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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초짜이신 예수님의 몸부림>의 줄거리:
저주는 재앙과 불행을 빌거나 바라는 행동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주어진 재앙과 불행 자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알레르기 반응을 하며 싫어하고 거부하고 괴로워하신 그 저주에 대해서 우리는 익숙하다 못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정말 저주에는 초짜이신 예수님의 몸부림이 땀에서 피가 나올 지경에 이릅니다. 쯧쯧!
저주 초짜이신 예수님의 몸부림
(누가복음 22장 39절~46절)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저주 초짜이신 예수님의 몸부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저주 초짜이신 예수님의 몸부림’
어떤 분야에서든지 초짜가 있습니다. 초짜는 어떤 일에 대해서 전혀 능숙하지 못한 상태를 낮잡아서 이르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저주에 대해 초짜 중에서도 초짜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초짜라고 부를만한 상황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음식 먹는 일에서조차도 초짜는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강릉에 오시는 분들을 두부를 주재료로 한 식당에 모시고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부가 나오는데 손도 대지 않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두부 맛을 모르시는 두부 초짜이신 셈입니다. 강릉에서 만들어지는 두부는 참 달고 고소합니다. 제가 강릉에 와서 쾌재를 부른 것이 바로 이 두부 때문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직접 만드는 두부가 아니라도 마트에서 파는 두부까지도 다른 곳에서 파는 두부와는 맛이 다릅니다.
한편 제가 커피에 대해 초짜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습니다. 저는 커피를 마실 때 설탕을 많이 넣는 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보통은 그냥 속으로 “설탕을 많이 넣으시네.”라고 하면서 넘어가시든지 웃으면서 “달게 드시네요.”라고 하는 정도지만 커피에 까다로우신 분들은 정색을 하면서 놀라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저는 커피 맛을 모르는 초짜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저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베테랑이고 달인입니다. 여기서 저주란 인류에게 주어진 재앙과 불행을 의미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온 세상에 임해있는 저주에 대해서 유일하게 초짜였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저주를 앞에 두고 보이시는 반응을 보면 혀를 찰 정도로 능숙하지 못한 초짜의 모습입니다. 인류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저주를 능숙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저주에 대해서만은 어설픈 초짜의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시면서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45절을 보면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느꼈던 슬픔은 예수님이 느끼셨던 슬픔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로 큰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꾸 죽는다는 말씀만 하시고 기대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기에 제자들은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정복의욕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꾸 뒤로 물러나시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잠든 제자들의 모습은 광풍노도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오히려 광풍노도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든 때에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몸부림을 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괴로워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이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에 그 예감 속에서 괴로워하셨다는 오해를 하고는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채찍에 살이 찢기고 배는 창에 찔리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셨기에 42절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을 떠올려보자면 예수님 또한 단지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셨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교 때의 스데반 집사님이 당한 고통은 예수님 못지않은 것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멀리서 돌을 던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커다란 돌을 가져다가 스데반 집사님을 찍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의 순간에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마음에서는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하며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스데반 집사님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리 십자가의 고난이 극심하다 할지라도 피해가고자 몸부림을 치셨을 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수난을 당하는 순간도 아니었기에 미리 당할 수난을 예감하시고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셨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하셨던 이유는 바로 저주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저주가 재앙이고 불행인 이유는 마음을 붙이고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진은 큰 재앙입니다. 그런데 지진이 나서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마음에서 밀착시키고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무사하다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큰 저주는 될 수 없습니다. 재앙이나 불행을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무엇을 재앙과 불행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즉 마음에 붙이고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붙이고 계셨고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던 것을 잃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을 저주에 던지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저주의 내용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좋아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에게 마음을 붙이고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미오의 마음에서 줄리엣을 떼어내려고 할 때 로미오는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줄리엣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그러한 대상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이 부도가 나자 자살을 합니다. 사업가의 마음에서는 사업이 밀착돼있는 상태였고 소중하고 좋아했던 대상입니다. 그런데 부도가 나서 사업이 마음으로부터 찢어지게 되자 고통스러워하며 더 이상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들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너무나도 좋고 소중하기에 차라리 자기가 죽었으면 죽었지 자녀를 먼저 보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자녀를 잃게 되었다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고통스러워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줄리엣을 잃은 로미오라고 생각하고, 사업이 부도가 난 사업가라고 생각하고, 자녀를 잃은 부모라고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마음에 붙이고 있는 대상을 잃게 되는 것이 바로 저주이고 재앙이며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을 재앙으로 느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의 상태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로미오는 줄리엣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사업가는 사업을 느끼게 되었고, 부모는 자녀를 느낍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양한 대상들의 있음을 느끼고 살아가는 상태야말로 저주받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그러한 상태에 던지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 대해서 예수님은 조금도 능숙하지 못한 초짜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과는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거부하시고자 한 상태에 대해 모든 인간들은 베테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찢어진 마음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는 저주의 상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오히려 저주의 달인이 되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작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단 사흘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어 계실 것을 참지 못하시고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대체 뭐가 그리 큰 문제라고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일까요? 이제까지 우리는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해도 어려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사흘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이토록 괴로워하고 계시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없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를 모르기에 맨날 교리와 이론을 배워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주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라고 배우면서도 삶에서는 여전히 저주의 베테랑이자 달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주에 익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따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야말로 기도의 정수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저주의 달인으로서 저주 속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기도를 따라 하고자 하면 할수록 저주로부터 구원받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다시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단 한 차례 존재해야만 하는 기도였기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되고 따라 할 필요도 없는 기도입니다. 42절의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는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따라 하고자 한다는 것은 여전히 저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저주 속에 던지시고자 하는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떼어내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내 원대로’는 하나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이 너무나도 싫지만 아버지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그렇게 하셔야만 한다면 따르겠다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보내실 때도 하나님과 분리되셨던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사흘 동안을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이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기간에는 예수님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달랐던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라고 기도하셨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뜻이 다르셨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소에 결코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신 상태에서 당신의 뜻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져야 될 상황을 앞에 두고 유일하게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뜻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조차 단 한 번 하셨던 이 기도를 우리가 반복해서 드리고자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정류장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에 빠진 자들을 태우시고자 하는 기차이십니다. 이 정류장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께 올라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밀착하게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내 뜻이 생기지 않습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소원이 이루어지면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일이 되어갈 때 기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먼저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접촉이 있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중에 어떤 소원이 생긴다면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내 소원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신실하다 오해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나의 뜻을 포기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태를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이 포기하신 것은 세상에 대한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내 뜻이 생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임금님을 독대하는 신하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신하가 임금님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한껏 펼친 후에 “제 뜻은 이렇지만 임금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 뜻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상황은 괘씸합니다. 어떤 신하도 임금 앞에서 자신의 뜻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임금의 명에 따를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고 있는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의 상태에서는 저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저주로부터 빠져나가고자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마음을 붙이고 있는 대상들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마음을 붙인 자녀가 형통치 않거나 사업이 안 풀리는 등의 세상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저주라 여깁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저주란 바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접촉이 끊어져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야말로 바로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면 내 뜻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면 그 느낌에 의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은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내 지정의에서 나온 대로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접촉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돼있는 상태가 되면 나의 지정의로부터 나타나는 소원이더라도 그것은 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내게 있는 소원이 나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그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해 있다면 평강이 존재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만족감이 존재합니다. 이 상태가 확인이 되면 내 지정의의 움직임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에 의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분리되는 저주 속으로 던져지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단 한 번 하실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매일 반복하고 따라 한다는 것은 결코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접촉을 이룸으로써 내 뜻이나 내 감정이나 내 생각은 아예 생기지도 않기를 바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고 저주로부터의 극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내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말은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심리가 담겨있습니다. 나의 뜻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버지가 나보다 훌륭하시니까 인생의 형통을 위하여 일단은 따르겠다는 속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본 결과 내 뜻대로 해봐서 안 됐습니다. 나의 인생의 형통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 뜻을 포기하고 양보할 테니 어떻게든 형통하게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옳지 않습니다. 끝까지 아버지와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내 뜻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담대함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포기하겠다는 배짱을 부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저주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저주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주의 달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주의 상태를 전제로 놓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기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아버지와 떨어지기 싫어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내 뜻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기도를 하신 이유는 아버지와 떨어져서 저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토록 싫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차가 되고자 하십니다. 기차가 승객을 태우려면 승객이 있는 정류장까지 가야만 하듯이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류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단 사흘 동안도 격리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 뜻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까지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는 단 사흘을 하나님과 떨어져 계신 것을 땀이 피가 되도록 괴로워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는 저주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저주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광풍노도 속에서 예수님이 주무시고 제자들이 몸부림쳤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초짜이셨고 제자들은 저주의 달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던 중에 잠이 들었습니다. 이 슬픔은 저주의 달인들이 갖는 슬픔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가서 무찌르고 정복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의기소침 하시면서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은 참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속해있는 저주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이토록 괴로워하시는데, 정작 그 저주 속에 살고 있는 제자들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저주의 상태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속에서 사는 베테랑이고 달인이 되었기에 저주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조차도 저주의 달인의 입장에서 해석합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서 별도의 내 뜻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 충성하고 크게 선심이라도 쓰듯이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를 따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내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을 잃는 일에 대해서만 단 한 번 하실 수 있었던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결혼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저 남자는 별로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결혼하겠습니다.”라는 기도는 있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결혼문제는 십자가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앞둔 자가 드릴 수 있는 기도란 십자가를 검 삼아 결혼이라는 문제를 잘라내는 것이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밀착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면 결혼을 안 해도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주어집니다. 그러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저 사람과 결혼을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저 사람과 결혼을 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아버지의 뜻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담기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검으로 삼아 마음과 달라붙은 문제 있음의 느낌을 잘라냄으로써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문제와는 상관없이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았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은 곧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쉬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범사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리하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내용은 “이 일을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검 삼아 마음에서 세상일들의 있음을 잘라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밀착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내 뜻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저주에 능숙한 베테랑이자 달인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저주의 초짜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거북하고 어색하고 짜증나게 여기는 저주 초짜의 모습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동일시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주 초짜이신 예수님의 피가 섞인 땀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전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분리돼있는 마음의 상태를 예수님처럼 싫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는 한순간도 숨조차 쉴 수 없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