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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있음과 좋음 느낌의 타락, 신성모독>의 줄거리:
십자가 사형을 요구하면서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에게 빌라도는 무려 세 번씩이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이 전혀 무죄임을 어필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집요하게 일치단결하여 그리스도를 제거하려 합니다. 명분은 신성모독 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요함을 통해 오히려 자신들의 신성모독을 드러냅니다.
있음과 좋음 느낌의 타락, 신성모독
(누가복음 23장 1절~25절)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있음과 좋음 느낌의 타락, 신성모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있음과 좋음 느낌의 타락, 신성모독’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차적으로 맞이하는 본문은 빌라도의 재판과정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결정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성모독은 바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타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타나는 것 또한 신성모독이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나와의 관계에서 정의하자면 내가 동일시해야 하는 예수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어야 할 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볼 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뭇 특이합니다. 우리는 앞선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은 나의 의식을 통해서 동일시함으로 마음을 드려야 할 그리스도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의식이란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내가 의식으로 예수님과 동일시할 때에 있음을 느끼는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마음이 예수님께 드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이고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의식으로 동일시해서 마음을 드려야 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나도 예수님을 싫어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선민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싫어했다는 것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선민이 그리스도를 싫어함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본성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본성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은 나도 의도치 않게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싫어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민과 대비되는 존재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선민이나 기독교인을 싫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체를 싫어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리스도에게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것은 선민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어진 바람직하지 않은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선민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도록 싫어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싫었느냐면 민란을 일으키고 사회에 불안을 조성하며 살인까지 저지른 바라바보다 싫어했습니다. 바라바는 종신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바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예수님을 이러한 바라바보다 더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선민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에게서 법적인 잘못만을 찾고자 하였으나 세 번씩이나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풀어주고자 하지만 백성들의 요청은 단호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빌라도는 이 일로 말미암아 의도치 않은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였고 예수님을 백성들에게 넘겨주는 타협을 하게 됩니다. 읽지 않은 1~17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헤롯조차도 예수님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풀어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헤롯도 정치가였기에 책임을 피하고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민들에게 미움을 받으셨던 이유는 바로 내가 동일시해야 할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민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싫어함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신성모독이라는 누명을 덮어씌우고자 하였습니다. 신성모독이란 선민사회에서 가장 큰 중죄였습니다. 선민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사람을 의미하기에 선택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는 다른 모든 죄보다 큰 죄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에서 가장 잔혹한 십자가형을 집요하게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요청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근거는 앞서 살펴보았던 22장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9~70절을 보면 산헤드린공회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인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으나 산헤드린공회는 이것을 인정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이를 근거로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언도합니다.
이 장면이 마태복음에서는 좀 더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1~64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성모독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권능은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미합니다. 그 전지전능하심이 나오는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인한 것을 신성모독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능의 우편에 앉으심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특징은 하나님의 최측근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의미합니다. 최측근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밀착되어 하나 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보다 우선해서 다른 것의 있음이 느껴지지 않거나 아지랑이처럼 멀리 느껴지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동일시해야 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 때 마음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대상들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이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느낌이 온전한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좋음의 느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권능의 우편은 하나님 있음의 느낌이 가장 강렬한 자리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느낌이 가장 온전한 자리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가장 나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선민들이 살인자인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서 동일시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우편으로 끌고 가시고자 하셨다는 점이 선민들이 예수님을 더 싫어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무지렁이 같은 우리조차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영이자 마음은 하나님의 최측근의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가장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체포당하시고 희롱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의 판결기준에 따르면 우리 모두를 신성모독죄에 빠지는 자들로 만들려고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판결한 산헤드린공회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과 접촉되고 밀착되고 하나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원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수여자가 아닌 수혜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수여자의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곧 세상과는 마음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요구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붙어있기에 하나님과는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나와 돈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내가 수여자의 입장이라면 하나님께 마음이 붙어서 하나님 뜻대로 돈을 지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 수혜자의 입장이라면 마음이 돈에 붙어서 하나님께 돈을 받으려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수혜자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마음을 붙여주고자 하시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싫어해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선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수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본성상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에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름만 남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상태인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이란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을 밀착시켜서 수여자의 입장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역을 무시하고 끝내 수혜자의 입장에 서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수혜의 대상은 재산이나 건강 같은 물질적 가치일 수 있으며 명예나 존경이나 인정 같은 추상적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본성상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신성모독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의 죄목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밀착되어 하나 되어 계셨습니다. 이 하나 됨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입니다. 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타락한 상태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공회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이들이 말하는 신성모독은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과 하나님의 좋으심의 느낌을 거부하는 것이 진짜 신성모독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처음부터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백성들은 예루살렘 입성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환영하고 따랐습니다. 그랬던 백성들이 예수님이 겟세마네기도 후에 저주 속에 던져져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하시자마자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체포당하시고 희롱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도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본성은 바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본성이기에 우리 또한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본성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진짜 신성모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성모독과 관련하여 있음의 느낌의 타락과 좋음의 느낌의 타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있게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마음과 뜻과 힘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하는 이탈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내 마음이 밀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유일하게 신성모독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첫 번째로 신성모독의 형태는 있음의 느낌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하셔야 될 일을 내가 별도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세상 만물과 만인과 만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예를 들어, 내게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있음을 느끼고 계십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가족을 마음에 담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가족의 있음의 느낌을 하나님처럼 똑같이 느끼고자 한다면 이것이 신성모독입니다. 내가 가족들과 관련해서 할 일은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면 됩니다. 이것을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들으면서도 어색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나 부장님의 있음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을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고 신성모독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가져야 될 있음의 느낌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있음의 느낌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존재감이 느껴지면 그 느낌에 의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종속되고 이로부터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인격전체가 있음의 느낌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서 무엇을 느끼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하나님과 붙어있으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서 내가 별도로 있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인한 것을 두고 신성모독을 운운하였지만 진짜 신성모독은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은 또 하나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흉내를 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족들의 있음을 느끼고 계시기에 나는 가족들의 있음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배우자가 무능하다고 불평하거나 배우자가 유능하다고 만족해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일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대신 배우자를 담는 신성모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민들은 이러한 본성을 없애고자 하신 그리스도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이 체포당하신 것입니다. 체포당하신 것은 세상에서 마음의 손을 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든 마음의 있음을 느끼는 것에 손을 대면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고자 하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체포당하신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한다면 모든 것에서 마음의 손을 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삶에서 신성모독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있음을 느껴야 할 가족들에 대해 피조물인 내가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예를 들어 임금님이 회의를 하고자 하는데 영의정이 들어와서 임금님을 무시하고 내관이나 상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대화한다면 임금님은 대노할 것입니다. 임금님이 있는 자리에서는 임금님이 최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를 만날 때에 애인과 함께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계심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대신 가족을 먼저 느끼고 회사 사람들을 먼저 느끼고 친구를 먼저 느끼고 애인을 먼저 느낀다면 신성모독입니다. 임금님을 무시하고 내관이나 상궁과 대화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란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의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을 따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것이 신성모독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성모독을 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체포당하셨습니다. 체포당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마음의 손을 세상으로부터 떼는 것입니다. 눈앞에 배우자가 있을지라도 마음은 배우자에 있음의 느낌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눈앞에 사장님이 있을지라도 마음은 사장님의 있음의 느낌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 하나님에 의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 반복해서 살펴보았던 마음의 문제를 신성모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바로 이 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신성모독의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될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하여 다른 대상들의 있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신성모독의 형태는 좋음의 느낌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후에 희롱당하시고 모욕과 욕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앞서 권능의 우편이란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자리이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좋음을 가장 온전히 느끼는 자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사실 또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누구나 돈이 없을 때는 “돈 좀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음의 느낌을 하나님 이외의 돈에서 느끼는 상태입니다. 있음의 느낌을 하나님 이외의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것이 타락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좋음의 느낌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것도 타락이고 신성모독입니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은 “몸이 건강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예를 들어 아가씨가 오른쪽에는 남자친구가 있고 왼쪽에는 남자친구가 데려온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와 즐겁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가 남자친구에게는 지독한 경멸과 모독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젖혀둔 채 돈이나 건강이나 형통이나 성공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욕감을 느끼실 수밖에 없습니다. 신성모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신성(神性)은 곧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적용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신성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성은 스스로 있음이시고 최고로 좋으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것은 곧 있음의 느낌을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 적용한 것이고 동시에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좋음을 적용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타락이고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있음이고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있게 된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있게 하셔서 존재하게 된 것들입니다. 있음의 느낌이란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성모독의 본성을 제어하시기 위하여 체포되시고 희롱당하셨습니다. 희롱당하신 자리는 거지 나사로의 자리입니다. 오늘은 체포당하심과 희롱당하심의 의미를 신성모독과 관련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체포당하신 것은 마음이 세상에 손 댈 수 없는 상태가 되신 것이고, 희롱당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잘못 적용하여 좋다고 느끼는 가치가 제로인 상태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좋음의 느낌의 대상이 되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그리스도 사역의 두 번째 단계가 희롱과 모욕과 천대받는 자리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스스로 있음이며 최고로 좋음입니다. 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게 적용한다면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신성모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체포되시고 희롱당하셨습니다. 이 주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더 쉬워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가운데 오늘 하루도 복지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가 신성모독의 본성을 벗고 신성을 따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자들로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