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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십자가 생활화를 잊게 하는 좀비 본성_태승철 (누가복음 22장 31절~3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3.25|조회수6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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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생활화를 잊게하는 좀비본성>의 줄거리:

예수님을 부르며 믿고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본성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할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과 십자가에 대한 기억상실입니다. 베드로가 보이는 십자가 앞에서의 좌절이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본성을 아시고도 품으십니다. 돌이킬 것을 바라시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잊게 하는 좀비 본성

(누가복음 22장 31절~34절)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잊게 하는 좀비 본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잊게 하는 좀비 본성’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좌절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를 통해 전해 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회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제기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를 속하여 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았다.”라고 생각한다면 십자가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말씀 앞에 서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24시간 365일 십자가를 기억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본성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사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향해서 총공세를 펼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밀 까부르듯이 강력하게 자기의 주장을 펼칩니다. 대신에 사탄은 공생애 때의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만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은 아무리 기억해도 구원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써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가 불편하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을 이미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가 삶의 현장에서 쉽게 잊히고 상실되는 경험 또한 해보셨을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본성이 십자가 생활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본성의 정체를 알아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쉽게 잊어버리는 이유도 본성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사는 것과 잘 맞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현실이 조금이라도 안타깝다면 그 이유가 되는 나의 본성부터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본성과 맞지 않는 이유는 나의 본성을 겨냥하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본성이 십자가를 거부하지만 십자가도 나의 본성을 거부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잘못한 것도 없고 대적한 적도 없는데 그 사람 자체가 거부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이러한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확하게 나의 본성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 어색하고 거북하고 불편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본성과 십자가는 천적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이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나 자신이 되어버린 성향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굴러들어온 돌과 같습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인 본성을 뽑아내기 때문에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생활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본성이라는 박힌 돌을 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굴러들어온 돌인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드라큘라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십자가를 들이대서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의 본성은 바로 드라큘라와 같기 때문에 이 본성을 쫓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이대야만 합니다. 그런데 본성과 십자가가 천적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들이대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본성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미 나 자신이 되어버린 본성이기에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필요가 없습니다. 이 상태로 예수를 믿으려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는 없습니다. 본성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성을 겨냥하고 있는데 정작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본성을 껴안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성이 곧 죄입니다. 죄를 버리지 못하기에 죄 사함도 없습니다. 죄 사함을 통하여 소멸되어야 할 죄가 바로 본성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진정한 의미의 죄 사함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행위로 지은 죗값에 대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정도의 생각이 존재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로 내몰릴 예수님을 보고 좌절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좌절하게 됩니다. 다만 베드로의 좌절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본성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24시간 365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있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의식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28절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나타나는데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모두 함께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고, 제자들의 입장에서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양상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육체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먹음으로써만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죽음으로 여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내 안에 퍼지면서 죽음의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나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일이 항상 일어나야만 합니다. 세상을 대할 때에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살아있을 때와 비교하자면 살아있음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함께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서 이 세상에 대해 살아있음이 나타나지 않아야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가 목표로 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의 본성과 근본적인 부딪힘을 일으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먹으면 마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을 대할 때에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우리의 본성은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내 본성과는 맞지 않다고 여겨져서 거북하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고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겨냥하고 있는 본성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문제가 발견됩니다. 십자가가 겨냥하여 없애려고 하는 본성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베드로를 향해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본성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본성이 십자가의 천적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문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본성을 대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성을 대적할 수 없다면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예수 믿음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지닌 본성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구조를 떠올려보면 도움이 됩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고 몸이 있습니다. 이 마음과 의식과 몸은 구분될 수 있지만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있음을 느낍니다. 마음은 비어있는 공백의 상태이기에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있음의 느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말씀드려 왔습니다. 마음은 있다고 느끼는 첫 번째 대상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의식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의식과 행동이 마음의 상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될 인간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릴 적에는 엄마 아빠의 있음만을 느끼다가 자라면서 조금씩 있음의 범위가 커지며 세상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 것들의 있음을 느끼는 상태는 하나님과의 연결과 맞물림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 공백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따라서 구조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없다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기능만 남아있을 뿐이지 실제로 작동하지 않아야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않은 상태는 연료 없는 자동차나 충전되지 않은 핸드폰과 같은 것이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움직여야 되고, 감정은 하나님의 감정을 받아야 되고,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 움직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말과 행동 또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기 위해 그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담지 않고도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갑니다. 정상적인 상태가 끊어졌음에도 작동하고 있으니 비정상적인 작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성전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떡상은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을 때에 느껴지는 만족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금촛대는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발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선악과 사건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드러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각자 처음으로 느꼈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둘을 부부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판단이 없다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은 있으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판단을 받아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했습니다. 연료를 채운 자동차처럼, 충전된 핸드폰처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연료 없는 자동차이고 충전이 다 소진된 핸드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여전히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연료가 채워지지 않은 자동차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선악과에 대해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판단하게 된 순간에 죽은 것이었습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하게 하는 하나님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연료가 떨어졌으면 멈추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치 좀비가 된 것처럼 비정상적 상태로 삶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식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보다 앞서서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까? 좀 더 간단히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애초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시는 여러분들에게만 드릴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7~8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고, 31절에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10장 29~30절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은 욥기 7장 19절에서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아시고 사랑하셔서 앞서서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의지하시는 분이십니다. 집안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나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갖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나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아시고 사랑하셔서 앞서서 행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고 느끼시지 않고 의지를 갖지 않으시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는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좀비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는 따로 생각하고 따로 감정을 느끼고 따로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찾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나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께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들이대고 이루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좀비들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비는 죽었는데도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첫 번째로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이러한 상태에서는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말도 행동도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죽었다면 죽은 채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비처럼 죽었는데도 움직입니다. 육체를 입은 귀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만 하는 이유는 좀비의 본성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소원을 집중할 수 없다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는데도 움직이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어떻게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느끼지 않고 의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되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거부반응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본성에 의해 십자가 생활화가 안 맞고 잊히고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본성 편에 서게 된 것이고 좀비 본성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비 본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동안 십자가 생활화는 요원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며 느끼고 의지를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아시고 사랑하셔서 앞서서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의지하고 계신다는 것과는 별도로 내가 따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드라큘라 영화에서 십자가를 들이대면 드라큘라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드라큘라는 영화에서처럼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 본성이야말로 드라큘라입니다. 내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귀가 바로 나의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될 대상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무섭습니다. 우리가 제일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강도가 아니고 원수가 아닙니다. 강도나 원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내 몸을 죽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 본성은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나의 인생을 차단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은 좀비 본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비 본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죽여야 될 목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수입이 줄어들어서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보다 배우자의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된 상황입니다. 배우자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발동하게 되었음을 알았다면 내가 육체를 입은 귀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귀신이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죽었는데도 움직이는 좀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된 나를 드라큘라를 박멸하듯이 십자가를 통해 박멸해야만 합니다. 나의 본성을 쳐 죽여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존하고자 합니다. 나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형통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여전히 내가 사랑스럽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착각만이 생겨날 뿐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혹시 형통할까 기대를 갖는 것은 하나님과는 별도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나의 본성을 박멸해야 될 드라큘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들이대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러한 각오가 있을 때 비로소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본성에 따라 살았다면 좀비로 살아온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본성을 겨냥해서 박멸시키고자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본성을 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베드로처럼 십자가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 앞에서 다시 일어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품으셨듯이 우리를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단서를 붙이십니다. 형제들도 좀비 본성에 의해 십자가 앞에서 좌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돌이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돌이켜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는 별도로 내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시키는 상황에 대해서 돌이킬 때 주님은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나의 본성이 드라큘라이며 악마이고 귀신임을 알고 십자가에서 이 본성을 죽이는 것이 돌이킴입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나의 본성이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이겨야 될 문제입니다. 설령 나를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는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진짜 싸워야 될 대상은 좀비 본성입니다. 이 좀비 본성의 정체를 알아야만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33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공생애 예수님과 함께하겠다고 했던 베드로의 각오 대신에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하겠다는 각오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질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직접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의 현장에서 오감으로 포착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아시고 사랑하시고 앞서서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의지를 발동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별도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동하며 말과 행동을 하는 좀비의 삶이 그 정체성을 적으로 겨냥함을 통하여 십자가 생활화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기필코 십자가에 약속된 모든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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