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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과 세상유대 끊는 검객의 삶>의 줄거리:
십자가를 코앞에 두신 때에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달라질 제자들의 삶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삶은 검객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칼을 휘두르는 칼잡이의 삶을 통해 자르고 끊고 베어내야 할 것은 바로 내 마음과 이 세상 간의 유대입니다.
마음과 세상 유대 끊는 검객의 삶
(누가복음 22장 35절~38절)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과 세상 유대 끊는 검객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과 세상 유대 끊는 검객의 삶’
마음에서 이 세상의 유대를 끊어내는 검객의 삶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대(紐帶)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끈과 띠라는 뜻으로, 둘 이상을 서로 연결하거나 결합하게 하는 것. 또는 그런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끊어내야 할 끈과 띠는 무엇일까요?
몸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세상과 유대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를 끈과 띠로 삼아 세상과 유대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결합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떠올려봅니다. 사람은 몸이 있고 그 안에 의식이 있고 가장 안쪽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있음을 느끼게 되면 세상과의 유대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세상에 대한 존재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합의 끈, 연결의 띠는 있음의 느낌입니다. 열애중인 연인은 상대방의 존재감을 최대로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러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의 존재감도 작아집니다. 헤어지게 되면 더는 상대방의 존재감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이로써 유대는 끝나게 됩니다. 부부가 헤어지면 남이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혈육상의 관계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상대방의 존재감에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상대방의 존재감이 없어지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와 결합되어 유대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감이 내 안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감이 크면 유대도 깊고 강해지고 존재감이 작으면 유대도 약해집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 세상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끊어내는 검객의 삶이 됩니다. 예를 들어 세상과 유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고, 부모는 자녀의 있음을 느끼고, 자녀들은 형제자매의 있음을 느낍니다. 혹은 밖에서는 직장의 있음을 느끼고,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의 몸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있음의 느낌을 통해서 마음은 세상과 유대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에서는 세상과 연결된 끈과 띠를 칼로 끊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유대가 끊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끊어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있음을 느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음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기에 세상과의 유대를 끊는 것입니다. 또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유대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은 종교의 신으로만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이 직접 접촉하여 느끼는 유대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하여 세상 있음의 느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와 형제자매 혹은 직장이나 나의 몸에 이르기까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말씀의 방점을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에 감사”에 둡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풀어보자면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쉬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라. 그러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말에 담긴 정확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항상 있고 쉬지 않고 있고 범사에 있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머물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유대가 끊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자르는 검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전에 하신 말씀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신발을 언급하신 것은 단지 그것만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호의에 의해서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조달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와는 다른 의도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이라는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필수품을 준비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을 통해서 조달받을 수 있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이 말씀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염려하고 준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29~30절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만 역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70인 제자를 파송하시고 이들이 사람들의 호의를 통해 생필품을 조달받은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먹고 마시는 일은 조달될 것이고 삶은 진행될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았을 때 느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유대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대감을 깨시고자 하십니다. 즉 본문의 말씀은 스스로 생필품을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경험에서 비롯된 세상과의 유대를 깨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의식을 일깨우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때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의 세계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가지고 세상과의 유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과의 유대를 끊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36절의 하반부를 보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저항 없이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검으로 적에게 저항하고 무찌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겟마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끝나고 가룟 유다가 끌고 온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실 때에 제자들 중 하나가 병사 한 명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류하시며 오히려 귀를 다시 붙여주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신 검이란 무력으로 사용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검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도 추측이 난무합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검을 통해 하신 다른 말씀을 살펴보면 좋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검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검이 주어질 것이기에 모든 사람이 검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검을 가진 검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35~38절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세상 있음의 느낌을 갖게 되는 가장 가까운 대상은 바로 가족입니다. 부모는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유대를 갖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부모라고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대상인 이상 유대를 갖는 동안에는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검으로 삼아서 부모와의 유대조차도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 부모의 마음은 세상에 유대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 또한 세상에 속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검으로 삼아 마음에서 자녀에 대한 존재감을 쳐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다른 십자가를 진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죽어야만 하는 본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 본성이 좀비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으로부터 지정의와 언행이 움직이게 되는 좀비의 본성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삶이란 날마다 검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며 돌이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베드로는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모든 유대를 끊어내는 검과 같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유대를 갖고 있던 자신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가지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는 가정에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는 말씀을 가정에 적용해봅니다. 겉옷은 우리가 말하는 외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지방에서 겉옷이란 신체를 보호할 수 있는 천막이자 이불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겉옷은 한 번 구비하면 평생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겉옷은 바깥에 걸친다는 점에서 외적 환경에 대한 의식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대한 유대를 끊는 것을 의미하는 검과는 의미가 상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십자가 사건 이전이었기에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통해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겉옷을 팔고 검을 사라는 것은 세상에서 외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말고 의식에서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검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가족들과 유대를 이루고자 가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쳐내기 위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세상에 마음을 붙이라고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라는 범주 안에서 있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들인 가족과의 유대를 끊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속한 가족들과 모든 일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가지시고 지정의와 언행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직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보내신 이유는 승진하고 매달 월급 받아오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직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라는 검을 휘두르는 검객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으로 있음의 느낌을 강요하며 뚫고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유대를 다 끊어버리는 것만이 직장에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직장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이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주신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결혼은 배우자 앞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유대를 십자가로 끊어내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낼 때만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십자가의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세상의 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유대를 십자가의 검으로 끊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 믿기는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몸이 향하는 곳에서 세상 있음을 느끼는 대상들을 십자가의 검으로 끊어내고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들은 우리의 마음에 있음의 느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그것들의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하여 어느 것 하나라도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종교의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내가 존재감을 느끼는 세상 것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 것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접촉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사랑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어떻게 보자면 급진적이고 과격한 내용들을 다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평생에 할 일은 예수님 믿는 것 하나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평생을 예수님을 믿고 살았어도 그러한 말을 했던 경험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그런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유대를 맺게 되는 외적인 삶에 대한 모든 신경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 바깥에 있는 대상이라면 설령 가족일지라도 겉옷이 상징하는 바와 같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몸이 있기에 벌어지는 외적인 환경에 대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검으로 삼아 나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유대 즉 세상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37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자란 세상이 정한 풍조와 가치관에서 이탈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이 정한 풍조와 가치관을 검으로 끊는 자들이기에 불법자의 동류처럼 여겨지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불법자라고 하니 현행법을 어긴 범죄자라는 말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부담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범죄자가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치기준이나 풍조나 유행으로부터 이탈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각오가 없다면 예수님 믿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바뀌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검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낼 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 있음의 느낌은 모조리 잘라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일평생 세상과의 유대를 자르는 검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38절을 보면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검을 무기라고 생각하여 지금 검 두 자루가 있다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마주하지 못한 제자들의 한계를 아시고는 족하다고 하시면서 더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 모든 말씀을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검을 쥔 검객들입니다. 오늘도 삶의 현장마다 세상의 대상들은 오감을 통하여 의식을 뚫고 들어와서 있음을 느끼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유대를 십자가로 베어내는 검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 가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관계 또한 예수를 믿기 위해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대상들로부터 있음이 느껴질 때마다 십자가 검으로 잘라냄으로써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사랑의 고백이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됨을 통하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 되는 하늘의 아들과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모든 십자가 검객들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내려지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