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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원치 않아도 왕이 되어야 하는 팔자>의 줄거리:
'팔자'란 출생의 연, 월, 일, 시를 근거로 점쳐본 일생의 운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피할 수 없음', '필연적인 상황'을 실감하려는 비유적인 표현이지요. 예수님을 믿으면, 물론 제대로 믿는 경우, 원치 않아도, 심지어 싫어도 왕이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 믿습니다. 그러면 섬김의 마음이 되고 그러면 왕이 될 팔자입니다.
원치 않아도 왕이 되어야 하는 팔자
(누가복음 22장 28절~30절)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원치 않아도 왕이 되어야 하는 팔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원치 않아도 왕이 되어야 하는 팔자’
‘팔자’라는 말은 출생의 연월일시를 근거로 점을 쳐보는 인생의 운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목은 이런 미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고 필연적이라는 의미를 실감하기 위해 비유적인 표현으로 동원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원치 않거나 싫어서 발로 차고 싶을지라도 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늘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일은 의식에서 일어나고, 의식에서 이러한 일이 지속될 때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 있음의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있음의 느낌은 온전한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나 있음의 느낌이 온전히 충만해져서 만성적인 열등감이 극복된 상태가 되면 원치 않아도 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되기가 너무 싫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을 중단하면 왕 되기도 중단됩니다. 그러나 죽어도 예수님 믿는 것을 중단할 수 없다면 아무리 싫어도 왕이 되어야 할 팔자를 받아들여만 합니다. 왕이 될 팔자는 싫어도 피할 수가 없고 거부해도 따라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왕 됨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사건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함은 육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예수님과 함께함의 양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언제나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29~30절에서 대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은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라 서서 봉사하는 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짜 큰 자는 어린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라고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또 30절을 보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앞서 스스로를 섬기는 자로 비유하신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맡기시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섬김을 강조하신 말씀과는 상치되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체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우선 ‘나라를 맡기다’라고 하실 때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일컬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한 나라는 주권 즉 통치권을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나라를 맡기셨다는 것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맡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맡으신 주권을 제자들에게 넘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제자들에게 넘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아서 맡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맡은 자로 살아보신 적이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섬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주권은 통치권이고 다스림입니다. 앞서 강조하셨던 섬김과는 상치되는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어감의 두 단어는 연결점이 있습니다. 섬기는 자의 마음이 준비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을 맡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섬김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맥락을 떠올려봅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는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다툼은 열등감에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이 열등감에서 빠져나온 사람만이 섬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 있음의 느낌 즉 나의 존재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열등감은 사라집니다. 내가 작고 낮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나 자신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가질 필요 없는 상태가 됩니다.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섬김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접촉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를 느낄 때 열등감에서 빠져나오는 자기 존재감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감의 충만함을 얻을 때 섬김의 상태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섬김의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주권이 맡겨지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나라 즉 주권을 맡기셨습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온 세상과 우주를 향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고 단 한 순간도 중단될 수 없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나 들에 핀 백합화가 피었다 지는 것이나 내 머리카락이 몇 가닥 빠지는 것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행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영구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맡으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현장에 계실 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맡은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는 늘 아버지를 주시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을 맡기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하신 것과는 모순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순된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말씀은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나라를 맡기셨다는 의미를 알 수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주권을 맡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현장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계시고 열두 제자가 있었으며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추종자들 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을 섬기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또 추종자가 아닌 군중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사두개인 대제사장 헤롯 당원이 있었고 그리고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는 이처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관계를 이루고 계셨고 특별한 관계가 없을지라도 만남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예수님에게 맡겨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전 설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맞물린 톱니바퀴에 비유하였습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해봅니다. 만남의 관계는 맞물린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이 영향을 받습니다. 거꾸로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도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이 마치 맞물린 톱니바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돌아가면 다른 한쪽도 따라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삶의 현장을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있었고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이천 명이 있었다고 가정을 해봅니다.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있습니다. 이 주권적 뜻이 톱니바퀴가 되어서 유독 예수님과 맞물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예수님의 톱니바퀴를 움직이면 예수님과 만남을 이루고 있는 만이천 개의 톱니바퀴들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만이천 명이 모여 있는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유독 예수님에게 맞물림으로써 예수님의 톱니바퀴가 움직이면서 제자들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고 제자들과 만남을 이루고 있는 만이천 명의 톱니바퀴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만남을 이루고 있던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퍼지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의 주권이 예수님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내려와서 첫 번째로 닿는 그 사람에게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이 맡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내용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예수님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톱니바퀴도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톱니바퀴가 열 개든 백 개든 천 개든 만 개든 다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열두 개의 톱니바퀴로 상징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났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나 수가성 여인이나 로마의 백부장과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에서는 그 현장을 내려다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언제나 예수님과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은 예수님에게 연결되어서 재림 때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퍼지는 하나님의 주권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주권을 맡으시는 일을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는 공생애 기간이 끝나는 때에 제자들에게 넘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지 않더라도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고 또한 마음을 예수님 안에 들여보낸 자들이기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주권과 첫 번째로 맞물리는 톱니바퀴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9절의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임할 때 맞물리는 첫 번째 톱니바퀴가 됩니다. 십자가를 거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면서 나의 있음을 느끼는 열등감의 상태가 중단됨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느낌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 있음의 느낌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등감이 극복되고 섬김의 마음이 준비됩니다.
섬김의 마음은 나를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이 준비될 수 없다면 내가 포함되어 있는 삶의 현장을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은 임할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더욱더 크게 되고자 하고, 더욱더 높아지고자 하고, 더욱더 많이 얻고자 한다면 존재감을 키우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내가 속한 삶의 현장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은 임할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은 나의 방해로 말미암아 다 손상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의 있음을 느낄 때 존재감은 온전해지고 충만해집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권은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조금의 손상도 없이 삶의 현장에서 다 표현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이나 성전 정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같은 사랑이 제자들에 대해서는 늘 교훈하시고 아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하나님 주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섬김의 마음가짐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완벽히 표현해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일체 되심 속에서 하나님께 기대어서 당신 자신의 있음을 느끼셨기에 충만함 속에서 섬김의 자세는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현장마다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첫 번째 톱니바퀴로 맞물릴 수 있었고, 예수님과 만나는 톱니바퀴들 쪽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이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있을 때 가족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형제자매관계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회사에서의 관계들이 맞물려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하나님의 주권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계속하여 먹지 못해 섬김의 자세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어느 한 사람에게도 임할 수가 없습니다. 통째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면서 멸망의 길로 가도록 이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섬김의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현장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그 사람에게 맞물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혼자 믿음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늘 먹는다면 세상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끊어지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 있음을 느끼고 충만한 상태가 되고 섬기는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정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톱니바퀴가 되어서 나와 맞물리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을 향한 궁극적 구원을 지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를 통해서 가족 전체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가정이라고 하는 상황에 대한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이 맡겨지는 모습입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노예는 완전한 섬김을 위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특징은 늘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꿈을 꾸는 자’라는 것은 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감에 대한 충족함이 있었기에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보디발은 요셉에게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기게 됩니다. 보디발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요셉에게 맞물리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의해 투옥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투옥된 곳은 하필이면 바로의 왕궁 감옥이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의 첫 번째 톱니바퀴가 되었고 감독이 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감옥에 들어온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이르렀고 총리에 등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되어서 근동지방 전체를 기근에서 구하게 됩니다. 요셉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자기 충족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애굽뿐만 아니라 근동지방 전체의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요셉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가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고 바로 앞에 섰을 때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은 모세와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이 내려서 애굽이 초토화되고 이백오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애굽과 근동지방 전체를 놓고 볼 때 요셉 한 사람의 비중, 애굽과 이백오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볼 때 모세 한 사람의 비중은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또한 이와 같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의 운명이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불신앙입니다.
요셉은 노예였을 때에 이미 애굽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애굽과 근동지방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노예인 요셉에게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애굽과 근동지방의 나라들에는 왕이 있었고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맞물려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섭리는 임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는 분리된 채로 멸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서 나 있음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가진 사람은 요셉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을 구원의 역사를 위한 주권을 맞물려 움직여 가실 사람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은 대통령이나 여야의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요셉처럼 하나님 있음의 느낌으로 나 있음을 느끼며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섬김의 준비가 되었을 때 대한민국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여러분을 첫 번째 톱니바퀴로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구원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한 청년이 대기업의 말단 사원으로 입사를 했다고 해봅니다. 말단 사원 위에는 수많은 상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단 사원이라도 입사한 이상 회사의 모든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셈입니다. 이 사원이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을 계속 먹으면서 예수님 안에 마음을 보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맡겨져 있던 이 회사에 대한 주권이 말단 사원에게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회장님이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관점이며 사실입니다.
온 세상은 마귀에게 속아서 열등감에 절어있습니다. 대기업의 회장조차 열등감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말단 사원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섬김의 준비가 되어있다면 회사는 말단 사원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회장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같아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회사 그룹 전체를 향하고 계신 주권의 톱니바퀴가가 말단 사원과 연결이 됩니다. 애굽과 근동지방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노예였던 요셉에게 맞물렸고 모세에게 맞물렸던 것과 같습니다.
싫어도 원치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날마다 먹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주권의 첫 번째 톱니바퀴가 되어서 왕이 되기 싫다면 십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됩니다. 다시 열등감으로 빠져들어 간다면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극복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먹고 자기 존재감을 가진 섬김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기필코 왕이 될 팔자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속한 단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여러분 한 사람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싫어도 원치 않아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왕으로서 살아가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밥 먹듯이 반복함으로써 섬김의 준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각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주권의 톱니바퀴에 맞물리는 첫 번째 톱니바퀴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