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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_태승철 (누가복음 4: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9.10|조회수76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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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의 줄거리:

'종속'과 '자유'. 에덴 동산이 기쁨의 동산이었던 이유는 이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에게만 종속 됨으로써 다른 모든 이 세상 삶의 대상들로부터 자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에 넘어간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 종속과 자유의 대상이 바뀌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 상황을 다시 뒤집어 놓으십니다.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

(누가복음 4:1~8)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

어제에 이어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지만 엄연히 하나님이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시험이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에게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기에 예수님은 시험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지만 여전히 삼위일체 되심 안에 계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심지어는 타락한 천사인 마귀와 사탄의 창조주이기도 하십니다. 천사도 마귀도 피조물인 이상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을 시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앞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모습으로부터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죄악에 대한 자가진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에 찌든 인격은 살아있는 동안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극악한 해만 줄 뿐이기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이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실 예수님께 마음을 들여보내고 머무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믿어야 할 구세주이며 보금자리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야 되는 과정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침례가 상징하는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광야시험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 머무는 사람들도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광야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은 반드시 일상적인 시험으로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단 하루도 이 시험이 주어지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세 가지 시험을 이긴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시험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 이길 수 있는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이 머물 아파트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마음에 품으신 채 내가 만나야 할 시험을 대신 받으셨고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시험 받으심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나의 마음이 연합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세례나 광야시험은 불필요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땅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때에 이 모든 역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내게서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땅이 열리는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죽을 각오로 예수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끝까지 둘 것인가 말 것인가가 확정이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떠나버렸고 제자들도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기가 중단될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시금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 마음을 두고 머무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 시험들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를 통해 연합한 예수님이 이기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이기신 승리의 결과를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담이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잃게 된 에덴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시험이 내게서 승리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질 때에 떡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에덴이 상징하는 기쁨과 평강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제목은 내 몸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마귀는 계속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마음을 나의 몸과 타인과의 관계에 종속시키고자 합니다. 반면 에덴의 특징은 하나님 한 분께 종속됨으로써 내 몸과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였습니다. 마귀는 이것을 뒤집어놓았습니다. 지구의 75억 명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는 자유롭고 이 세상에 대해 종속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종속은 내 몸에 대한 종속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두 번째 종속은 타인에 대해 종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본문의 두 번째 시험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권위와 영광이라는 요소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험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어제 살펴보았던 첫 번째 시험에 대해 잠시 떠올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이 시험은 단지 은혜롭게 여기며 넘어갈 만한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시험은 몸이 죽는 순간까지 따라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자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시험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고 이 시험의 의미를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라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두 가지 단어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과 산다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이 마귀 시험의 핵심이며,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신 전제조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육체의 목숨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떡을 먹어야 합니다. 환자가 5일만 음식을 거부하면 곧 돌아가시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육체의 목숨이 지속되는 것을 넘어섭니다. 뇌사자의 경우 목숨은 유지되고 있으나 삶이 없습니다. 추구함 즉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과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상태를 살아있다고 하지 않고 뇌사자 또는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에도 목숨이 유지되기 위하여 떡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떡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낮에는 중동의 태양이 작열하고 밤에는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떡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해보신 분이라면 이 상태가 어떤지 잘 아실 것입니다. 삼일만 금식을 해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하늘에서 폭포수 같은 은혜가 내리는 것에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라 음식 메뉴가 폭포수 같이 임하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평소에 이렇게 많은 음식 메뉴를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대망의 꿈을 안고 금식에 들어갔는데 이틀째만 되어도 마음이 음식에 정복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하물며 사십 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은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떡을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도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떡을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사십 일간의 금식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먹는 음식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받으신 성령께서 책임지시리라는 믿음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사십 일을 금식으로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절대로 떡을 추구함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기에 몸을 살게 하는 떡도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 있기에 스스로 관여할 바가 아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설령 사십 일 금식에 이어서 열흘을 더 금식하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그대로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알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몸이 살기 위한 떡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시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내 몸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밀고 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대한 믿음을 꺾으려 합니다. 슬슬 한계가 왔으니 이제는 나서야 되지 않겠냐는 유혹을 합니다.

떡이라는 문제는 몸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필요성의 상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것이고 에덴에 들어가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하나님이 알고 계심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 채 절대로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낼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어서 나타나는 권위와 영광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5~7절을 보면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라고 하니 마음에 와닿지 않으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구해본 적도 없고 구할 생각도 없으며 그저 가족이 건강하고 머물 집이 있고 세끼 먹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마귀에게 절하면 그것을 정말로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얻겠다고 마귀에게 절을 한다고 해서 마귀를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에 마음이 경배하고 섬기는 대상은 마귀가 아닌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는 것은 그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의도는 자신을 섬기라는 것에 있지 않고 천하만국을 갖고 싶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8절에서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대답하십니다. 천하만국보다 하나님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절을 요구한 것으로부터 하나님께 절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마귀가 진짜 요구한 것은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좋아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라면 마귀에게 절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단지 마귀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좋아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좋아하겠다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침 흘리는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이 마귀에게 절하는 것보다 더욱 악합니다.

 

그렇다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천하만국의 권위란 75억 명으로 이루어진 모든 나라와 민족과 정권이 내 발아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나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입니다. 이 권위가 무력을 통해 나올 수도 있으며, 학자들 세계에서는 지식을 통해 나타날 것이며, 목사님들에게서는 예배당의 크기나 교인 수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란 타인을 나에게 복종하게끔 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런 대단한 권위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은 삶 속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무릎 꿇기를 바라는 본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부부관계에서 배우자가 내 말에 따르기를 바라고 설득되기를 바라고 공감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만국의 권위를 구하고 추구함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타인에게 내가 관철되기를 바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공감대를 형성해주기를 바랍니다. 고작 두 사람이 만날 때에도 이러한 권위의식은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편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영광은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조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나를 우선적으로 크게 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을 받는 상태입니다. 금메달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금메달을 딴 그 순간에는 경기를 보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찬양하고 박수를 치기 때문입니다.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골을 넣을 때마다 모든 관중들의 마음에서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타인의 마음에서 환하게 보이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 또한 고작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배우자의 마음속에서 내가 조명을 받는 유일한 존재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모두 천하만국의 영광을 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나를 관철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순간에는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나의 기쁨과 만족이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앞서 말씀드린 떡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필요성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내 목숨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필요한대로 공급하실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으로써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삶이 가벼워지고 마음에 행복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부디 이것을 경험하시고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서 간증을 해주시는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이는 또한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에 대해 자유로워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느냐에 대한 관심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다가 그 이미지가 깨질 위기에 처할 때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도 불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은 내가 관철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나의 생각이 통하고 타인의 마음에서 내가 주목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방송을 보면 BTS를 필두로 한 아이돌 그룹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팬들이 따라다니고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타인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최고로 꼽는 것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예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유명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이 해체될 때에 남겼던 말이 기억납니다. 인기가 주는 부담을 견딜 수 없어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기를 얻었으나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하면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샴페인 터트리는 그 순간뿐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져갈 행복입니다.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대답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겨있습니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에 배우자가 내게 굴복하기를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굴복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배우자로부터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만약 그러한 기대를 하고 있다면 예수님 바깥으로 나온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음을 기억하고, 내가 하나님께 굴복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집중하여 살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을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사장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니 따를 뿐입니다. 사장님의 마음에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마음에서 나의 이미지가 깨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예수님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신경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승복되어 계심을 점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으나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 하나님만 신경 쓰고 하나님께만 승복하신 결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는 각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미움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사건을 향해 밀고 나가셨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마주했을 때에 신경 써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승복하고 하나님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를 신경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만 신경을 쓸 때에 때로는 사람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또한 그러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 신경 쓰고 사람에게 승복하지 않은 결과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교의 순간에 에덴이 이루어졌습니다.

반대로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추구해서 그것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도 마음속은 썩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 차서 에덴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위와 영광이 좋아서 추구했다면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에는 결코 에덴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은 어떠한 결실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승복한다면 설령 사람들로부터는 돌로 쳐 죽이고 싶을 정도의 미움을 받을지라도 마음에는 에덴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유지함으로써 예수님을 나의 마음이 들어갈 아파트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에조차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염려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나를 관철시키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관철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승복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에게 진정한 에덴은 회복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 내 몸으로부터의 자유와 타인으로부터의 자유가 완벽하게 여러분의 것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직 한 가지를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써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내 몸으로 만나는 타인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만 종속되게 해주시옵소서.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떠하든 에덴을 느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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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강희 | 작성시간 20.09.11 아 삶의 전부를 깨닫게 하시는 영분별의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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