 열차”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 열차를 올라타고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까지 이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러한 것이기에 동선 즉 움직이는 선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에도 선택은 이루어집니다. 산헤드린공회원 뒤에 줄을 설 것인가, 가룟 유다 뒤에 줄을 설 것인가, 제자들 뒤에 줄을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직장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믿음의 동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직장에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예수님의 동선 위에 있어야 합니다. 몸이 직장에 있더라도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태우고 직장을 빠져나가 하늘로 향하시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중단된 상태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버릴 것인지, 산헤드린공회원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여 죽이고자 할 것이지,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를 배우자 앞에서 결정해야만 합니다. 몸은 배우자 앞에 있으나 마음은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배우자가 있는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는 동선의 열차 위에 올라타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만약 마음에서 이 동선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 믿기를 중단하는 것이 됩니다.

이 결정이 믿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결별할 것이냐 함께할 것이냐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여수에 살던 청년이 서울에 직장을 얻어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애인이 배웅을 합니다. 또 만나겠지만 생활의 근거지가 여수에서 서울로 바뀌게 되었으니 아쉽습니다. 이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을 놓아야만 하고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믿음에서 나타나야 하는 절대 진리이기도 합니다. 기차에 탄 사람은 기차에 타지 않는 사람과는 손을 놓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기차에 탄 사람은 기차에 싣지 않은 모든 물건에서도 손을 떼어야만 합니다. 정 손을 놓고 싶지 않다면 함께 기차에 타든지 기차에서 내려야만 합니다.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기차 바깥의 모든 것과 손을 놓는 결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에 올라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라타야 하는 예수님은 동선을 따라 이동하고 계십니다. 세상발 하늘행 열차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마음의 손을 놓아야만 합니다. 문제는 세상에 대해 마음의 손을 놓고 싶지 않을 때입니다. 이때 예수님과의 결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탈출하시는 별세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탈출하시는 예수님과 결별한다면 붙잡고 있는 것들과 함께 세상에 남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산헤드린공회원들과 가룟 유다는 바로 이렇게 세상을 붙잡고 세상에 남기로 결정한 자들입니다. 이 결정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몸이 거하는 상황과 환경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싣기 위해서는 몸이 머무는 현장에서 손을 떼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선 말씀들을 통하여 존재감 즉 있음의 느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의 손을 내밀어 세상의 대상들을 붙잡고 있는 상태를 있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정의해보자면 나의 마음이 세상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끼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동선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나의 마음이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께 올라타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이 느낌의 손을 놓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있음의 느낌이 살아있는 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별세를 앞두신 예수님의 행적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별세와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문제를 연결시켜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동선입니다. 믿음은 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기차로 삼아 올라타는 것입니다. 세상을 빠져나가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손을 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느낌이 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 느낌이 살아있는 한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에 대해서 있음의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예수님을 찾고 부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별세의 동선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종교의 우상으로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상시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우상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의 동선을 기억하며 세상 있음에 대한 느낌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손을 떼고 열차에 올라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우상시하는 상태는 기차역의 가로등과 몸을 쇠사슬로 묶은 채 기차에 올라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기차가 앞으로 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쇠사슬에 묶인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기차에 끌려갑니다. 살기 위해서는 기차가 서든지 기차 타는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별세의 사건은 멈추지 않기에 예수님 따르기를 거부하고 결별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절대로 예수님 기차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탈 수 없는 기차입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있음을 느끼는 부모는 탈 수 없는 기차입니다. 예수님은 애인의 있음을 느끼는 청년들이 탈 수 없는 기차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 재물, 승진, 월급, 취미, 오락 등 인간관계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절대 탈 수 없는 기차입니다. 예수님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마음을 세상에 묶어둔 채로는 믿음은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동선을 올라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태워서 그 자리에 머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이라는 레일을 따라 움직이시는 기차입니다. 우리의 몸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한 예수님의 기차를 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고 33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반복하신 이유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마음이 쇠사슬이 되어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시려는 예수님으로부터 결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것들을 소유합니다. 소유란 곧 가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따를 수 없습니다. 소유가 쇠사슬이 되어 마음을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 소유의 쇠사슬을 끊는 절단기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 있음에 대한 느낌이 죽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결별과 동행이라는 양자택일이 결정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죽을 때까지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날마다 세상 있음의 쇠사슬을 끊고 마음을 별세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시는 예수님 기차에 태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결별과 동행이라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결별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의 기득권층이었던 산헤드린공회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 느낌의 쇠사슬을 끊기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예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내가 죽든 네가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난다.”는 원수의 관계로 정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배우자를 느끼고 자녀를 느끼는 동안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좌우되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느낌을 끊기가 싫다면 예수가 없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에 예수를 없애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의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없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별세의 과정을 제거한다면 예수님은 우상화됩니다. 우상시한다는 것은 내가 구하는 것을 마음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답이 없고 자기 의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느끼면서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현되는 대로 소원하는 바를 마음대로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상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이것 이루어주세요, 저것 이루어주세요.”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말 못하는 우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세상 있음에 대한 느낌의 쇠사슬을 끊고 세상을 떠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별세 직전에 예수님을 올라타서 예수님의 동선과 함께할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을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과 결별할 사람들이 있음을 구분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가시려는 목적지와 자기의 목적지가 판이함을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가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심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동선이 향하는 목적지가 자신의 목적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파악하였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낙관적인 미래를 향할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고,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동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룟 유다는 깨달았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죽든 자신이 죽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이게 되고 자신이 죽을 수는 없으니 예수를 없애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과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과 가룟 유다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이 동선인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로 가려면 세상 것들에 대한 느낌이 끊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이미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이미 세상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가진 것들을 아까워하는 형태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가룟 유다는 기득권층이 아닌 열혈당원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민족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습니다. 이러한 열혈당원 출신인 가룟 유다의 목적지는 독립한 나라에서 기득권층이 되는 것을 소원하는 형태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워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든 소원의 방식으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든 마음에서 세상의 있음을 느꼈던 것은 똑같습니다. 마음이 세상 있음의 쇠사슬에 묶였기에 예수를 없애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별세를 앞두신 예수님은 지도자층의 잘못을 끊임없이 비난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제자들도 이 세상 것을 소원하고 있기는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열혈당원 출신이었던 가룟 유다는 소원의 형태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가운데 예수님을 고용하는 형태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하층민 출신으로서 이들의 과제는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이었습니다. 이들이 독립한 나라에서 장관 자리를 얻기를 소원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에 근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능력을 확인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에서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세상에 대한 소원이 남았다면, 제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소원이란 온전히 예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혼하면서 서로 고소하고 고발하며 원수관계가 되어 이혼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막말까지 하며 부부싸움을 해서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정이 있어 이혼까지는 하지 못한 경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이 있기에 싸우고도 신경이 쓰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연락이 올 것을 기다립니다. 남편도 이번에야말로 못 참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아내가 뭐하고 지내나 걱정이 됩니다.

열혈당원이었던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만남은 마치 정략결혼과 닮았습니다. 자기 소원을 따라 배우자를 고른 것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혼을 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하층민이었던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연애결혼과 닮았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소원을 가질 주제도 아니었으나 예수님을 통해 소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세상에 대한 소원도 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승천을 경험한 후에 오순절역사를 통하여 하늘의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누가는 가룟 유다의 행적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3절에서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의 있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십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과 결별할 것인지 함께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순간순간 상황이 바뀌고 대상이 바뀔 때마다 선택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믿음은 동선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 대상들에 대해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내가 쇠사슬에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로는 별세의 동선을 따라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쇠사슬을 끊어내야만 합니다. 세상 있음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게 되고,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의식의 지정의의 속성을 하나님의 손과 주권이 장악하고 살아가실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기차에 올라타고 세상을 빠져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믿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의식과 몸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순간마다 예수님과 결별할 것인지 함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모든 순간에 동선인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내 마음에 있음으로 느껴지기를 요구하며 다가오는 이 세상 모든 대상들에 대한 느낌의 쇠사슬을 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별세의 동선 위에 계시는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 위에 올라타서 기어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이 가지시고 느끼시는 모든 은혜를 예수님 안에서 동일하게 느끼게 하시며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의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의 손이 장갑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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