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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 출현_태승철 (누가복음 22장 14절~23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3.20|조회수9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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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 출현>의 줄거리:

첫 번째 유월절에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공식적이고 독립적으로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생일날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의 의미가 십자가 사건 안으로 흡수되면서 전혀 새로운 종족이 지구 위에 출현합니다. 이 종족은 특이하게도 날마다 죽은 예수를 먹고 마시며 세상을 삽니다.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 출현

(누가복음 22장 14절~23절)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 출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 출현’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통해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내용입니다. 16절과 18절을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유월절이 마지막 유월절이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국가와 민족마다 고유한 식문화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김치가 한민족의 독특성을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일본은 스시, 독일은 소시지, 프랑스는 바게트, 미국은 햄버거, 이탈리아는 피자나 파스타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죽은 예수를 먹고 사는 신종족이 출현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끼니마다 김치를 먹듯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먹는 종족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신종족에 속한 자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떡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예수님의 피라 하시며 이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게 된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만찬을 원하신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제자들이 먹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음식으로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는 과정이 동반됩니다. 죽음을 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소가 죽어야 하고, 닭고기를 먹으려면 닭이 죽어야 합니다. 나물을 먹어도 삶고 데쳐서 죽인 후에 먹습니다. 싱싱한 샐러드를 먹어도 내 몸에 들어가서 죽어야 양분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먹음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날마다 파스타를 먹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날마다 김치를 먹듯이 예수님과 관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식 제정의 의미는 성만찬 예식을 주기적으로 행하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찬식은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잊지 않게 하는 기억의 촉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먹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신종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유월절 만찬을 기점으로 신종족이 출현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예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찾고 관계해야 할 예수님은 능력의 예수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마음으로 먹음으로써만 관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먹음이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의 유일한 방식임을 십자가 수난 직전인 유월절의 만찬을 통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대면하여 관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먹음으로써만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태우는 세상발 하늘행 열차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신종족으로 살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첫 번째 유월절은 출애굽의 날입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짐승까지 모든 초태생을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이 내려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넘어갔습니다. 초태생 즉 장자는 한 가문의 대표입니다. 장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가문 사람 전체를 죽이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하신다는 의미는 애굽의 노예였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세상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의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 되신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날이었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 공식적으로 결혼식과 같은 행사를 했던 것이 바로 시내산 계약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언약 이전에 존재하던 옛 언약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기념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결혼한 지 17년 만에 아이를 얻었을 때 기뻐했던 것처럼, 유월절은 선민의 탄생과도 같은 날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선민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의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종족이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유월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의 종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종족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 나타난 종족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이 나의 것이 되신다는 유월절의 의미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유월절 만찬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를 먹고 독일 사람들이 소시지를 먹고 프랑스 사람들이 바게트를 먹듯이 예수의 죽음을 먹는 종족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참으로 끔찍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있음의 느낌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왔습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느냐, 세상의 있음을 느끼느냐를 문제시한 것입니다. 이 있음의 문제는 유월절 만찬과도 관련해서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월절은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소개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 하심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있게 된 자들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있음의 문제는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to be, or not to be)”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우리말로 직역해보면 “있음인가 없음인가”라는 간단한 문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있음이 문제가 됩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출현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있음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있게 된 것임을 느낄 뿐입니다. 배우자는 있게 된 자이지 있는 자가 아닙니다. 몸이 아플 때도 있게 됨으로써 느껴지는 것이지 있음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있음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선민입니다.

 

이제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며 있음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가를 있다고 느끼는 일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해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있음의 느낌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순간이 없습니다. 매순간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있음의 느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있음의 느낌은 나 아닌 다른 대상들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도 있으며 세상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만 스스로 있는 분이고 세상의 모든 대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담 이후에 하나님과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기가 왜 있는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자연스럽게 내가 있게 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있게 되었고 살아가는 삶의 상황도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상황이니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식 안에 있는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는 체질이 되어버림으로써 문제가 생겨납니다. 스스로 있는 분과 끊어지자 마치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있음의 근거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내가 왜 있고, 내가 무엇 때문에 있고, 나의 있음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에서 데카르트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내가 있음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있음의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음을 느끼기 위한 이유와 근거를 찾아보니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생각하는 것을 보니 내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사고 자체는 무척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말을 나인성 과부에게 적용시켜봅니다. “나는 엄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근거가 생각이었다면 나인성 과부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는 아들이었습니다. 또 데카르트의 말을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적용해 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있기에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것이고 줄리엣은 “로미오가 있기에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20년간 피땀 흘려 사업을 키워온 사업가는 “사업장이 있기에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한편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있음을 찾는 것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수면제를 먹고 가사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는 죽었다고 오해하여 자살합니다. 줄리엣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도를 잃게 된 것입니다. 깨어난 줄리엣은 자신의 곁에서 자살한 로미오를 보고 마찬가지로 자살하게 됩니다. 로미오가 없기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있음의 느낌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느끼는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연애하는 중이라면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떠한 대상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있음의 느낌이 곧 생명입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생명이었고, 줄리엣에게는 로미오가 생명이었습니다. 한편 선민은 하나님의 있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으로 삼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있게 된 자들끼리 서로를 생명으로 삼았기에 그 생명은 곧 꺼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살아있음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상대하는 대상으로부터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대상이 없어짐과 동시에 생명은 없어집니다. 지옥에 가게 되고 영원한 멸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당신의 몸과 피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없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 없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없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있음의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상의 대상들의 있음을 살아있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있음을 느끼는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만드신 없음으로 이 세상 있음의 느낌을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대면하는 동안 마음에서는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배우자를 통해서 나의 존재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마음에서 배우자의 있음은 지워집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닌 우리는 어디에서 있음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만들어진 없음으로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있음을 지워나갈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하늘로 마음을 끌고 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이 나의 것이 된다는 유월절의 본래 의미가 충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없음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없음으로 세상의 있음에 대한 모든 느낌을 다 지워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종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없음을 먹어야만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상태는 중화되고 소멸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나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됩니다. 있음을 느끼는 대상이 지정의와 언행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돈의 있음을 느낀다면 돈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돈의 것이 됩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있음을 느낌으로써 줄리엣에 의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지배당했습니다. 줄리엣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로미오는 줄리엣의 것이었고 줄리엣은 로미오의 것이었습니다. 세상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지우개와 같은 없음을 만드셨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면서도 마음에서는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만들어낸 없음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에 자녀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있음으로 느껴져야 할 세상의 대상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내 마음에는 없음으로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만들어낸 없음을 의식 속에서 유지시켜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당시의 중동 사람들은 깨끗한 물을 구하기 어려웠기에 포도주가 일상적인 음료였습니다. 일상적으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식 안에 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만들어낸 없음을 통과하면서 다 지워져서 내 마음에는 없음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떤 것도 있음의 느낌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마음상태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살아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영생의 느낌입니다. 줄리엣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던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자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업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던 사업가는 사업이 망할 때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만드신 없음이야말로 나에게 영원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영생의 길입니다. 이 세상의 있음이 오감을 통하여 마음으로 쇄도해 들어올 때에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 없음으로 다 지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이 세상의 있음의 느낌에서 완전히 차단될 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있음이 오롯이 느껴지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만드신 없음을 늘 먹고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종족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만드신 없음을 끊임없이 먹음으로써 세상의 대상들이 있음의 느낌을 강요할 때마다 모든 느낌이 없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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