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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리스도 전공과목에 당황한 베드로>의 줄거리:
체포되셔서 재판을 받으시게 된 예수님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베드로에게 일어난 가장 심각한 일은, 이 세상을 향하여 가졌던 모든 바람과 희망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아직 몰랐던 것은 체포되면서부터 예수님의 진짜 그리스도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 전공과목에 당황한 베드로
(누가복음 22장 54절~65절)
55.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6.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7.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9.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60.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1.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3.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 전공과목에 당황한 베드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 전공과목에 당황한 베드로’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기도의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저주 속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로서 저주 속으로 던져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에 던져지시는 기간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인 사흘 동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토록 괴로워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생을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살아가면서도 편안하게 여기는 것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한편 이 말씀을 접할 때 예수님께서 저주 속에 던져지신 시점이 정확히 어느 때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던져지심 이후에 비로소 저주 속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로부터 탈출시키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저주 속에 던져지신 때로부터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은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 바깥에 계시던 공생애는 저주 속으로 던져지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마음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작업의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간을 다 이루시고서 비로소 저주 속으로 뛰어드십니다.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심으로써 비로소 저주 속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과 실제로 접촉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드려진 마음을 가지고 저주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언제 저주 속에 던져지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봅니다. 52~5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이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당하시게 됨을 의미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전부터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체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이 아직 저주 속에 던져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으로 던져지셨고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의 체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부인한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공생애 때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체포당하신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과 이유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께 의지하던 세상에 대한 바람과 희망은 예수님이 체포되심과 함께 송두리째 날아갑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님의 능력에 기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갖고 있었던 희망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자 두려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검을 사용하시는 것을 금지하시고는 말고의 잘린 귀를 붙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저항 없이 오라에 묶여서 잡히시게 됩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전율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예수님께 기반을 두었던 모든 세상적인 바람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에게 어떠한 바람과 소원도 가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과 관련해서는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실 것이라 믿었던 예수님은 오히려 검을 집어넣으라고 하시며 순순히 체포당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베드로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 예수님을 희롱하는 사람들, 그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문제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접촉한 상태였습니다. 마음에서 이 세상 것들의 있음을 느꼈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는 바람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해 잡히신 예수님은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전대미문의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됩니다.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체포당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순간은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대했습니다. 이 세상의 외부적인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서 살기 좋은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루어줄 그리스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그리스도가 아님이 분명해졌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체포의 순간은 베드로가 가졌던 바람과 희망도 예수님께서 이루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체포되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불필요하게 여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서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러니인 이유는 세상에서 전혀 쓸모없다고 여겨져서 체포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경로가 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사역은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움직이는 어둠의 권세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기점으로 하여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저주 속에 떨어지게 되고 이와 동시에 체포당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어둠의 권세에 의해서 체포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과정이 사람들을 생명과 광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과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심과 베드로의 부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체포되심은 곧 예수님을 통해서는 이 세상 것을 단 한 가지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없음을 천명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바람과 소원이 예수님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이 확정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이나 희망은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에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옳은 것이었지만 이 당시의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 속에 던져지심으로써 저주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저주 바깥으로 나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리스도 사역의 내용입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시던 공생애 때는 바로 이 사역을 위한 준비단계였지 본격적인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진짜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 예수님에 대한 부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을 통해 가졌던 세상에 대한 모든 헛된 바람이 진짜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 모두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측근으로서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힘으로 세상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격화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기적의 예수님은 좋았으나 체포되시는 예수님은 싫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저주 속에 던져지심을 통해 본격화되었습니다. 저주 속에 던져지신 후에 일어난 첫 번째 일은 체포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께서 저주 바깥으로 나가시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이 나에게도 일어나는 사건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저주 속에 던져지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저주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입니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즉각적으로 일어난 일이 체포당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순간까지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이 경로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나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동일시함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가지신 전공과목이자 전문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전공과목이나 전문분야라고 비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이유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집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면 늘 부탁을 드리는 수리점이 있습니다. 수리점에서 실장님이 출장을 오시면 상대하는 것은 오직 고장 난 컴퓨터뿐입니다. 방에는 다른 기자재들이 많이 있지만 오직 고장 난 컴퓨터와 상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은 오직 저주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저주 바깥으로 꺼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공과목이자 전문분야는 저주 속으로 던져지셔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루어진 과정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과정에 올라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마음이 돈 문제에 눌려서 해결을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내게 베푸실 수 있는 구원의 길이란 딱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로서 전공과목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돈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의 손발을 묶어서 체포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돈 문제의 해결이지만 그리스도가 하시고자 하는 일은 나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셔서 온갖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입니다.
이것은 돈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내게 오셔서 해주실 수 있는 일이란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와 닿아있는 마음의 손발을 묶으시고 십자가로 끌고 가십니다. 삶의 형편을 어떻게든 개선시키고자 하는 나의 바람을 죽이시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전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의 전공과목은 저주에 던져져서 체포당하시고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우리 마음을 끌어가십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가치가 전혀 없는 자를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조롱당하셨다는 것이 전공분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조롱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에서 어떤 소유도 갖지 못하는 상태로 끌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한 있음을 느끼는 것조차 불가능한 죽음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구원을 위해 이루시는 전공과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외의 다른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으며,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문제들도 해결주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바람도 예수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공분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전공분야는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 가진 바람과 소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삶의 개선을 바라는 나의 마음의 손발을 묶어서 체포당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조롱당하고 수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입니다. 저주로 던져지시고 저주로부터 빠져나갈 때까지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의 전공분야 외에는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베푸시던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활동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본문 62절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시선은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께로 베드로를 끌어당기시고자 하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베드로의 세상에 대한 모든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당황하여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이전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이 시작되고 나타나자마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오순절 성경강림 사건을 통하여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주 속에 떨어지셔서 겪으신 사건들을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더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전후서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을 때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가 됩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우리도 베드로와 동일한 고민은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체 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토록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서 창조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당신이 만드신 내 몸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계십니다. 있음을 느끼고 계신다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그 대상들에 대한 계획을 갖고 실행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우리는 땅에서 살아갑니다. 몸을 중심으로 삶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만물을 있게 하신 창조주로서 있음을 느끼시지만 나는 있게 한 것들이 아님에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스스로 지정의를 느끼며 세상에서 원하는 대로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합니다. 이 별도의 상황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은 하나님과 나에게서 똑같이 일어나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일에 대하여 나의 지정의를 죽이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지정의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에 장난질을 쳤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이 땅에서 내가 대신하고자 하는 상황을 죽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있음을 느끼시는 일들에 대해 왜 피조물인 내가 있음을 느끼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죽어야만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세상 대상들에 대해 있음의 느낌을 갖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죽어야 하는 일입니다. 배우자에 대해서조차 있음을 느끼는 마음은 죽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있음을 느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느끼시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획을 실행해 가시고자 하시니 불필요한 나의 느낌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네가 있게 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또한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대답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 됩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있게 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있음을 느끼시면서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계획하고 실행해나가실 것입니다.
세상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면 내가 나설 순간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면서 계획하고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똑같이 땅에서 스스로 멋대로 하고 있는 이 상태를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있음으로 느낍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세상 사람이 조롱할 수 있는 위치로 끌어내리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입니다. 그리고 있음 자체를 느낌이 불가능한 죽음의 상태로 이끄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께 바랄 수 있는 것은 세상 문제의 해결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어떤 바람도 예수님께 성취시켜 달라고 구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고 동일시한다면 세상에 대한 바람의 성취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이 단 한 가지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위한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도 바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행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은 세상 문제에 대해 손대며 바라고 희망하는 나의 손을 묶어 수갑을 채우고 체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가장 낮은 자리로 조롱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매 맞고 찢어지는 그 자리로 나를 끌어내리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입니다. 여기에 더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몸부터 시작하여 가족은 물론이고 어떤 것도 있음 자체를 느낄 수 없도록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전공과목 외에는 내게 주실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주시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를 왜 믿는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의 전공과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점에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나그네임을 갈파한 베드로의 변화가 우리의 변화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의 전공과목이 충분히 발휘되는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