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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두 행악자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의미>의 줄거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소위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해가 심합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과 이에 동조하는 유대인의 죄악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찢어지는 아픔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신 기도입니다.
두 행악자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의미
(누가복음 23장 32절~38절)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두 행악자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의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두 행악자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의미’
저주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다만 마음의 접촉이 끊어져있어도 생각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과의 접촉이 끊어진 저주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주 속에 놓인 상태를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마음의 기쁨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이때 마음은 돈에 접촉한 상태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녀의 형통을 통해 마음의 기쁨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이때 마음은 자녀에 접촉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과 접촉이 끊어진 저주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저주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하에는 소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불리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상칠언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첫 번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유대인들과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악이 용서받기를 간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다른 사건을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자기 변론의 기회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기회를 자기 변론이 아닌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이러한 사도 바울을 향해 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의 죄악을 용서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에서 그것을 더욱 느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하는 행동을 보실 때에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지실 것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와 가능한 한 떨어지고 싶어 하는지 저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보시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 마시옵소서. 저들에게서 눈을 떼시고 저를 보시옵소서. 저는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할 뿐입니다. 저를 보시고 마음을 달래시고 찢어지는 마음의 아픔을 겪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생각할 때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분을 참지 못해서 위장병까지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서는 잊어버리라는 조언을 합니다. 용서해 버리고 마음에서 아예 생각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시하신 것은 행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문제시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지시는 것을 느끼시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한편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누가가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한 시점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시기에 앞서 두 행악자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3~34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는 두 행악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상태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둘 때에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단순히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이 기도와 두 행악자와의 연관성은 적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 속에 던져지기 이전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의 죄악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기도를 원수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라 여긴다면 이러한 모든 사람들까지 다 해당되는 내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행악자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것은 누가에게만 있는 특이하고도 놀라운 관점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심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은 우리가 동일시해야 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부모보다 처자보다 심지어 나의 몸보다도 더 가까이해야 할 분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0장 37~38절을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저주 속에 있다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의 접촉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나 자녀의 있음을 느끼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업무의 있음을 느낍니다. 이렇게 세상 있음의 느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바로 저주의 삶입니다. 이러한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저주 속으로 던져지셔야 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있음을 느껴야 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저주 속에 들어오심으로써 내가 있음을 느끼던 어떤 대상보다도 먼저 의식으로 붙잡아야 되고 동일시해야 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달린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두 행악자는 사형수입니다. 가능한 나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몸보다도 가까이하고 동일시해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멀리 떨어뜨리고 싶은 두 사형수와 똑같이 여겨지십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그리스도를 가장 멀리 떨어뜨려야 할 행악자와 동일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가장 가까이해야 될 그리스도를 가장 격리해야 될 행악자와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하나님의 마음을 찢는 행위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선민이라면 마땅히 십자가에서 죽는 나를 가장 가까이 여겨야 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처자나 자신의 몸보다도 나를 가까이 여겨 동일시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가장 멀리 두어야 될 행악자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시는 아버지께서는 이들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가를 보시며 마음이 찢어지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저들을 보지 마시고 저를 보시옵소서.”라는 심정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두 행악자가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상황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두 행악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부터 끊어진 저주받은 세상 안에서 실패하고 인생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대신에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세상의 좋음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지정의와 언행을 합니다. 이 세상 것을 좋게 느끼고 많이 가지려고 하다가 결국 최악의 상태에 이른 경우였습니다. 즉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받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으로 사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두 행악자와는 상황이 반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속으로 던져지셨고 마음이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상태에서 분리되셨습니다. 사람들과 똑같이 저주받은 상태에서 예수님은 생각하십니다. 이왕에 내가 저주 속에 던져졌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유일하게 좋은 분이신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끊어진 상태에서 최선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 자체의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는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낄 수 없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느낄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는 기능 자체를 죽이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없으면 지정의와 언행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세상에 던져지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두 행악자는 동일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본문이 참으로 기묘합니다. 두 행악자는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으로 볼 때 최악의 경우를 맞이한 실패자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저주받은 세상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선택한 최선의 성공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저주받은 세상 안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는 최고의 성공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부터 철저히 끊어진 상태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저주 속으로 깊이 매몰되어가는 것입니다. 건강이나 장수는 모든 사람이 좋음을 느끼는 가치입니다. 마음이 건강과 장수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하나님 좋음의 느낌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돈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입니다. 돈이라는 대상에 마음이 붙어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을 느끼며 돈이 많아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의 상황이 이러하기에 저주 속에 던져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최선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두 행악자는 저주의 세상이 정한 기준에서 볼 때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주의 상황에서 완전히 성공한 예수님이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게 특이합니다. 저주 속에 던져진 상태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끊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을 느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면 이러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최선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승진의 좋음을 위해 달려가고 사장님 있음의 느낌에 쩔쩔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가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이러한 직장에 대해 죽는 것이야말로 최선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기준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가장 멀리해야 될 두 행악자와 동일하게 여깁니다. 멀리하고자 한 끝에 두 행악자들을 십자가에 매달고자 한 것처럼 세상에 대해 죽고자 하는 사람을 멀리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 최선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성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은 이것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행악자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생각합니다. 가장 멀리 두어야 될 자들이라 여기고 인생 최악의 경우를 맞이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있어서는 최선의 성공이었지만 선민들은 인생 최악의 실패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예수님의 사하심의 기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최고이자 최선의 상태인 십자가를 최악의 실패로 보는 선민들의 마음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못 박은 행위 자체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두 행악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지시는 것을 느끼십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십자가는 가장 가까이 여기고 성공으로 여겨야 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기뻐해야 될 십자가를 인생 최악의 실패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십자가를 최악의 상황으로 보고 있는 저들을 보시며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저를 보시옵소서. 저를 보시면서 저들을 잊어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아프실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지경이면서도 오직 아버지 걱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이 왜 이렇게 아프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생각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는 결코 당당하고 주저함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고 자녀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느낌에 의해 지배되는 지정의와 언행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떨어져서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없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편안하고 주저함 없이 늠름하게 살아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로렌스 신부가 준 비약을 먹고 가사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자살을 합니다. 선민들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가짐은 이와 같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선민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인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두 젊은이를 통해서 사랑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선민의 사랑도 이와 같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선민이 로미오라면 줄리엣은 하나님입니다. 줄리엣을 잃은 로미오가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듯이, 하나님과 접촉이 끊어진 선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줄리엣이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로미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본다면 큰 실망을 느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났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행악자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를 문제시하지 못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적어도 선민들이라면 줄리엣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로미오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끊어질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바에는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시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손발에 못이 박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십자가,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써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십자가, 배에 창이 찔려서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가질 수 없는 십자가를 최선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에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무력해서 십자가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열두 영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불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멸절시키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최선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선민들이 이러한 예수님을 행악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토록 멀리해야 될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는 십자가 생활화라는 말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죄 사함의 사건으로 끝나버린 채 생활 속에서는 완전히 격리되었습니다. 생활 속에서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며 쟁취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때와 마찬가지로 찢어지고 계십니다.
적어도 선민은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분리되었다면 차라리 죽기를 바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분리됨을 문제시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들에게서 있음을 느끼고자 하고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배우자에게서, 자녀에게서, 회사에서, 돈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면서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실 때에 이러한 모습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있어서는 최선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상태에 떨어졌다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 자체를 죽이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범을 보이셨기에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끊어질 바에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야말로 최선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최선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주 때문에 세상을 먼저 느끼는 상태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떨어진 저주받은 세상에서는 이것이 인생 최고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인생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 행악자들의 최후와도 같은 최악의 실패로 여깁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차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죄 사함의 사건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배움이 실제 삶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인 채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논리와 이론을 긍정한 후에도 생활 속에서는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올 때마다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줄리엣을 잃은 로미오의 마음처럼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잊은 채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나를 위하여 사하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떨어진 상태에서 어쩌면 저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의 있음을 느끼며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저들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시겠는가. 하나님 저들을 보시지 마시고 저를 보시옵소서. 저를 보시고 저들의 죄를 잊어버리시옵소서. 저들의 구원은 저에게 맡겨주시고 저만 바라보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찢어지시는 것을 원치 않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인생 최고의 성공입니다. 행함이라는 말이 나오니 믿음과 대치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라고 볼 때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하나님이 사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 중에 최고이자 최선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내 몸보다도 더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님과 동일시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시켜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주에 찌든 나의 최선은 십자가만이 유일한 인생의 성공입니다.”라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신 대로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진 새 언약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가장 멀리 격리시켜야 될 사형수 행악자들처럼 여기는 우리의 무지함이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중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 것이 인생 최고의 성공임을 자각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오늘도 성공의 성공을 매순간마다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