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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믿음은 동선,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_태승철 (누가복음 22장 7절~13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3.18|조회수91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은 동선,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의 줄거리:

믿음은 동선입니다. 모든 세상 것 있음의 느낌을 끊고 세상 발 하늘 행 열차이신 예수님 안으로 내 마음이 들어가 올라타고 하늘까지 함께 가서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물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동선인 믿음의 사람들의 이 세상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세상 삶은 하나님의 뜻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치밀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됩니다.

 

믿음은 동선,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

(누가복음 22장 7절~13절)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은 동선,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은 동선,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

본문의 기록은 고난주간 다섯째 날 목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져 있는 베다니나 감람산 기슭에 머물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성안으로 보내시면서 유월절 만찬을 위하여 장소와 음식을 준비할 것을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루가 지나면 제자들과의 만찬이 끝난 밤에 체포되십니다. 그 후 밤새도록 취조당하시고 아침 아홉 시 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동안을 매달려 계시다가 오후 세 시 경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앞둔 다섯째 날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실 별세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별세로 번역된 원문은 탈출하다는 뜻의 엑소도스(ἔξοδος)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출세상의 역사를 앞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통로가 건립되는 작업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한편 어제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산헤드린공회원들과 가룟 유다는 도저히 예수님을 두고 보거나 함께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의 완벽한 결별을 위해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을 탈출하셔서 하늘까지 가시는 동선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최근 반복하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있음에 대한 느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마음속의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 표현은 무척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중에 있거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있음에 대한 느낌”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은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느낌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있음에 대한 느낌이 청진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있음에 대한 느낌”이라는 표현은 권위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앞서 20장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최종목적임을 반복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미 식상할 정도로 말씀드렸습니다만 본문을 이해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예를 통하여 “있음에 대한 느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퇴근 후 회식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회식을 하는 중에 TV에서 뉴스가 나오는데 프랑스 지하철에서 테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회식하던 모든 동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개탄을 합니다. 그러나 회식을 중단하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의 지하철에서 테러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는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있음에 대한 느낌”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회식을 하는 중에 핸드폰으로 경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녀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회식 자리에 윗사람이 있든 말든 상관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테러에 대해서는 중단되지 않았던 회식 자리가 자녀가 다쳤다는 전화 한 통에 중단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갖고 있는 “있음에 대한 느낌”의 차이 즉 존재감의 차이가 이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있음에 대한 느낌”을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게 별세 사건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수 있도록 지금 준비 중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타야 할 기차와 같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태워서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도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갖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길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이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는 상태가 바로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본문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끼는 상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즉 지정의가 발현되는 의식과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앞선 말씀에서 이러한 상태에 대한 좋은 예시로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에 대한 느낌은 죽고 하나님에 대한 느낌만이 살아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느낌에 물들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톱니바퀴가 빈틈없이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듯 오류가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배우자나 자녀나 세상의 어떤 대상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진행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0절을 보면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본문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0절 하반부에서 12절을 보면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건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일이 굉장한 기적이지만 본문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기적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핏 규모가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홍해 사건 못지않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나 감람산 기슭에 계셨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어른 걸음으로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때는 유월절 기간이었기에 예루살렘은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자면 유월절 어린양 한 마리를 열 사람씩 먹었다고 추산할 때에 26만 마리 가까운 어린 양이 소모되었다고 하니 어림잡아 260만 명이 모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추산에 과장이 섞였다고 할지라도 최소 2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엄청난 사람이 밀집해 있었고 두 제자는 그중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찾아야만 합니다. 당시에 핸드폰 같은 연락수단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미리 간다고 연락을 해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안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하시고 이어지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 30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확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두 제자가 성안에 들어가자마자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을 발견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200만 명이 북적대며 유월절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송년예배를 위해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갔다가 3,000~4,000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200만 명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성내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가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을 확신하시고 그로부터 이어질 일들까지 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을 향하면서도 빨리 가야 하나, 천천히 가야 하나를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이동 중입니다. 두 제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미리 약속해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보다 빨리 가도 안 되고 늦게 가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또 성에 도착한다고 해도 어떤 조건에서 그 사람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향했을지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빨리 가거나 천천히 가고자 할 필요가 없이 되는 대로 가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가다가 힘들어서 한 10분 쉬고 가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과의 만남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기에 두 제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적으로 정하셨고 주님께서 그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만남을 인도하십니다.

 

이 사건의 특징은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도 이러한 일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강하게 느끼게 될 때 우연한 삶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구체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시하신 것처럼 명확한 지시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먼저 느끼고 그 느낌에 물든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결정을 따라 말씀하시고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움직여 가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들에 단 하나도 우연이란 없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여지가 삶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확실성 자체가 뿌리째 뽑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걸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게 되었고 말씀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셨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 가십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첫 번째로 강하게 느끼는 믿음의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의 상태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삶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낄 때 마음과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 주무신 사건이나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사건처럼 몸이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마음의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강이 주어진 가운데 삶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빈틈없이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산헤드린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작당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변수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향하는 동선을 만드셔야 하는 사명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서 가룟 유다나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적대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방해하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이들의 행동이 악하면 악할수록 오히려 예수님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동선을 만드시는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은 치밀하고 빈틈없이 성취되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느끼고 계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느끼는 모든 자들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고자 하는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성공을 싫어하는 원수가 나를 막고자 삶에 개입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을 마음대로 발휘하는 것 같이 보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나의 마음이 원수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물들어 있다면 원수의 광란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두 톱니바퀴가 완벽히 맞물려 돌아가듯이 나의 삶이 성취되고 진행되기 위한 재료로 발탁되고 사용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는 한 그 누구도 나의 삶에 대해 주권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 이외의 변수를 삽입하거나 개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완벽한 주권의 톱니바퀴에 의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이제 저 사람 큰일 났다. 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원수를 만나서 골치 좀 썩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에 마음이 물들어 있다면 이렇게 여겨지는 모든 순간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동안에 나의 삶은 내가 결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결정은 이루어지지만 나의 결정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내가 인격체이자 주체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세상에 묶인 마음상태가 끊어져야만 합니다. 배우자에 대한 느낌, 자녀에 대한 느낌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며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포함하는 세상을 탈출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 인격체이자 주체로써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이 예수님을 붙잡고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나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때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느끼는 동안 직장에서의 모든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은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이는 상황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나의 결정과 책임은 마음에 관한 것이 됩니다. 마음의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움직여 하나님을 느끼는 단계에까지 가는 것이 나의 책임입니다. 직장에서 사장님보다 동료들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느낄 수 있기 위하여 잠시 기도하고, 그럴 수도 없다면 화장실에라도 가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책임이고 내가 노력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이 살아난다면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해나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의 내용은 하나님을 갖게 하는 일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통해 세상발 하늘행 열차이신 예수님께 태우시기 위해 몰아가실 것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져야만 성령께서 나를 통해 역사해나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몰아가실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예수님 기차에 올라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해달라는 기도를 삶의 현장마다 30초든 1분이든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을 시작할 수 없다면 성령님의 인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했다면, 회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버스에 올라타서도 다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현장이 바뀔 때마다 기도는 이루어져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 있음을 느끼기 위하여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삶의 현장은 나와 하나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역사의 장소가 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남북통일은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만 있다면 저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남북통일이라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백 억짜리 프로젝트가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가능합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백 억짜리 프로젝트가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더라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는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회사에서 나를 꺼내신 것입니다. 소개팅을 했는데 퇴짜를 당했다고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상대방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끼고 있다면 퇴짜를 맞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 앞에서 치우신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낀다면 단순히 건강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나의 몸 상태를 그렇게 규정하고 계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몸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면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해고를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원망이 생기고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일에 주력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 붙잡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는 일만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운명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삶이 톱니바퀴처럼 정밀하게 진행되어 나갈 것이지만 세상발 하늘행 열차인 예수님께 올라타는 것은 나의 결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톱니바퀴와 같은 삶은 내게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삶의 환경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우리 앞에서 있음을 느끼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대상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쇠사슬을 끊듯이 십자가를 통해 끊어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 삶의 환경이 바뀌고 상대가 바뀔 때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보내는 일에 주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하게 되는 일을 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의 부담도 가질 필요도 없고 갖게 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설령 원수에게 잡히는 일이 있을지라도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중에 일어나는 일이고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중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지 못한 채로 이렇고 저렇고 따지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논쟁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붙잡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때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삶에서는 우연과 변수가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하심에 의해서 나오는 계획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돌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꼭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을 찾느라 지친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느라 지쳤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찾으면 찾을수록 원기가 왕성해지고 영혼이 소생하는 것을 믿습니다. 삶의 현장과 마주하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세상 있음의 느낌을 십자가로 끊고 예수님 열차에 올라타 하늘로 가서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삶의 현장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 치밀하게 성취되어 가는 것을 눈으로 보며 감탄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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